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탈북자들의 토굴생활 경험담
김철호 3 426 2005-07-26 08:08:53
탈북자들의 토굴생활 경험담
[RFA 2005-06-28] | 2005·06·29 11:37 | HIT : 673 |

▲ 중국 길림성 왕청현 마반산 서남쪽에 위치한 50대 탈북자의 토굴 입구, 탈북자들은 보통 이런 토굴을 파고 길면 7년 이상씩 생활한다. 이들은 현재 10만 명이상의 탈북자이 중국에 있다고 증언했다 (RFA/김명철)



중국 길림성 복흥향 연풍촌 독골산에서 2년동안 토굴 생활을 했던 30대 후반의 남한입국 탈북자 성경일, 주명희 부부는 현재 한국 대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토굴 생활을 하시게 된 겁니까?

모르는 마을에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둘이 가서 우리가 북한에서 왔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살게만 해달라고 했었죠. 그러니까 조선족이 마침 공산당 서기였는데 밭은 있는데 자기는 일하고 하니까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또 장인 장모와 살았는데 장인은 풍을 맞아서 똥, 오줌을 받아내야 했어요. 장모는 허리가 꼬부라져서 운신을 잘못하고 그런 노인들을 돌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내: 자기 자신도 더러워서 손을 못대는 것을 수염을 깍아주고... 사람이 오래 누워 있으니까 비닐이 일어나더라고요.

남편: 비듬이 고깃비늘처럼 두껍더라고요. 3년을 간병을 해줬습니다.

마을생활을 잘하신 것 같은데 왜 산으로 간거죠?

지내보니까 탈북자들이 살자고 들어 온 사람은 진심으로 일을 잘하는구나 해서 우리를 보고 서로 동네 사람들이 탈북자를 받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이 여럿이 됐어요. 탈북자가 많아지게 되니까 검사가 자주 왔어요.

그 사람들은 남자들이었는데 독신이어서 달아나면 되지만 저는 아내가 있어서 ... 불안해서 안되겠더라고요. 마을에서는 9시만 되면 불을 꺼야 되고 자물쇠도 바깥에서 채우고 자고 그랬는데 산에 들어가니까 마음은 편하더라고요.

토굴에서 살았던 정확한 위치가 어딥니까?

안도현 명월진 복흥향 연풍촌이죠. 그런데 지금은 주소가 복흥향까지 명월진으로 속했다는 것 같습니다.

결국 산으로 가게 됐는데 토굴의 위치 선택은 어떻게 하고 했는지 그 과정을 설명을 해주시죠?

물을 따라 갔습니다. 골짜기 물 흐르는 것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까 땅에서 물이 나오더라고요. 산이 생겨서 사람손이 안간 그런 곳이었는데 그 주변을 파고, 사람이 먹을 수 있게 감탕물을 걷어내고, 돌을 깔아서 물이 고이게 해서 받았죠. 물이 나오니까 그 곳에 집을 짓은 거죠. 느릅나무를 의지해서 집을 지었죠.

지금 집이라고 하지만 사실 땅을 파고 산 토굴이지 아닙니까 어떻게 지었습니까?

아내: 둘이 지금 여기 앉아서 집 지은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 그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나무를 잘라서 톱질을 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남의 밥 먹으면서 배도 안차고 그러나 오직 사람이 머리에서는 살아야 된다. 아니면 죽는다. 이 두 가지 길을 놓고 악을 가지고 오직 살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둘이서 힘들게 지치고 나무를 쌓아서 날라서 짓느라고..

남편: 주변의 나무를 못 베거든요. 주변의 나무를 베면 금방 들통이 나요. 한 60미터 후방의 나무를 하나씩 베서 가져와야 되요. 나무 밑둥부터 중간까지만 사용을 하지 나무 끄트머리 쪽은 못쓰잖아요. 그래서 나무 한 30대 정도는 있어야 하죠.

얼마나 두꺼운 나무를 쓰신 겁니까?

저 혼자서 다룰 수 있는 그런 나무죠. 산 아래서 메고 위로 올려야 하니까 그러니까 직경이 15-2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나무죠.

그 집은 내부 구조는 어떤 식입니까?

앞에서 보면 문 앞이 좁은데, 집에 들어가면 바로 3미터 정도는 들어가자마자 가마를 걸고 중앙에는 복도를 냈어요. 복도를 내고, 우측에는 양식 창고를 만들었어요. 식량으로 감자, 배추, 된장, 간장, 쌀 등 양식 창고를 넣고, 그 다음에 윗방으로 올라가면 넓어요. 직경이 한 2미터 50정도씩 되게 만들었어요.

집 천장까지의 높이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요. 느릅나무 중심으로 집을 삼각으로 지었으니까 중앙은 좀 높아요. 사람이 허릴 굽혀서 옷을 입을 수는 있어요. 1미터 50정도는 되고, 양쪽 끝은 1미터 10밖에는 안돼요. 끝에 앉은 사람은 허릴 좀 구부리고 되고, 가운데 앉은 사람은 허릴 펴고 앉죠.

느릅나무 뿌리 밑을 파고 토굴을 짓은 겁니까?

나무뿌리에서 옆으로 해서 직선으로 땅을 팠습니다. 뿌리 좀 지나와서 땅을 파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약간 경사면에 집을 지어서 마당을 냈군요?

네, 집안에서 판 흙을 경사면 마당에 덮었죠. 경사가진 면에 턱을 내서 만들어서 옆에서 봐도 집이 안보여요. 길 앞에는 이깔 나무를 심었어요. 그래서 집이 안보이죠.

