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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우리 민족의 상관관계
Korea, Republic o 산노루 0 403 2009-09-25 02:03:54
이 글은 역사에 대해 순수 아마추어 수준인 본인이 2004년경 취미 삼아 정리해 본 것으로 그 이후의 연구자료들은 참작되지 않았음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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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역사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면서 주목하게 된 존재들 중 하나가 고인돌이다.

관련 학계의 발표자료 등에 의하면 고인돌은 영국과 프랑스 등 일부 유럽지역과 지중해연안지역,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의 일부 동남아지역 그리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절강성과 요령성지역, 일본의 큐슈북부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져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가 고인돌의 밀집분포지역인 점에서 그 어떤 역사적 추론을 얻어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관심이기도 하다.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역사적 거석물은 약 5만 5천여개가 있고 그 중 고인돌의 수는 약 4만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인 3만여개가 한반도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우에는 잔존 고인돌의 수치가 향후 더욱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현재 수천개의 고인돌이 잔존하고 있는 유럽의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110여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는 일본 등의 선진국들은 재정적 지원 등에 힘입어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연구조사가 활발했던 반면 사회경제적 사정 등으로 역사적 사실 규명에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우에는 고인돌에 대한 연구조사가 그렇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까닭이다.

물론 이러한 추정은 본인의 단편적 시각에 기초한 것이긴 하나 일면의 타당성도 없지 않다고 믿으니 그 근거의 일부로는 현재까지 학계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고인돌들 중 본인이 직접 확인하여 남방식 고인돌로 굳게 믿고 있는 것들만 해도 10여개 이상에 이르는 사실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역사학자가 아닌 극히 아마추어인 본인이 고인돌로 추정하고 있는 그 석물들은 그 모두의 자체 무게가 수톤 혹은 수십톤이고 비교적 수평구조의 뚜껑돌 형식으로 돼 있으며 암석지대와는 전혀 무관한 구릉지대나 비교적 지대가 높은 들녁 등에서 발견한 것들이기도 하다.
특히 그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던 고성읍 율대리고분의 지척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고인돌들이 존재하는 장소의 지표고 또한 그 고분군의 해발높이와 거의 일치하는 상관성을 갖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계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모든 고인돌들은 어떤 식이든 상호간에 직간접적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고인돌들의 축조양식과 부장품 등에 대한 비교연구와 지질학, 해양학, 인류학, 조선학 등등의 관련 학문들에 의한 학문적 고찰이 병행될 경우에는 고인돌을 축조한 그 선조들의 이동양태 등을 추정할 수 있는 획기적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성급한 믿음도 가져본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고인돌은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까지도 그 실체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적지 않은 의문점을 안고 있는 수수께끼의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고인돌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듯 그 대부분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등 선사시대에 생활했던 사람들의 무덤임은 분명하지만 일부의 고인돌은 그곳이 공동의 무덤임을 나타내는 묘표석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또 그것의 일부는 특정 종족이나 집단이 모임을 가지던 장소나 어떤 의식(儀式)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거석숭배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확실시 되는 이 고인돌들의 대부분이 지상이나 지하에 조성된 무덤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 상당수가 해안지역이나 해안과 가까운 지역들에 축조되어 있음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참고로 거석숭배사상에 기초한 거석문화의 주요 재료는 자연석이나 인공적으로 가공한 돌이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이 거석문화의 산물로는 고인돌 외에 마을의 경계석 등으로 사용되었던 선돌(立石)과 매장문화와 관련성을 가진 열석(列石), 돌널무덤(석관묘, 石棺墓) 그리고 돌무지무덤인 적석묘(積石墓) 등을 들 수 있다.

우리가 고인돌로 부르고 있는 존재에 대해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으로 불리우고 있다.

