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본 남북한과 고구려,신라,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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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식 ‘실용주의’ 알고 보니 사대주의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이명박 정부 1년 반이 지나가는 즈음 그의 국정 시책의 지표였던 ‘실용주의’가 그 정체를 거의 드러내고 있다. 즉, 그가 말하고 있는 실용주의란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임이 분명해 졌다. 잃어버린 10년을 실용주의로 되찾겠다던 그의 약속은 미국에 ‘퍼 날리기 외교’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가 적용한 실용주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남북 경협을 파산 내지 파탄 지경으로 내 몰고는, 걸핏하면 미국에 전화하고 일본에 전화하고, 전화 하다 안 되면 안달박달 달려가고, 실로 이것이 그의 실용주의 외교 방식이라면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백남주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의 ‘이명박 정부의 대결정책이 부른 한국경제 손실’에 의하면 남북경협이 완전 차단되면 한국 경제가 입을 손실이 무려 7조 4천억 원에 달하고 8천 800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 사업이 중단되면 총 손실이 1조 3600억 원이라고 한다. 금강산 관광중단으로 작년 7월부터 손실이 1000억 달러이다. 여기서 협력 업체의 손실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손실이고 간접적인 손실 역시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외 신인도 추락은 말할 것 없고, 미국이 강요하는 군수 물자를 사들이자면 국방비를 증액해야 하는 데 만약에 남북 화해 협력을 하면 총 181.6억 원을 줄일 수 있다. 중소기업이 입을 손실은 여기서 계산도 안 한 것이다. 여기에 남북 철도를 연결했을 때에 가져올 이익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계산에 누구보다 밝을 이명박 대통령은 왜 이 엄청난 효과를 내는 남북 교류에 그의 실용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인가? 삼척동자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유는 있었다. 그의 실용주의의 적용대상이 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명박 정부는 자꾸 자꾸 정권을 재창출하고 다시는 좌파 빨갱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보수 우익 지지 층을 차돌 같이 단단하게 묶어 놓아야 하고, 그 방법은 북에 강경 대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대주의 외교를 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실용주의는 서민 경제를 위하자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도 남북화해를 하자는 것도 아닌 철저한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이 그 용도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바로 이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실천 과제는 무엇인가. 강희남 목사님의 유언 말씀 “이명박을 내치자”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외교는 어떤 면에서 간단하면 간단하다. 그것은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되고, 민초들이 퍼뜨린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이다. 이 한 구절만 머릿속에 명심하고 실천에 옮기면 그것이 우리 외교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사사건건 그 반대로만 하고 있다. 도대체 그 지독한 사대주의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유명환-이명박 조’와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조가 있었으니 바로 ‘김유신-김춘추 조’다. 유명환-이명박 조는 김유신-김춘추 조와 닮았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가를 해 낸 것이 무슨 큰 공로나 세운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수 더 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성사시킨 것도 자기 실력 때문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이명박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모두 수훈과 전공 감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유명환-이명박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데도 말이다. 지금 이명박과 유명환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은 마치 김부식이 써 놓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과 너무 흡사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사대주의 행각을 유명환-이명박의 그것과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한 번 읽어 보자.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 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 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 파병을 간청한다. 이 사대주의의 DNA가 1,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수시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당은 두 가지 조건을 내 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요동지방을 당에 내 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 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의 신라 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47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 사이에 비밀 협정이 이루어져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분단해서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오늘날 보수우익들의 유전자가 이렇게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반도 분할 통치의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 거론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과 명이 한반도를 분단시켜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기로 한다. 8027인가 하는 작전은 일본이 원산을 점령하고 북에서 중국이 밀려 내려오면 그 중간 지점에서 선을 긋자는 작계라는 끔직한 소리가 부디 낭설이기만을 바란다. 옷을 바꿔 입고 스스로 사대를 청해 참으로 되돌아 볼 때에 이 모든 하나하나의 사건이 모두 오늘 우리 후손들이 짊어지고 있는 수난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당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가 되자 사대주의 외교는 더 극성을 부린다. 법흥왕 이후 115년간 사용돼 오던 연호를 당의 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 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 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 되는 말이고 보면 옷을 바꾼다는 것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 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가? 드디어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의기를 토하고 있다. 진평왕은 원광법사에게 출사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승려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한다. 