그런 위장하는 방법을 어떻게 다 아십니까?

북한에서 갱도를 파는 식으로 한 것이거든요. 문에서부터 옆으로 1미터씩 담을 쌓았거든요. 잔디로 담을 쌓았거든요. 지붕에도 잔디를 심었죠. 여름에는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에는 눈에 덥히고.

북한에서 갱도를 파보셨습니까?

예, 반공호, 갱도 훈련을 다해봤거든요.

느릅나무 아래쪽으로는 어느 정도나 땅을 팠나요?

3월19일 갔는데, 그 때는 땅이 얼었으니까 많이 못 파고 온돌을 놨어요. 그런데 온돌도 한곳으로 밖에는 못 놨어요. 산에 돌이 귀해서 막돌로 했죠. 북한에서 살림집건설 전문 했으니까요.

구들 한곳으로 가마도 걸어 놓고.. 연기는 그곳으로 빠지고요?

네, 지금 말하니까 쉬운 것 같아도 처음에는 그 곳에 가서 중국돈 백원, 한국돈으로 만이천원 밖에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추운데 풀밭에서 2-3일을 밖에서 잤습니다.

눈가루도 날리는 데.. 북한 사람이 내일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지 사는 순간이 나마 편안하게 있자, 때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꼭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기도 소릴 듣고 계실 것이다.

중국돈 백원으로 뭘 하셨습니까?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나머지로 돈으로 바닥 깔게를 사고, 소금사고 또 농장에서 자기네 씨앗을 심고 나머지 버리는 것으로 토굴 앞마당 밭에 뿌려 놓고... 집을 짓고 나니까 집 앞마당 잔디를 모두 떠서 담도 만들고, 지붕에도 덮고 해서 앞마당이 밭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농사를 했어요.

집 세간살이 중에 덥고 자는 것은 없었습니까?

우리는 항상 길을 다니면서 이불을 가지고 다닌단 말입니다. 남의 집에 가도 북한 사람이라고 더럽다고 이불을 안주니까... 토굴이라서 습기 때문에 온돌을 놨죠, 불을 안 뗄 때는 습기가 올라오거든요. 그래서 장판을 몇 겹으로 깔았죠.

또 겨울을 나자니까 부식물이 있어야 하니까 이때는 밖에 나가서 산나물 뜯어서 말려서 소나무에 걸어놓고, 버섯이 날때는 버섯을 뜯어서 건사하고 ...마을에 내려가 그것들을 좀 주면 그분들이 불쌍하다면서 김치도 좀 주고. 제일 먹고 싶은 것이 김치더라고요. 감자 심은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철이 아니지만 파내서 끓여 먹고... 고기 같은 것은 못 먹고요?

고기는 먹어보지 못하죠. 사냥도 불법이고... 마을에 내려가서 삭일을 해줘야 해요. 김 메고 농사일 해주고 그 돈으로 신도 사신고, 옷도 사고 된장, 간장, 소금도 사고 콩도 사서 장도 담가먹고.

완전한 산 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민간에 가서 일도 하고 하지만 공안들의 단속을 피해서 보금자리를 산에다 마련한 것이군요?

네, 일하는 날 빼고는 산에서 살았죠. 일하는 것도 한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그때만 왔다 갔다 하고, 일주일 일하고 나면 대충 쌀 100KG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4개월은 먹죠. 쌀만 먹으니까요.

남편 건강 때문에 음식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먹는 것은 어떻게 준비를 했나요?

산에서의 음식이란 것이 그저 된장에 감자 썰어 넣고 먹고 살았죠. 잡히지 않으면 행복이니까 그저 인생 가는데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우리 행복이었죠.

1시간 거리였지만 마을 사람들의 내왕이 전혀 없는 산골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병이 없이 살 수가 있었는지요?

이 사람이 치질하고 관절이 심했어요. 자본주의 사람은 그런 곳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오직 살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사람이란 것이 회장이요, 국회의원이요, 대통령이요 해도 말로는 일단 누가 죽어라 하면 다 눈물 흘릴 겁니다. 그냥 우린 참고 버틴 거죠.

치질은 청결이 중요한데 산 어떻게 해결했나요?

가마를 걸었잖아요. 더운물 끓여서 목욕을 자주 하고요. 우린 겨울에도 매일 목욕을 했어요. 그때의 후유증으로 남한에 와서 항문 수술도 하고 그랬죠. 이제 와서 보니까 대단히 심했더라고요. 아파도 솔직히 아프다고 말하면 가슴이 안 좋잖아요. 그리고 아픈 것은 다른 일들 때문에 뒷전 이예요.

이진서기자(RFA)


2005년 6월 29일
데일리 차이나 - http://dailychina.net
(blog.naver.com/dailycn)

조선족 북조선 사람들의 량심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모두 굶어 죽는다해서 북조선에서 도망해온 사람을 자기집에 데려다 밥도 주고 옷도 주니 북조선사람들은 그 집물건을 훔치거나 심지어 사람까지 죽이고 도망하는 일이 한두번 아니였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오히려그집 물건을 훔치거나 그집주인을 죽이고 얼마 안되는 돈을 가지고 도망하는 이런사람을 우리 조선족들이 어떻게 자기집에 둘수있습니까?
05·06·29 20:19 삭제



사람나름이죵 북조선 사람들은 잘해줘도 은혜갚기는 커녕
항상 머 도적질 하궁.
05·07·20 15:58 삭제
좋아하는 회원 : 3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통일문제협의회 <평화위한 한반도정책 구상>
다음글
한국 최초의 동북아 전문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