부장품 등을 참작하여 추정된 고인돌들의 축조시기 또한 지역별로 근소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씨족사회의 무덤들로 믿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인돌들은 그 주변에서 타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의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이미 신석기시대에 그 축조가 시작되었으며 대부분의 고인돌들에서 청동제 부장품 등이 출토되고 있는 점을 볼 때 그 대부분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의 고인돌들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죠몽(繩文)문화기 말기와 야요이(彌生)문화기 중기 사이에 축조되었고 서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의 초기 사이에 만들어 졌으며 동남아시아의 그것들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사학자들에 의해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학자들에 따라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선 크게 자생기원설과 남방기원설, 북방기원설 등 3가지 설이 주장되고 있으나 본인은 몇 가지 역사적 정황을 들어 그 중 자생기원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

참고로 현재 사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자생기원설은 고인돌이 우리 민족 고유의 유산이라는 학설로서 이는 한반도에 다른 지역들과 달리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가장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점과 일본과 중국지역 등 주변의 고인돌들에 비해 그 축조시기가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사실에 기초한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학설은 고인돌이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할 뿐 우리 민족에 의해 독자적으로 발생한 문화임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소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인돌의 분포지역을 중심으로 단군신화의 포괄적 해석과 쿠로시오해류 등 한반도 주변해역의 해류, 유럽의 훈족과 인도의 석가족 등이 한민족계라는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유력한 역사학자들의 주장들 그리고 가림토문자에 대한 연구실적 등등을 통해 고인돌은 적어도 우리 민족 일부의 고유한 유산일 가능성은 높다고 추정한다.

고인돌이 우리 민족 고유의 습속 중 하나였다는 추정적 근거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먼저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들 중 몇 가지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 여기에 옮겨 본다.

본인은 여러 역사적 정황 등을 참작하고 그 개념을 보다 구체화할 경우 우리 민족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단일 민족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단일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흔히 우리 민족은 오래 전 중국대륙 북방에 터전을 잡고 있었던 예족과 맥족 이외에 한때 만주지역 일대에 분포하다 세력팽창의 여세에 휘말려 한반도에 정착한 한(韓)족으로 구성된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의 경우에는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었던 초기 정착민들의 존재를 누락한 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중국대륙의 남단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던 구석기시대인 지금으로부터 약 70만년 전 한반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 인류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닌 그 전전단계의 초기 직립보행인인 호모 에렉투스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일 개연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홍적세와 충적세를 거치는 동안 있었던 침하와 융기 등 지각변동의 영향으로 중국대륙의 남단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가 현재의 모양처럼 각각 분화된 후인 중석기시대인 서기전 5천년경부터 한반도 남단에 정착했던 주민들은 우리 민족의 직계 선조들 중 한 갈래일 개연성이 농후해 보이므로 그들의 실체규명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일본열도의 초기 정착인들로 주장되고 있는 죠몽문화인들 보다 앞선 시기부터 한반도 남단에 정착하며 후에 죠몽문화인들과 해상으로 교류한 역력한 흔적들을 남기고도 있는 그 정착인들은 바로 부산시 영도구의 동삼동패총과 조도패총, 김해의 수가리패총 그리고 통영군의 욕지도패총과 연대도패총 등을 남긴 인물들이다.
남방계 고유의 산물인 패총이 당시 정착민들의 주거흔적이자 독특한 묘제인 점에서 이들 패총을 남긴 인류는 남방계일 개연성이 높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동안 한민족이 북방계인 대계보 몽고계에서 갈라져 나온 퉁구스계의 단일민족으로 꾸준히 주장되어온 점에 비추어 작은 충격일 수도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존 한민족의 소수 일파가 남방계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료들은 패총문화 이외에도 적지 않다.

남방계가 한반도 남단에 진출할 수 있었을 개연성은 우선 환경적 측면에서의 쿠로시오해류를 들 수 있다.
쿠로시오해류는 한반도로 남풍이 불어오는 봄부터 여름 사이에 필리핀의 북부해상에서 발원하여 한반도 주변해역으로 빠르게 북동진하는 해류로서 실험적으로 이 해류에 종이배를 띄울 경우 그것은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한반도의 남단해역과 중국대륙의 동남단해역, 일본열도의 서북단해역에 도달하게 될 것인 바 동남아지역의 남방계 인류가 뗏목을 이용했을 경우에는 자연력만으로도 신석기시대의 패총들이 있는 한반도의 남단 등으로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또 하나의 추정적 근거는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의학계의 논문이 될 수도 있다.
그 논문은 수년 전부터 표본조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혈통을 유전학적으로 조사해 온 어느 의학자가 발표한 것으로 우리 국민들의 15-20%는 남방계라는 결론을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역사에 흔하게 등장하는 난생설화(卵生說話)들과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탄화미 등의 볍씨에서 엿보이는 남북방계의 접목 그리고 삼한시대 당시의 진한주민 일부가 몸에 문신을 하고 있었다는 3세기 이전의 역사적 기록들 또한 한민족 속에 남방계가 있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남방계가 얼굴 등 몸에 문신을 하였던 것은 잠수시에 상어 등 큰 물고기로부터의 위해를 예방하기 위해 예로부터 지금까지 즐겨 행해지는 습속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 민족의 주류는 부여와 고조선, 고구려, 옥저, 동예를 건국한 예맥족과 마한, 변한, 진한 등의 삼한 및 신라와 백제의 주류 민중이었을 한(韓)족으로 구성된다고 봄에 이의는 없으나 서기 3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단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왜(倭)족 또한 우리 민족의 한 갈래로 봄은 어떠할까? 그 근거가 될 수도 있을 왜세력의 이동경로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정적 자료들은 차후에 제시하기로 한다.

