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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바다 를 잊지말라
Korea, Republic of 나도국민이다 0 359 2015-05-29 12:37:29
눈물 바다 함보른 광산 최성령                     :


그곳은 朴正熙 대통령과

그리고 독일에 간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의 서러운 눈물 바다였다.


1964년 12월10일.

박정희 대통령 內外는 독일의 首都 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으로 출발했다.

朴대통령과 뤼브케 독일 대통령이 한 차에 타고

육영수 여사는 뤼브케 대통령 부인과 바로 뒷차에 탔다.


오전 10시40분.

朴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탄 차가 탄광회사 본관 앞에 도착했다.

朴대통령 內外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은 양복 정장에 간호사들은 색동 저고리를 입고

左右에 줄을 서서 대통령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산 樂隊가 주악(奏樂)을 올리는 가운데

朴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과 손을 잡았다.


"근무 중 이상 무!"

"각하! 안녕하십니까?"

광부들 대부분이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일까?

광부들은 軍紀가 가득 든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하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朴대통령도 거수경례로 답하며 그들과 악수를 나눴다.

朴대통령과 10m쯤 뒤떨어져서 걷던 육영수 여사는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넸다.

陸여사가 "고향이 어디?"하고 묻자 간호사들은 울먹였다.

"가족들에게서는 연락이 잘 옵니까?"

"일은 고달프지 않습니까?"

陸여사가 세 번째 간호사와 악수를 하면서 안부를 묻자

그 간호사는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것이 신호가 돼서 광부, 간호사 할 것 없이 다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하던 광산 악대도 꺽꺽거리며 울었다.

행사장인 강당 중간쯤에 가 있던 朴대통령도

뒤를 돌아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陸여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주저앉으려 했다.

주위에서 간신히 陸여사를 부축했다.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들도 카메라를 내려 놓고 함께 울었다.

취재기자들도 주저 앉아 통곡을 했다.

독일인 광산회사 사장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10분 이상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朴대통령 내외는 壇上에 올랐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가 愛國歌를 연주했다.

朴대통령의 先唱으로 시작된 애국가는

뒤로 갈수록 제대로 이어지지를 못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가 후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합창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 소절인

"대한 사람 대한으로"에 이르러서는 歌詞가 들리지 않았다.


함보른 광산회사 테드 호르스트 영업부장이 환영사를 읽었다.

그는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이 곳을 찾아 준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인 광부들의 근면함과 엄한 규율(規律)을 칭찬했다.

그의 차분한 환영사로 식장의 분위기가 다소 진정됐다.

朴대통령이 演壇으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다음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相逢하게 되니 感慨가 無量합니다.

祖國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勞苦가 많으십니까.

독일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원고를 덮어 버렸다.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그리고 간호사 여러분!

조국의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외로움이 많을 줄 생각됩니다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異國에 찾아왔는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生前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基礎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흐느낌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결국 그도 울고 말았다.

강당 안은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다.

朴대통령은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백 갑을 선물로 전했다.

30분 예정으로 광산에 들렀지만

광산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朴대통령은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대통령 一行은 광부들 宿所를 돌아 봤다.

우리 광부들의 얼굴과 팔, 다리에는 상처투성이였다.

채탄작업 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은 상처들이었다.

지하 천 미터 아래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난 후

갱 위로 올라와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얘기를 朴대통령은 들었다.


광부 대표 유계천 씨는 탄가루 묻은 손을 내밀며

"이국 땅에서 대통령 내외분을 뵈니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면서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독일에 남아 일 할 수 있게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朴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떠나려는데

한국인 광부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박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 번 만지게 해 주세요"


朴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차 안의 朴대통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았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테니 울지 마세요"라며

朴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首都 본의 宿所에 도착한 朴대통령 내외는

한국일보의 정광모 기자를 방으로 불렀다.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鄭기자가 "울지 마세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내외를 위로했다.

그러자 朴대통령 내외는 鄭기자를 붙들고 또 눈물을 흘렸다.

한참만에 눈물을 그친 박 대통령은 정기자에게 두 가지를 다짐했다.

"기왕에 정해진 동남아 巡訪만 마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이 밥술깨나 들게될 때까지는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어야겠다"

통역관으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前 국회의원) 씨는

"그때 박 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근대화의 始發點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당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자헌(前 체신부장관) 기자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64년 12월11일 자 그가 조선일보 1면에 쓴 기사는 이랬다.

"눈물바다였어요.

간호사들이 陸여사를 붙들고 울고 陸여사도 통곡을 했어요.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의 일은 내 인생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보른 광산에서 朴대통령 내외를 만난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의 처참한 가난이 서럽고

돈을 벌러 이역만리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만 9천여 명의 광부와 萬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파송됐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광부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정광모 씨는

당시 독일에 간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少數였고

공과대학 등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첫 번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잘해야

앞으로도 계속 광부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을 이력서에 僞造해서 광부라며 내보냈다고 했다.


1962년10월 한국이 독일로부터

최초로 들여온 1억 5천 만 마르크의 차관(借款)은

바로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정부의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억 9천 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出處 : 예술가랑 블로그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도 웁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눈물이 헤퍼집니다.

마치 내가 광부가 되어 그곳에 있는 느낌입니다.

지금부터 50여년 前의 일인데도 말입니다.


나라는 가난해서 볼품이 없었지만

가난한 나라 대통령과 국민은 그래도 하나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가난해도 우리는 祖國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가 金素雲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미가 레프라(문등이)일지라도 나는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革命을 했으나 나라가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美國에 돈을 빌리려 갔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문전박대하고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歸國 비행기 안에서 너무 서러워 울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맨손을 내밀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낸 것입니다.

그들이 받는 임금 중 일부를 담보로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밉지만 실속을 차려야 했습니다.

야당과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일청구권 資金을 받아냈습니다.


월남派兵을 했습니다.

그때의 반대는 더 혹독했습니다.

美國은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뺀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실속을 차렸습니다.

파월장병들이 받는 임금 중 일부를 국가예산으로 썼습니다.

한국기업들이 월남에 진출하여 外貨를 벌었습니다.

전쟁 중 쓰였던 무기와 장비는 철수와 더불어 국내로 가져왔습니다.

전쟁수행의 경험과 物資의 확충으로 自主國防이 가까워 졌습니다.


곧 이어 中東 特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덥고 건조해서

다른 나라들은 그곳에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우리는 월남에서 전쟁을 수행한

유능한 장병들을 근로자로 그곳에 진출시켰습니다.

현대 대우 등의 건설기업이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가난한 나라를 일약 후진국에서 中進國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세력은

그를 독재자라고, 친일파라고 폄하(貶下)합니다.

양심이 있다면 하늘을 쳐다 보십시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온전(穩全)했겠습니까?

없는 자리에서 하늘은 커녕 아래도 보지 못합니다.


왜들 이러십니까?

그분 덕분으로 그나마 이 정도로 사는 것입니다.

같은 線上에서 출발한 다른 나라들은 어떤지 돌아다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발 밑으로 까마득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나라는 열 댓 나라 밖에 안됩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은혜를 아는 동물입니다.

또 은혜를 아는 짐승이 하나 있습니다.

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모르면

개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개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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