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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식량난과 배급중지는 김정일의 내부 적대세력 제거를 위한 전략
Korea, Republic o 멤피스 0 387 2008-04-07 01:24:20
-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

1. 왜 함경도를 잘라버렸는가.

김정일에게는 북한의 북동부는 몰락한 땅이며 복종하지 않는 인민들이었다. 거기에는 적대계층이 많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일단 유사시는 한국군에게 협력하여 평양정권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보고 전전긍긍하여 평상시부터 감시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전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간부였던 탈북자 윤대일 씨는 그의 저서 「북조선 · 국가안전보위부」(문예춘추 2003년)에서 10호 대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쟁발발 시에는 가족과 함께 즉결처형하기로 결정되어 있고 그의 처형 장소도 미리 정해두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애초에 함경북도는 평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지로서 산에 둘러싸인 혹박한 땅이다. 17세기 이조 봉건제 시대로부터 서울에서 전쟁에서 패한 정치가, 관리들의 유배지였다. 그러한 분들의 후손이라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구소련과 중국에 인접하고 있는 까닭에 일본제국의 강점시대에는 소련의 사회주의 사상이 어느 곳보다 빨리 들어온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사람들의 기질도 타 지역과 달리 자유 활달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자유로이 왕래함으로써 중국의 간도지방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다수의 함경도민이 이주하였다. 지금 연변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200만 명의 조선인 루트가 함경도이고 많은 함경도의 사투리라 대세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원 대부분은 함경도 출신자였다.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 (김정일의 생모) 도 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빨치산 부대의 재봉사였었다. 해방 후 김일성이 수십 명의 빨치산 동료들과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귀국하여 정권 수반이 되면서, 동료들도 모두 요직에 앉게 되었다.

또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주할 때 통역이나 보좌관으로, 소련의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조선인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 대부분도 함경도 출신이었다. 함경도 인맥이 당과 정부를 장악하게 되고 해방 직후는 「평양은 함경도의 식민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는 함경도민은 두려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었다. 적대계층의 주민들도 대부분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1960년대에 대거 귀국한 재일조선인의 경우 많은 사람을 함경북도에 거주시켰다. 이 지역에는 탄광이나 광산이 많다. 강제노동의 대명사처럼 이용하고 있는 아오지 탄광도 함경북도에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하에서도 이 지역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다. 조선독립투쟁의 투사들이 고국을 등지고 떠났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싸웠다. 그 투쟁의 전통과 실적으로 해방 후 조선노동당 내에서도 갑산파라 하는 인맥이 존중되어 그 중심적 지도자인 부이원장은 인민의 두터운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를 시기한 김일성과 김정일은 1967년 5월 조서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총회에서 박금철을 위시해서 이효순, 박용국 등 갑산파를 철저하게 숙청하였다.

1995년 여름 조선인민군 제6군단에 의한 대규모 쿠데타 미수사건이 적발된 것도 함경북도 청진시의 라남이 무대였다. 그들은 함경북도에서 평양으로 쳐들어가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할 계획이었다. 민중봉기에 의한 차우세츠크의 처형을 눈으로 확인한 김정일은 공포에 떨었다. 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이자. 500만 명의 함경도민 그들 중 다수가 적대계층의 낙인이 찍혀 철저한 차별을 받아왔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선제공격을 치고 나선 것이다. 식량배급의 전면중단이라는 병량공격이었다.

북한에는 현재 강제수용소가 10개소 있다고 한다. (윤대일 「북조선. 국가안전보위부」) 그 중 요덕수용소 등 6개소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 집중하고 있다. 함경북도 회령을 2003년 가을 취재차 중국에 들렸을 때 중국 측 삼합진에서 바라보았다. 특파원으로 상주하고 있을 때에는 거의 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판문점밖에 가보지 못했다. 북한의 최북단 땅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가보는 게 좋다. 백두산 산록에서 얼마 되지 않는 두만강 상류 - 강폭은 50m정도, 물의 깊이는 무릎이 잠길 정도, 강 건너 회령에는 경비병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정도라면 탈북은 어렵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강가의 풍경이었다. 회령시가지의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앵속 (양귀비) 열매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10여명 정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측의 풍부함과 활기에 비하면 강하나 사이에 둔 북한 쪽은 공장에서도 연기 하나 오르지 않고 있다. 죽은 거리의 인상이다. 개가 짖는 소리만이 구원이었다. 제1장의 3에서 소개하였지만 1990년 1월 25일자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김일성 연설이 재차 수록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여 주기 바란다. 김일성이 1959년 3월 23일에 한 연설로서 「함경북도 당 조직의 과제」라는 제목이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은 지방주의 (당 중앙을 경시하고 자기 지방을 제1로 한 반항적인 태도)가 뿌리 깊고 강하여 당 중앙의 방침에 따르지 않으며 제멋대로 활동한라고 엄하게 비판한 연설이었다. 김일성에게도 함경북도는 다루기 어려운 지방이어서 상당히 골머리를 썩게 한 것 같다. 함경북도의 중심도시 청진시를 1977년에 직할시로 승격시켰으나 7년 뒤에 이를 취소하고 다시 격하시킨 것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다음가 같이 말하고 있다.