또한 현재 우랄알타이계의 단일 언어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 언어의 경우에도 역사적 기록들을 참작할 경우 위의 국가별 민족구성과 유사하게 역사기록상 지역적으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는 신라의 김춘추 - 후에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을 이뤄낸 태종무열왕 - 가 통역관을 대동한 사실적 묘사는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상류층들이 사용하는 상용언어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진한과 변한의 언어가 비슷하기는 하나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만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우리 민족의 언어들 중 통일된 최초의 것은 삼국통일이 계기가 된 신라어임이 분명하며 이후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후에는 그 신라어에 옛 고구려어가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 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삼한계의 진한어가 발전된 그 신라어와 부여계 언어인 고구려계 언어가 통일된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여러 역사서에 나타나는 왜국의 경우에는 사신 등 한반도인들을 맞음에 있어 통역관이 참석치 않고 있음은 당시의 왜가 우리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하기도 한다.

현존 고인돌들의 분포지역이 주로 해안과 인접한 지역들이며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가 유포되었던 지역과 그 위치가 일치한다는 점, 남방계문화인 거석문화라는 점 등등에서 남방문화와의 연관성을 가지나 중국대륙의 경우 그 동해안 지역들 중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이 한반도 남단과 해류로 연결되는 절강성뿐이고 그나마 그 수가 40여개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열도의 경우에도 그 분포지역이 한반도와 해류상 직결되는 북큐슈지역에 한정되며 그 수효 또한 1,100여개에 지나지 않는 점 등등을 감안할 때 고인돌을 남방계 고유의 묘제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일부 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므로 중국 요녕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발전된 묘제라고 보고 있다.
돌널무덤의 뚜껑돌이 대형화되면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 되고,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면 북방식 고인돌이 된다는 식의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고인돌의 형태면에서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뿐 현재 중국대륙의 북부지역과 시베리아 등 북방지역에 잔존 고인돌이 분포하지 않고 있는 점에서는 수긍되기 어렵다.
또 이런 점들은 고인돌이 북방계만의 산물이 아니라는 방증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역사서들에 남겨진 기록을 참고할 경우 수나라 당시 중국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배는 절강성해안에서 출발한 후 나주지역 인근의 백제와 현재 통영군 근처의 죽도(竹島), 대마도, 이키섬 등을 차례대로 경유하여 북큐슈지역의 항구에 도착하고 있는 바 한반도 주변 해류의 흐름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 이 해로(海路)는 그로부터 훨씬 오래 전부터 이용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더우기 여기에 등장하는 중국대륙의 절강성지역과 일본열도의 북큐슈지역에 제한적으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과 중국대륙의 여러 곳들 중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할 경우 한반도 남단과 해상왕래가 가장 쉬운 지역이 바로 절강성지역이며 실제 역사적으로도 왕래가 빈번했던 점 등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한 일본 북큐슈지역과 한반도남단의 유구한 역사적 상관성은 오히려 너무 많아 열거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이다.
그곳의 항구명인 '가라쓰'는 바로 가야인들의 항구라는 의미이며 그 항구를 내려다 보는 산의 이름 또한 가야산임은 그 작은 예에 불과하다.
중국 역사서를 참고할 경우 3세기경 중국배가 닿던 북큐슈의 항구가 에 속했다는 기록 또한 예사롭지 않다.
는 소가야의 초대왕 이름이며 역사적으로 특정 인물의 이름이 지명이나 국명으로 사용된 예 또한 비교적 흔한 까닭이다.

