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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이 사실인가요?? 북한의 아사자 문제?
Korea, Republic o 흠냐 0 417 2009-11-29 22:09:56
출처는 자유북한방송입니다. 무단 게재 사과드립니다.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수령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들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많은 탈북자가 하는 이야기다. 어느 탈북자도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의 생전에는 고생스러워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식량난이 심하게 되면 될수록 수령님이 그리워집니다. 수령님이라면 어떠한 손을 써서라도 국민을 굶어죽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민족의 희망을 구해서」한국 정토출판, 1990 p124) 북한 민중은 본능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구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원인은 김일성에게 있는 것이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도 김일성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식 김정일의 행위가 악마가 태어난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잔혹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수십만 명의 적대계층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죽게 하였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게 하였다. 엄청난 정적을 죽였다. 공개총살도 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공개총살 방법은 월등하게 잔학했다고 많은 탈북자들은 말하고 있다. 일부러 뇌수가 튕겨 나오게 쏜다. 김일성이가 살아 있었다면 아사 살인이라는 수법으로 300만 명이나 되는 인민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사를 제일 싫어한 것이 김일성이었다.

김정일은 홍수와 한발 등 계속된 자연재해 때문에 수확이 감소된 것을 기아의 이유로 하고 있지만 현실로 그 모두가 허위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나치오스 씨의 견해를 소개한다. 다음의 표가 있다. 가축의 사료를 제외한 북한 전 인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은 1년에 380만 톤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부족식량은 1995년부터 1996년은 3만 톤이 조금 안 된다. 1996년부터 1997년에는 47만 톤, 1997년부터1998년에는 29만 톤, 즉 지원식량이 전 인구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면, 사람들은 제각기의 대응책에 의해서 기아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나치오스 씨는 분한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부의 배급정지조치에 의해서 가장 극심하게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깊게 식량지원을 집중하였더라면 수백만 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을지라도 수십만 명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묘하게 짜여진 지원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굶주린 사람들인가, 누가 빠졌는가, 누가 아사 직전인가를 구분하기가, 북한에 있어서는 지원활동 당초부터 크게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테이터는 오랫동안 축적한 기아지원방법의 처방전을 가진 우리들에게 바로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 어느 것 하나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원식량계획은 기아가 정점에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의 식량 수송선이 도착한 것은 아사가 끝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인도지원기관은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 원조를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대체 누가 그런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북한 기아의 진실」p291-292)

(표1) 국내곡물생산량,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

1995-96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903,374
국내곡물 생산량 4,100,000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870,000
(1)+(2) 3,773,374
부족한 식량 26,626

1996-97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1,171,665
국내곡물 생산량 2,840,000 원주2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160,000
(1)+(2) 3,331,665
부족한 식량 468,335

1997-98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1,321,528 원주1
국내곡물 생산량 2,660,000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190,000
(1)+(2) 3,511,528
부족한 식량 288,472

1998-99년 지원식량과 상업수입의 합계(1)
국내곡물 생산량 3,480,000 원주3
손실30% 공제한 국내곡물 생산량(2) 2,960,000
(1)+(2)
부족한 식량

1. 모든 통계숫자는 매년 FAO/WFP의 수확고 평가
2. 이 숫자는 옥수수 재배의 50%를 공제한 것. 이 50%는 수확기전에 소비되거나 농촌 등에서 장래의 기근에 대비하여 조기 수확하여 1996-1997년 소비분으로써 수확되지 못함
3. 「FAO/WFP,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확고와 식량공급평가조사단. 특별보고서 「(유엔세계식량계획 98년 11월)에 의거해서 (하기와라 주, 나치오스 씨의 일본어역》북조선 기아의 진실 「(p288)의 표를 기초로 하고 구성하다. 손실 30%라는 것은 손모, 부패, 쥐로 인한 피해 등에 의한 감소, 대략의 숫자임) 한국 통일부의 자료 (표2)를 보기로 하자.

(표2) 최소 380만 톤이면 아사는 없다. 곡물의 연간 생산량은 얼마나?

1992년 443만 톤, 1993년 427만 톤, 1994년 388만 톤, 1995년 413만 톤,
1996년 345만 톤, 1997년 369만 톤, 1998년 349만 톤, 1999년, 389만 톤,
2000년 422만 톤, 2001년 359만 톤. (숫자는 한국 통일부의 자료)

북한인민이 1년간 꼭 필요한 최저 식량은 380만 톤이라고 나치오스 씨는 말하고 있다. 한국 통일부의 자료에 의하면 380만 톤을 밀도는 해는 1996년, 1997년, 1998년, 2001년이었다. 부족량은 11만 톤에서 35만 톤이었다. 이 정도의 부족이라면 국제원조 식량으로 충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국제지원이 본격화된 1995년을 시작으로 적은 해는 50만 톤, 많은 해는 154만 톤의 식량이 지원되었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표3)이다. 이것을 주민에게 제대로 배급했다고 하면 아사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는 나의 가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표3) 지원식량은 상당량 들어왔다. 아사자는 안 나와도 되었다.
1994년 7만 5,000톤, 1995년 73만 4,207톤, 1996년 50만 5,780톤,
1997년 83만 1,198톤, 1998년 103만 6,390톤, 1999년 89만 4,749톤,
2000년 154만 2,440톤, 2001년 106만 9,860톤, 2002년 97만 5,062톤
(숫자는 FAO의 Data Base에 의함)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나치오스 씨나 한국의 통일부가 근거로 하고 있는 숫자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북한의 매년 곡물생산량은 200만 톤 정도가 아닌가. 백보를 양보하여 이 의견을 긍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의 숫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표4)를 보시기 바람.

