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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北送 50년… "사기에 의한 9만명 大유괴사건이었다"
Korea, Republic o 시골눈 1 266 2010-01-18 21:54:13
조총련 상대로 소송 벌이는 고정미씨 인터뷰

50년 전인 1959년 12월 14일. 일본 경찰 2000여명의 호위를 받은 3000여 환송 인파가 일본 니가타(新潟)항에 모였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인공기 물결, 만세 함성 속에서 오후 2시 재일동포 975명이 여객선 2척을 타고 '지상의 낙원'으로 향했다. 이들이 북한 청진항에 도착한 것은 16일. 하지만 이들 앞엔 북한이 선전한 '낙원의 행복' 대신 처절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북송된 재일동포는 1984년까지 모두 9만3340명.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고정미(高政美·49)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3세 때인 1963년 10월 18일 111차 북송선을 탔다. 조총련 간부로 재일동포 북송사업 실무를 담당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 4명과 함께였다. 비극은 청진항 도착 첫날부터 시작됐다.

2003년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온 뒤 조총련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고씨를 지난 11일 오사카에서 만났다.

―도착 첫날 어떤 일이 있었나.

"당시 10대였던 오빠가 있었다. 북한 풍경을 보고 낙담해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울자 북한 사람들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한다. 오빠를 다시 만난 것은 5년 뒤였다. 내가 8세 때였다. 오빠를 만난다고 도시락도 싸고 가장 좋은 옷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만났나.

"산골 수용소였다. 동물 우리 같았다. 철창 안에 20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사자들처럼 머리가 길었다. 대소변 위에서 누워 있고 기어다니고…. 그 중 한 사람을 끌어냈다. 얼굴은 검고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다. 어머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너무 아팠다. 얼굴을 한 차례 올려다본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오빠를 다시 만난 일이 있나.

"없다. 1971년 시신도 없이 사망통지서만 받았다. 사실 면회를 하고 사망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힘이 있었으니 가능했다. 다른 귀국자(북송 재일동포)들은 가족과 생이별 후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지난 11월 일본에서 출간된 '북조선 귀국사업'에 따르면, 대다수 북송동포는 북한에서 ▲전쟁 중 한국으로 간 사람의 가족 ▲반혁명집단의 구성원과 가족 ▲전쟁포로·중소상인·성직자와 함께 신용할 수 없는 계층으로 분류돼 교양 개조와 감시 및 차별의 대상이 됐다. 모두 자본주의를 경험한데다 간첩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나.

"일본에서는 법학을 공부해 북송사업을 담당했지만, 북한에선 신의주 제지(製紙)기계공장 부지배인으로 배치받았다. 귀국자 신분으론 북한에서 법 관련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고향이 북한이었나.

"제주도였다."

―배신감이 대단했겠다.

"그런 일을 당해도 불만을 말하지 못하는 사회가 북한이다. 밤새 울고, 식사도 못하고, 속만 타들었다. 아버지도 5개월 동안 어디론가 끌려간 일이 있다. 1976년이었다. 돌아온 아버지는 엉덩이 살이 썩어 시커먼 피고름을 쏟아냈다. 뼈가 드러난 곳으로 수개월 동안 소독 솜을 밀어 넣었다. 돌아온 것이 기적이었다. 그렇게 끌려가면 대부분 돌아오지 못한다. 당사자는 죽고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간다. 북한에서 귀국자들은 인간도 아니었다."

일본 법원에 제출한 고씨의 고소장에 따르면, 아버지가 끌려간 것은 노동당 입당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족들의 입당도 반대했다고 한다.

―많이 후회했겠다.

"아버지는 말년에 '내가 동포들을 그렇게 (북한에) 보냈으니 그 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늘 (북송사업을) '대(大)유괴사건'이라고 말했다."

―조총련 간부였는데, 북한을 몰랐나.

"속았다는 사실을 북한에 와서 알았다. 직접 가보지 않은 것을 많이 후회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사람을 믿지 마라. 꼭 확인해라.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도 믿지 마라'고 했다."


―학창시절 고생했던 기억은?

"일본에서 가져온 옷을 인민학교에 입고 갔다가 모두 찢겨 알몸이 된 일도 있다. '사상이 나쁘다'는 이유였다."

고씨는 1980년 신의주 제1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신의주 제2사범대학과 신의주 체육대학 교원으로 학생들에게 '예술체조'를 가르쳤다. 1992년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도 참가해 김정일을 직접 보는 '영광'도 누렸다고 한다.

―북한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계기는.

"평양에 있을 때 대학에서 급히 '신의주로 가라'는 연락이 왔다. 1995년 5월의 일이다. 역에서 내리니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굶어 죽은 시체들이었다. 북한 각지에서 중국에 가까운 신의주로 먹을 것을 찾아 몰려들면서 시체가 쌓인 것이다. 신의주 김일성 동상 앞에도 시체가 있었다. 시체를 치우기 위해 힘이 센 체육과 학생들을 동원한 것이다. 압록강 국경에서 시작했다. 역전(驛前) 여관방 4개에 시체를 쌓았다. 시체 위에 소독약을 뿌리고 또 시체를 쌓았다. 이틀이면 방 4개가 꽉 찼다. 밤엔 당국이 관리하는 산에서 직경 5m 정도의 큰 구덩이를 팠다. 그 속에 묻었다."

―북한을 탈출한 이유는?

"내가 돈을 빌려준 사람이 사건에 관련돼 잡혀가는 바람에 대학에서 해고되고 두 아이와 함께 산골로 추방됐다(의사였던 남편은 이전에 병으로 사망). 딸은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이었고, 아들은 체조 후보선수였다. 가족 모두의 인생이 끝난 순간이었다."

―일본을 택했는데.

"북한에서 너무 차별을 받았다.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결국 우리를 차별한 사람들이다. 그 속에 들어가 다시 '귀국자' 차별을 받을 게 무서웠다.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총련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이유는?

"한국에선 귀국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북한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북한과 조총련의 사기에 동포 9만명이 속아 넘어간 유괴 사건이다.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얼마 전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기각됐는데.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곳에서 갇혀 살았다. 그러니 시효란 있을 수 없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때 북한으로 자식들을 보내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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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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