원효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하며 신라만이 아니라 세 나라가 같이 살아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 유명한 원효의 ‘불난 집의 비유’는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방안에서 어린 아이 셋이 철모르게 놀고 있다면 수레를 사준다고 소리쳐 다 밖으로 나와 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만을 방에 남겨 두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는 불에 타 죽게 하고 말았다는 비유이다. 그렇다. 유명환-이명박은 들어라. 파산당하는 배 안에서 축배의 잔을 드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민족 앞에 대오각성하라. 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 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 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660년 소정방의 10만 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년 9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당은 백제에 웅진 도독부, 고구려에 안동 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대당 10년 항전 끝에 고작 찾은 땅이란 대동강 이남의 것이었다. 그조차도 신라의 영토 영유권이 인정된 것은 60년 후인 736년이었다. 이제 이 한 조각 남은 한반도 한 부분이나마 중국이나 소련이 차지하면 우리 후손들은 다시 1,000년이 지나도 차지하지 못한다. 사대주의는 민족의 존립을 위협 이 얼마나 생각하고 싶지 않고 한 줄의 글로 남기고 싶지도 않은 우리 역사의 처참한 시기인가. 어찌 이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 운운하면서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리 피 속에 만들어진 사대주의 DNA는 지금 온 몸에 퍼져 있다. 전직 국방장관들이 지금 늘어놓고 있는 장광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가 물려준 한국 사대주의 세력의 잔재가 1,50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조금도 수치와 모멸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라 사대주의는 두 이웃 친구를 불사른 데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신라에게 목구멍의 가시와 같았다. 계모에게 전처의 자식은 자기의 정통성을 비웃는 존재일 것이다. 해동성국 발해는 신라로부터 721년 그리고 733년 공격을 당하였으나 의젓하게 물리쳤다. 지금 발해 유적지에 가보면 중국 정부가 1981년부터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한 정부로 격하시킨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 드디어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시작하여 고구려의 역사마저 자기들 것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이 모든 원죄가 어디서부터 비롯하는가? 다름 아닌 신라의 잘못된 통일 때문이다. 결국 사대주의는 우리 한민족을 종자까지 말리고 마는 독소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과연 1,500년 전과 무엇이 다른가? 사대주의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자주권은 한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데 이를 되찾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사대주의 가운데 극치이다. 물론 작전권을 갑자기 되돌려주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지혜롭게 간파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전작권 제발 다시 가져가 달라고 애걸복걸 작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의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2차 방미단 단장 이상득 부의장(이명박 당선자의 친형)은 2007년 9월 20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에 중국에 죽지 않으려고 조공도 바치고 책봉도 받아가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면서 "(미측 인사들이 만나기) 귀찮다고 해도 국익에 필요하면 귀찮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형난제란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김춘추와 김유신이란 처남남매가 당나라에 구걸 외교를 한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한나라 방미단의 한 의원은 "미국과 동맹관계인 나라 가운데 야당이 (당시) 이처럼 미국에 찾아와 외교를 하는 경우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일본이나 호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노무현은 가고 없다. 이렇게 쓸 만한 말 하는 사람들은 비극이라는 유전인자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난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도 그 유전자 때문에 죽었다. 김원웅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당시)은 2007년 10월 24일 "21세기판 모화(慕華)주의자들이 동맹과 예속을 분별하지 못하는 서글픈 사대주의로 나라 망신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원웅 위원장은 "지난날 사대주의에 찌든 지배층이 조선의 안위와 중국의 안위를 분별 못하고 자주적 인식을 결여해 병자호란을 자초했다"며 "자국 국익에 충실한 외국군 장성 등에게 전시작통권을 되받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상득 부의장의 위 '조공 외교' 발언에 대해 "그러면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도 바보짓을 했단 말이냐"며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환영한 이완용도 지하에서 '나도 당시 같은 생각이었다'고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명박은 ‘이명박문’을 자처하고 있는가? 조선 민씨 일가 수구 세력들이 청나라에 통수권을 청하자 일본이 상관하며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만다. 일군(日軍)은 총구를 남에서 북으로 돌려 조정으로 올라와 민비를 시해하고 결국 우리 국군통수권은 모두 일본군에 넘어간다. 그 다음 결과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19십팔년 고종 사망(고종도 일본의 시해라는 것이 정설임). 외세를 끌어들인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민씨 일가와 고종 자신이었다. 고종과 민비는 앞 다투어 외세를 끌어 드렸지만 그들은 결국 그 외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유명환-이명박은 지금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고 있다. 정권만 유지 내지 재창출만 하자. 이것이 구한말 민씨 일가들과 무엇이 하나 다른가? 회고록은 말한다. 국망의 제일 원인이 사대주의이고 사대주의는 청원 외교로부터 시작한다고. 유명환-이명박 조는 들어라. 과연 미국과 일본이 통일을 시켜 준 다음에 그 통일을 우리에게 선물로 안겨 줄 것이라 믿고 이런 언행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한다.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틀림없이 외교는 성공한다. 진정으로 북을 이기고 싶은가? 몸속에 있는 사대주의 유전인자부터 제거 수술해라. 그 전엔 절대로 못 이긴다. 아니 이겨서는 안 된다. 정권은 순간이지만 민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김유신-김춘추 조는 그래도 당나라를 몰아 낼 의지라도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가져다 내 바치고 있는 이명박은 ‘이명박문’을 자처하고 있는가?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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