(표4) 북한은 식량을 상당량수입하고 있다. 그 정도의 여력은 있었다
1990년 121만 4,478톤 (1억 9,000만 불)
1991년 326만 8,464톤 (3억 9,804만 불)
1992년 259만 7,129톤 (4억 9,142만 불)
1993년 334만 360톤 (5억1,468만 불)
1994년 119만 7,390톤 (1억 5,893만 불)
1995년 253만 3,560톤 (6억 8,558만 불)
1996년 242만 606톤 (5억 9,427만 불)
1997년 308만 8,681톤 (7억 726만 불)
1998년 342만 9,964톤 (6억 9,268만 불)
1999년 261만 5,678톤 (5억 2,589만 불)
2000년 543만 2,262톤 (6억 6,058만 불) (숫자는 FAO의 Data Base에 의함)

이 표는 FAO (국제식량농업기구) 의 숫자이다. 북한이 각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식량의 양과 금액이다. 수입이 적은 해는 120만 톤, 많은 해는 500여만 톤여, 금액으로 하면 7억불을 수입하고 있다. 북한이 숨기지도 날조하지도 못할 유엔의 자료이다. 식량수입에 필요한 이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7년의 수입량은 약 300만 톤인데 금액이 7억불로 불게된 것은, 이 해에는 가격이 비싼 쌀과 정백미를 64만 톤이나 매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 2억 1,000만 불이 소요되었다. 아마 이 특질의 쌀은 특권층에 배급하기 위해서 구입했을 것이다. 1997년은 아사자가 200만 명이나 생긴 해이다. 당 간부 등은 아사자의 참상은 돌보지도 않고 자기들만 사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치의 경향은 국제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95년부터 시작되고 있다. 쌀과 정백미 수입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40만 톤, 1994년에는 12만 톤으로 좀 사가 하는 것 같았으나 1995년에는 117만 톤으로 뛰어 올랐다.

1996년 68만 톤, 1997년 64만 톤, 1998년 120만 톤, 2000년에는 160만 톤으로 급증하고 있다. 원조로 살이 찌고 있는 특권층은 백미로 생활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노동신문에서 말한 제국주의 나라들의 봉쇄정책에 의해서 식량을 살 수 없다고 한 선전이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이 통계숫자는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잉여식량을 바다에 버리면서 북한에는 한 톨의 쌀도 주지 말라고 했다며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 1년에 500만 톤 이상을 외국에서 사들여 오고 있지 않는가! 가격도 FAO의 숫자를 보면 타당한 국제가격이었다.

외국이 북한에 식량을 팔 때는 가격을 높이 올려서 사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었으나 이것 또한 거짓이었다. 이미 말했지만 100만 톤의 곡물이 있으면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인 1일 400g 배급했을 때 1년에는 146kg, 680만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다. 97년에는 300만 톤 정도 수입하고 있으므로 국내생산이 제로라 하더라도 2,040만 명 결국 북한 전 인구를 거의 1년간 부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사자가 발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도대체 그 많은 식량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특권계층의 축재와 장마당 (암시장)으로 부정 유출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가장 악질적인 반인민적 존재가 김정일과 조선 노동당 간부들이다. 그 외에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은 중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있다. FAO의 통계에 나타난 숫자만으로도 중국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합계 177만 톤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의 곡물생산량은 연간 약 5억 톤,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 50만 톤이나 100만 톤은 못 낼 이유가 없다.

이상 살펴본 숫자를 보더라도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할 필연성이나 이유가 없다. 가장 능률적인 수송수단을 갖고 있는 곳은 군대이다. 트럭도 휘발유도 최우선적으로 군으로 가게 된다. 군의 최고사령관은 김정일이다. 그에게 인간적 양심이 있다면 좁은 북한에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몇 백만 명이 아사했다는 것은 - 그것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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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xcbv 2009-11-29 22:25:00
    김일성이나 김정이리나 그놈이그놈이지 그놈의 집안은 악마집안이며 통일후 그씨족은 모두 뼈를 갈아 북한전역에뿌려 평화시기에 억을하게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주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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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라드 2009-11-30 02:26:02
    이정도 내용이야 여기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수없이 많은 탈북자분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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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긴다 2009-11-30 09:54:23
    탈북자가 한두명도 아니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어찌 같은 소리를 할수있을고 ! 사실이 아님담에야
    법정에서는 두명이상의 증언이면 모든 문서가 확정인데
    1만 5천명위를 떠도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못믿고 신뢰하지 않은
    지난 10년의 정부에 참말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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