「지방주의, 가족주의는 종파의 온상이다. 이것이 종파의 시작이며 발전하게 되면 종파가 된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 활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과제는 지방주의, 가족주의의 여독을 제거하는 일이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뒤로 돌아서서는 반역하는 분자들과는 타협이 없는 투쟁을 해야만 한다.」종파란 북한에 있어서는 반당, 반혁명분자를 말하며 죽여도 아깝지 않은 「계급의 적」을 말하고 있다. 함경북도 사람들은 언제 반항 할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김일성도 김정일도 전전긍긍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김정일이 1990년 1월에 이 연설을 재차 게재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함경북도를 잘라버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고도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적은 미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북한 내의 인민, 그 중에서도 주로 함경남북도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적대계층이었다. 그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아사로 위장한 살인인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계급투쟁이었으며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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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지 않아도 될 아사자

「수령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들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많은 탈북자가 하는 이야기다. 어느 탈북자도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의 생전에는 고생스러워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식량난이 심하게 되면 될수록 수령님이 그리워집니다. 수령님이라면 어떠한 손을 써서라도 국민을 굶어죽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민족의 희망을 구해서」한국 정토출판, 1990 p124) 북한 민중은 본능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구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원인은 김일성에게 있는 것이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도 김일성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식 김정일의 행위가 악마가 태어난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잔혹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수십만 명의 적대계층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죽게 하였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게 하였다. 엄청난 정적을 죽였다. 공개총살도 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공개총살 방법은 월등하게 잔학했다고 많은 탈북자들은 말하고 있다. 일부러 뇌수가 튕겨 나오게 쏜다. 김일성이가 살아 있었다면 아사 살인이라는 수법으로 300만 명이나 되는 인민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사를 제일 싫어한 것이 김일성이었다.

김정일은 홍수와 한발 등 계속된 자연재해 때문에 수확이 감소된 것을 기아의 이유로 하고 있지만 현실로 그 모두가 허위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나치오스 씨의 견해를 소개한다. 다음의 표가 있다. 가축의 사료를 제외한 북한 전 인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은 1년에 380만 톤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부족식량은 1995년부터 1996년은 3만 톤이 조금 안 된다. 1996년부터 1997년에는 47만 톤, 1997년부터1998년에는 29만 톤, 즉 지원식량이 전 인구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면, 사람들은 제각기의 대응책에 의해서 기아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나치오스 씨는 분한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부의 배급정지조치에 의해서 가장 극심하게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깊게 식량지원을 집중하였더라면 수백만 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을지라도 수십만 명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묘하게 짜여진 지원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굶주린 사람들인가, 누가 빠졌는가, 누가 아사 직전인가를 구분하기가, 북한에 있어서는 지원활동 당초부터 크게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테이터는 오랫동안 축적한 기아지원방법의 처방전을 가진 우리들에게 바로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 어느 것 하나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원식량계획은 기아가 정점에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의 식량 수송선이 도착한 것은 아사가 끝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인도지원기관은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 원조를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대체 누가 그런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북한 기아의 진실」p291-292)

(표1) 국내곡물생산량,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

1995-96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903,374
국내곡물 생산량 4,100,000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870,000
(1)+(2) 3,773,374
부족한 식량 26,626

1996-97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1,171,665
국내곡물 생산량 2,840,000 원주2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160,000
(1)+(2) 3,331,665
부족한 식량 468,335

1997-98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1,321,528 원주1
국내곡물 생산량 2,660,000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190,000
(1)+(2) 3,511,528
부족한 식량 288,472

1998-99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국내곡물 생산량 3,480,000 원주3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960,000
(1)+(2)
부족한 식량

1. 모든 통계숫자는 매년 FAO/WFP의 수확고 평가
2. 이 숫자는 옥수수 재배의 50%를 공제한 것. 이 50%는 수확기전에 소비되거나 농촌 등에서 장래의 기근에 대비하여 조기 수확하여 1996-1997년 소비분으로써 수확되지 못함
3. 「FAO/WFP,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확고와 식량공급평가조사단. 특별보고서 「(유엔세계식량계획 98년 11월)에 의거해서 (하기와라 주, 나치오스 씨의 일본어역》북조선 기아의 진실 「(p288)의 표를 기초로 하고 구성하다. 손실 30%라는 것은 손모, 부패, 쥐로 인한 피해 등에 의한 감소, 대략의 숫자임) 한국 통일부의 자료 (표2)를 보기로 하자.

(표2) 최소 380만 톤이면 아사는 없다. 곡물의 연간 생산량은 얼마나?