기원 전 3세기경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존재했던 일본 야요이문화의 최초 발상지로 공인되고 있는 곳이 그곳 북부 큐슈지역인 점과 야요이문화인들의 인골에 대해 심층적 연구를 진행해 온 일본의 인류학자들이 그 인골들의 주인이 한반도남단에서 도래한 인물들임을 밝힌 점도 의미롭다.

수년전에 행해진 해류의 실험에서도 과거의 소가야지역인 통영 인근에서 출발한 뗏목이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그곳 북큐슈연안에 정확하게 도착한 바 있었었다.

국내에서 독특한 묘제양식을 보이고 있는 나주의 반남고분군이 왜문화의 선조격이며 죽도 인근인 삼천포의 늑도에서 기원 전 1세기경 야요이토기를 생산한 장소가 발굴된 점 또한 두 지역이 해류상으로 연결된 점과 함께 고인돌의 실체규명 및 왜의 한반도남단위치설의 방증적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보고 이전에도 황해의 해상지배권을 한민족이 장악하고 있었을 개연성, 중국대륙 동남단과 일본열도의 해안지방 그리고 한반도남단지역의 지명, 습속, 언어 등에서 엿보이는 동질성 등도 우연적인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상기의 여러 역사적 정황들을 고려할 때 고인돌은 남방문화적 요소와 북방문화적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묘제로서 그것의 집중적 분포지역이 한반도이고 우리나라에 있는 고인돌의 형식도 북쪽의 북방식과 남쪽 중심의 남방식이 많은 바 고인돌은 우리 민족의 일파가 남방과 북방의 문화를 융합하여 만들어 낸 독자적인 묘제문화라고 해도 그것이 결코 무리한 주장은 아닐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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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샌드맨 2009-09-25 10:58:31
    산노루님/

    산노루님 덕분에 좋은 글을 흥미있게 잘 봤습니다.
    산노루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의 폭은 아주 넓군요. 선사시대부터 거슬러올라가다니...
    특히 고인돌에 대한 지식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 중간에 언급하셨지만,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적 연관성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고고학적 유물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귀찮을 정도지요. 이는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백제의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인지라, 저도 관련 자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가만 보면, 고대 일본 열도는 한반도인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왜 일본이 자신들의 역사, 특히 고대사를 왜곡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한일합방 후 우리 역사에 손댈 수 밖에 없었는 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그러고 보면, 저들도 원치 않는 일종의 '원죄'를 안고 가는 것 같아 한편 안쓰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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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노루 2009-09-25 14:35:39
    상당히 지루하였을 것임에도 제법 긴 글을 다 읽어주신 점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일본의 경우 국민들에 대한 DNA검사 결과도 우리와 비슷하게 북방계가 절대 다수이고 남방계는 약 15-20%인 것으로 압니다. 대표적 남방계 얼굴인 안토니오 이노끼같은 폴리네시아계와 거의 멸종 단계인 토속민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어차피 한반도를 거쳐간 도래인들의 후예로 봐도 좋겠지요.

    백제계와 가야계로 구성되었다는 일본 왕계 외에도 삼국시대 당시엔 상부 지배계층 또한 한반도 삼국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엔 일본이란 이름조차 그 방향에서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본 우리 민족이 먼저 지어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고 봅니다.
    현재 부산의 영도구 동삼동 등에서는 아주 맑은 날이면 먼 수평선 끝으로 길게 뻗어누운 대마도를 볼 수 있으며, 그곳 동삼동 패총에서는 고대의 한일간 교류의 증거인 흑요석이 출토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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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샌드맨 2009-09-25 16:40:35
    산노루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너무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홍산문화 등 고대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줏어 들은 것은 좀 있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한반도나 삼한지방 등의 고대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산노루님께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대마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잘 아시다시피 문헌 등의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학문 중 하나가 지명학이잖습니까.

    저는 물론 주 관심사가 비류백제이니, 당연히 지명학도 비류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다물계 지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마도 역시 대표적인 다물계 지명이지요. 역시 일본서기에 '대물주신'이란 일컬어지는 효안천황 역시 같은 맥락이라 보면 옳을 겁니다.

