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 실제 독립군도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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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북한공산정권수립 이용 목적으로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 박갑동씨, 당시 사건으로 복역한 박달·박금철이 김일성 장군아니라고 증언 일본 육사출신의 보천보 항일투쟁의 주역 실제 김일성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 현 정부의 치적만을 국정교과서에 기술, 역사교과서 검정위원 선정 형평성 문제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돼온 교육부가 이번에는 북한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무장투쟁으로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해 온 보천보 전투를 한국 근 현대사 검정 통과본 역사 교과서에 실어 비판이 일고 있다. 파문의 이유는 보천보라는 말 자체가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상징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주도했고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북한의 인기있는 대표적 대중악단 이름이 바로 보천보경음악단이고 보천보햇불상체육대회와 같은 명칭의 사용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거짓조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실제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연구하다 3년전 타계한 이명영 교수(전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1974년 출간, 신문화사)을 통해 북한의 조작사실을 밝혔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고,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하여 김성주가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87)씨는 “연설에 앞서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77)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치차코프는 여기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역설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70·현 고대 북한학과) 전임강사다. 재일동포로 조총련의 일본내 조선대학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가르친 바 있다. 허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위와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항일투쟁 선전이 조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증언-김허남 金許男 전 함북도민회장 필자는 1920년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허의동 백상촌이란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길림성 명월군 도무거이 촌에서 소학교 교사로 만3년 간 근무하다가 해방되던 1945년에 고향인 허의 소학교로 전임해와 근무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아픔을 준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북간도 일대서 가장 존경받던 독립군 장군이 애숭이 소련군 소좌로 나타나 시민들 어리둥절 30대 애숭이 戰犯者 김일성 독립운동가로 변신 독립군 장군의 허상 일순간 산산이 깨져 “김일성이 아닌데” “입 꽉 다물고 있어” 그 당시 북간도 일대에 산재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사와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삶을 밝히는 것이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내색은 않았지만 대부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돕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기에 독립운동가들의 동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다.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를 10월 14일 10시에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한다는 벽보가 나붙고 선전 삐라가 산골 동네까지 흩날렸다. 나는 만사를 뒤로 미루고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했다. 함경북도에서 평양까지 교통과 숙식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한 것은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내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에 관심을 가졌고 또 갖가지 풍문을 들으면서 자랐다. 특히 김일성 장군에 대한 것은 좀 남달랐다. 소학교 때는 김일성 장군이 백전 백승의 영웅적 인물로 부각되었고 때로는 도술마저 자유자재로 부리는 초능력자로 믿었고 또 흠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독립군 장군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김일성 장군, 김구 선생이었다. 그 당시 내가 4학년을 담임했는데 학생의 학부형 중 한 분이 여자 몸으로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부대가 해체되니 이상하게도 일본군에 투항하여 협조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성동본이면서도 항렬도 같아 누님 아우로 호칭하면서 인간적인 정분과 교분을 쌓고 흉허물 없이 지냈다. 그녀가 김일성 부대의 실체에 관해 속 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거의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김일성 부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게 된 동기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의 오빠가 김일성 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 부대에 오빠의 심부름으로 몇 차례 오고 가다가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 했다. “누님, 김일성 장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봤어.” “연세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아마 60은 조금 넘었을 거야. 그런데 김일성 장군이 어디 한 두 사람이어야지…” 그녀는 내 물음에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나로선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김일성 장군이 또 있단 말입니까?” 환영시민대회의 사회자가 긴장된 쇳소리를 내며 빠른 어조로 말했으나 군중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어정쩡한 박수 속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나로선 김일성 장군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란 사실이 의외였다. 내 학부형의 말로는 60세가 넘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기대했는데 아주 새파란 젊은이가 나와서 내가 김일성이요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 우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세상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백발이 성성한 백전노장을 기대했는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나섰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람은 30대 초반에 165cm가 조금 넘게 보이는 키에 살집이 약간 붙었고 좀 작아 보이는 듯한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지 검게 보였는데 감색 양복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뒷머리를 버쩍 치켜 그 사람은 몸 어느 구석에서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의 티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미리 써 가지고 나온 원고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층 더 실망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나보다 10여세 연장이고 9촌 숙부가 되는 김동철이라는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령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920년생이고 모란봉 운동장에 나타난 김일성은 1913년생이다. 그렇다면 나보다 7살이 더 많은 김일성이 그런 큰 독립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소학교 1학년 땐 7~8세 정도였는데 그 때 당시의 김일성 나이가 14~15세 정도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 과연 독립운동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었던 김일성 장군과는 연령차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내가 그 분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그 분이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나중에 최고재판소 소장까지 지낼 만큼 김일성 일파의 골수분자였기 때문이다. 대답은 짤막했다. “살고 싶으면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쓸데없이 지껄이고 다니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없어져.” 그 분의 강압적인 어조와 중압감을 주는 낯빛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평양시 모란봉 운동장에서 거행된 환영대회 이후아주 앳된 김일성 장군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1945년 10월 14일부터 33세의 애숭이 소련군 소좌가 항일전에서 백전백승한 위대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고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으로 변모한 것이다.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태어난 김일성 장군이 북한 땅을 호령하면서 분단과 동족상잔이란 민족사의 비극을 연출했으며 오늘까지도 한반도 북쪽에서 독립투사 김일성으로 또 북조선 인민의 어버이로 군림하고 있는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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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그래도 다큰 성인을 꾸며댔지만 김정일은 갓태어난 애새끼를 갓다가 항일빨찌산들이 "백두광명성:이요 조선에 또하나의 장수가 났소 했다고 말도 안돼는 거짓말 하는 천하에 미욱한 놈들입니다.
민족의 태양이시며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이라고 생각하는 77치 못한분이
계신것 같아서 안타깝읍니다
김정일은 욕해도 김일성 욕하는건 본기억이 없는거 같은데요..
북에서 오신분들은 김일성에게 흠모의 정이 남아 있나요?
김일성은 존경의 대상인지 궁금하네요..
평생 세뇌된 기억을 지우기는 힘들 겁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는 없는데....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민족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의 화근은 김일성이로 부터 시작된것입니다.
물론 김일성은 독재자였을 망정 인간적인 성품으로 볼때 정이 있고 호인다운데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으로는 서민적 성품의 소유자였을 망정 조국과 역사에 지은죄는 부정할수 없는것입니다.
그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큰 오점이 김정일을 후계로 내세운것일 것입니다.
댓글은 왜 지웠니 븅신아 지대로된 평을 모두 달게끔 해놔야지 못된글은 지워버리고 지뜻대로 달아놓은 댓글은 안지우고 미친새키!!
니가 김일성이 역사를 둔갑했는지 않했는지 어찌 아냐^^
김일성 옆에서 한자리하던 사람들도 둔갑한거니??
한두명도 아니고 몇십명이 항일투쟁하던 로장들이 김일성 옆에서 김일성을 숭배하고 모시던건 왜그랫것냐..
항일투쟁 하지도 않은 사람을 그런 로장들이 모시고 한나라수령을 떠받들었겟지?? 한다하니까 아무 개소리나 막 쳐대고 근거도 없는 판단으로 여론만 시끄럽게 만들고 김일성이 이끌어온(50년)동안 아무소리두 없었는데 니까짓별 하찮은 쉐키가 개소리 너벌대고 다니냐구!! 개미똥구녕 같은 개새야^^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도 나름다 판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살아보지도 못한 쉬키들이 더 지랄이고...근거도 없는소리가지고 선전 그만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