1992년 443만 톤, 1993년 427만 톤, 1994년 388만 톤, 1995년 413만 톤,
1996년 345만 톤, 1997년 369만 톤, 1998년 349만 톤, 1999년, 389만 톤,
2000년 422만 톤, 2001년 359만 톤. (숫자는 한국 통일부의 자료)

북한인민이 1년간 꼭 필요한 최저 식량은 380만 톤이라고 나치오스 씨는 말하고 있다. 한국 통일부의 자료에 의하면 380만 톤을 밀도는 해는 1996년, 1997년, 1998년, 2001년이었다. 부족량은 11만 톤에서 35만 톤이었다. 이 정도의 부족이라면 국제원조 식량으로 충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국제지원이 본격화된 1995년을 시작으로 적은 해는 50만 톤, 많은 해는 154만 톤의 식량이 지원되었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표3)이다. 이것을 주민에게 제대로 배급했다고 하면 아사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는 나의 가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표3) 지원식량은 상당량 들어왔다. 아사자는 안 나와도 되었다.
1994년 7만 5,000톤, 1995년 73만 4,207톤, 1996년 50만 5,780톤,
1997년 83만 1,198톤, 1998년 103만 6,390톤, 1999년 89만 4,749톤,
2000년 154만 2,440톤, 2001년 106만 9,860톤, 2002년 97만 5,062톤
(숫자는 FAO의 Data Base에 의함)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나치오스 씨나 한국의 통일부가 근거로 하고 있는 숫자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북한의 매년 곡물생산량은 200만 톤 정도가 아닌가. 백보를 양보하여 이 의견을 긍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의 숫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표4)를 보시기 바람.

(표4) 북한은 식량을 상당량수입하고 있다. 그 정도의 여력은 있었다
1990년 121만 4,478톤 (1억 9,000만 불)
1991년 326만 8,464톤 (3억 9,804만 불)
1992년 259만 7,129톤 (4억 9,142만 불)
1993년 334만 360톤 (5억1,468만 불)
1994년 119만 7,390톤 (1억 5,893만 불)
1995년 253만 3,560톤 (6억 8,558만 불)
1996년 242만 606톤 (5억 9,427만 불)
1997년 308만 8,681톤 (7억 726만 불)
1998년 342만 9,964톤 (6억 9,268만 불)
1999년 261만 5,678톤 (5억 2,589만 불)
2000년 543만 2,262톤 (6억 6,058만 불) (숫자는 FAO의 Data Base에 의함)

이 표는 FAO (국제식량농업기구) 의 숫자이다. 북한이 각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식량의 양과 금액이다. 수입이 적은 해는 120만 톤, 많은 해는 500여만 톤여, 금액으로 하면 7억불을 수입하고 있다. 북한이 숨기지도 날조하지도 못할 유엔의 자료이다. 식량수입에 필요한 이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7년의 수입량은 약 300만 톤인데 금액이 7억불로 불게된 것은, 이 해에는 가격이 비싼 쌀과 정백미를 64만 톤이나 매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 2억 1,000만 불이 소요되었다. 아마 이 특질의 쌀은 특권층에 배급하기 위해서 구입했을 것이다. 1997년은 아사자가 200만 명이나 생긴 해이다. 당 간부 등은 아사자의 참상은 돌보지도 않고 자기들만 사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치의 경향은 국제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95년부터 시작되고 있다. 쌀과 정백미 수입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40만 톤, 1994년에는 12만 톤으로 좀 사가 하는 것 같았으나 1995년에는 117만 톤으로 뛰어 올랐다.

1996년 68만 톤, 1997년 64만 톤, 1998년 120만 톤, 2000년에는 160만 톤으로 급증하고 있다. 원조로 살이 찌고 있는 특권층은 백미로 생활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노동신문에서 말한 제국주의 나라들의 봉쇄정책에 의해서 식량을 살 수 없다고 한 선전이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이 통계숫자는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잉여식량을 바다에 버리면서 북한에는 한 톨의 쌀도 주지 말라고 했다며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 1년에 500만 톤 이상을 외국에서 사들여 오고 있지 않는가! 가격도 FAO의 숫자를 보면 타당한 국제가격이었다.

외국이 북한에 식량을 팔 때는 가격을 높이 올려서 사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었으나 이것 또한 거짓이었다. 이미 말했지만 100만 톤의 곡물이 있으면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인 1일 400g 배급했을 때 1년에는 146kg, 680만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다. 97년에는 300만 톤 정도 수입하고 있으므로 국내생산이 제로라 하더라도 2,040만 명 결국 북한 전 인구를 거의 1년간 부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사자가 발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도대체 그 많은 식량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특권계층의 축재와 장마당 (암시장)으로 부정 유출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가장 악질적인 반인민적 존재가 김정일과 조선 노동당 간부들이다. 그 외에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은 중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있다. FAO의 통계에 나타난 숫자만으로도 중국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합계 177만 톤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의 곡물생산량은 연간 약 5억 톤,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 50만 톤이나 100만 톤은 못 낼 이유가 없다.

이상 살펴본 숫자를 보더라도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할 필연성이나 이유가 없다. 가장 능률적인 수송수단을 갖고 있는 곳은 군대이다. 트럭도 휘발유도 최우선적으로 군으로 가게 된다. 군의 최고사령관은 김정일이다. 그에게 인간적 양심이 있다면 좁은 북한에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몇 백만 명이 아사했다는 것은 - 그것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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