    또한, 좀 더 노골적인 역사적 증거들도 많죠.
    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역시 일본서기에 언급된 제 30대 비타쓰(敏達)천황에 대한 이야기일 겁니다.
    '백제강' 옆의 '백제대정'이란 지역에 '백제궁'과 '백제사'를 지었고, 그곳에서 서거했죠. 물론 서거 후에는 '백제대빈'이라는 백제왕실의 장례절차인 3년상을 치렀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백제강'이란 지명은 존재하고, 그 인근에서'백제사'의 터도 발견했더군요.
    물론, 이런 큰 일을 한 비타쓰천황 역시 말할 것도 없이 백제계 사람이고요. 이는 일본왕실족보인 '신찬성씨록(815)'에도 기록되어 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연구하고 발굴하면 할수록 곤란해질 수 밖에요. 차라리 쿨~하게 인정하면 맘이라도 편할텐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천황을 반인반신의 존재로 추앙하고 일본의 상징이자 중심처럼 만들어 놓았으니, 그런 천황이 한반도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람들도 참 딱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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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노루 2009-09-26 02:37:27
    일제의 가장 큰 피해가 어쩌면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식민사관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예에서 보듯이 족보 등을 통한 조상들에 대한 연구가 우리 자신들의 뿌리를 알아가는 작업이듯 올바른 역사를 알기 위한 노력이 폄하되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지요.

    학창시절 교실에서 배웠던 국사 교과서 내용과는 엄청나게 다른 참 우리네 역사들의 편린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신선함에 비해 대륙백제 등 원삼국의 중국위치설 등이 냉소 속에 부정되고 있는 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역사의 거대한 뿌리일 홍산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실증적 사료 등에도 불구하고 신화시 되고 있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만이라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초중등학교의 역사교재에 반영되었음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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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님 2009-09-25 15:39:58
    산노루님// 글 잘 보았습니다.

    역사관에 깊은 조예를 가짐에 많이 놀랐습니다.
    역시 저는 도달하지 못할 경지일 것 같습니다.
    두 번을 고쳐 보아도 이해를 잘 못하겠고...
    저는 아직 너무 멀었나 봅니다.
    정말 멋쟁이십니다.

    샌드맨님은 다 이해하시는데... 역시 멋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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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샌드맨 2009-09-25 16:52:35
    봄님/

    저도 다 이해해서 보는 건 아닙니다. 뱁새가 황새 쫒아가느라 헐떡이는 것처럼, 짧은 지식으로 근근히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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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노루 2009-09-26 02:41:44
    ^^*아이고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누구나 가능한 글이었기에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우리네 생활과는 조금 떨어진 주제임에도 탓하지 않으시고 좋게 봐주신 점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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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둘기야 2009-09-25 17:28:40
    산노루님께서 바쁘신 시간 쪼개어가셔서 올려주신 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교육...지극히 당연하고도
    절실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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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노루 2009-09-26 02:47:32
    그 무슨 글을 적는다 하여도 실생활에서의 마음가짐과 솔선수범의 경험을 통한 행복전도사님의 진솔한 글들에 비할까요?
    하루하루를 지날 때마다 조석의 기온 더욱 차가워지는 환절깁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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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와군 2009-09-27 03:45:18
    님의 의견과 같이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우리 민족의 북방기원설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는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드러나는 우리가 몽골등 북방족보다는 서일본이나 동/북중국인과 더 가깝다는 유전적 연구결과가 발표되는 것도 그렇고, 동양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람스테드가 잘못 엮어놓은 알타이권에 대한 환상을 깨지 못하는데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한국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는 엉뚱하게도 남인도의 고대 타밀어와 가장 비슷하고(이건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가야신화에도 기록), 오히려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발음하기 어렵게 느끼는 언어는 우리가 그토록 유사하다고 믿는 몽골어와 터키계통의 언어랍니다.

    말씀하셨다시피 현대한국어는 고대신라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역사문헌을 살펴보아도 백제-신라-일본간에 통역을 사용한 예가 없습니다.
    그러다 5세기쯤 일본의 습속이 변해 단어를 알아 듣지 못하는게 많다는 기록이 나오고, 8세기에 일본과 말이 완전 안통해 통역을 써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민족이 북방에서 많이 왔다는 것은 사실이고, 일본의 주류를 구성하는 야요이인이 한반도 남부를 통해 많이 건너간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남부의 원주민이 북방인 보다 늦고, 일본 역시 원주민들이었던 죠몽인이 야요이인 뒤에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과학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현대 대한민국의 국경선과 정치문화언어적 동일성을 기준으로 어디까지 우리 민족이었고 어디는 아니다라는 것은 민족의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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