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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설마리 전투 설욕한 국군 6사단.(펌글)
Korea, Republic o 목련꽃 0 314 2010-04-24 11:04:17
6.25때 중공군 군단을 궤멸시킨
전투의 주역 국군6사단 이야기 입니다.

http://koreanwar60.tistory.com/123


1951년 4월 22일,

한반도 허리 전역에서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이래 최대인
50만 병력의 중공군 대 공세가 개시 되었다.


6·25전쟁 참전 후 북한 땅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기습하여
큰 재미를 본 중국은 꿈이 부풀대로 부풀어서 유엔군과

한국군을 기필코 한반도에서 내쫓아 버리겠다는 야심의
일환으로 무리한 대공세를 편 것이다.


중공군이 '5차 전역(戰役)'이라고 명명했고 유엔군 측에서

'춘계 공세'라 부른 이 대공세는 대전과 안동선 까지 유엔군을

밀어 내리른 목표로 감행 된 것이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서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야심만만하게 보이는 거대한 공격계획을 세운다.


즉 서쪽에서 6집단, 중앙에서 8집단군, 그리고

동쪽에서 9집단군이 공세를 취한다.

중앙의 8집단군이 정면 공격을 하고 좌우의 집단군이

중앙을 향하여 한반도를 비스듬하게 가로 지르는 집게 발 같은

공세를 취해서 전선에 대치중인 유엔군 주력을
이 양익 포위 안에 가두고 격멸해 버리는 엄청난 것이었다.

주력 격파 후 남한의 절반 정도를 쉽게 먹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루는 전투 이야기는 춘계 공세 때 임진강에서
공세를 취했던 중공군 19집단군 63군의 전투사이다,


63군은 1937년 대장정 때 연대장을 지낸바 있던
양득지[揚 得志-양더즈]가 지휘하는 19 집단군 소속으로
군장(軍長-군단장 급에 해당)은 역시 실정 경험 풍부한
부숭벽[傅 崇碧-푸충비]이었다,


63군은 한국전이 처음이었다.

윤번제[輪番制]배치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자 임진강까지

도보로 열흘 넘게 걷고 걸어서 배치된 부대였다,


[윤번제는 인구 많은 중국이 6·25전쟁중 실시했던 것으로

3개월마다 부대를 교체해서 각 군이 골고루 전투 경험을

갖추개 하는 제도였다, 3개월 교체가 윈칙이지만 전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운용되었다.]


한국전의 경험은 없었지만 63군 장병들은
전번 1차[군우리 전투]전역, 2차[운산전투]전역,
3차[서울 탈환 전투]전역, 4차[횡성 전투] 전역에서 유엔군들을
신바람 나게 깨부순 영웅담에 취해 잔뜩 공명심에 부풀어 있었다,


- 전번 부대와 전혀 다른 운명이 이번 전역에서 자기 부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내다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월 20일,

공세 시작 이틀 전 63군장 부 승벽은 휘하

187사장[師長-사단장]및 퇀장[團長-연대장]들과 함께

지방 노인의 안내로 정찰을 나가 임진강 도하 가능여부를 살폈다,


187사는 부숭벽이 신임하는 63군 최고 정예사단으로

이번 공세의 선두에서 공격을 선도할 임무가 주어졌다.


187사장 서신[徐信-쉬신]은 퇀장들과 함께 직접 강에 들어가서

건너 가보며 깊이를 재보고 도하 가능성을 판단했다.


이들이 넓게 산개하여 도하한 임진강 구간은 오늘날 파주군
두미리 나루와[지금 다리가 건설중이다] 연천의 비룡교
샹류 어유지리 구간이다.


4월 22일 황혼녁. - 유엔군 기록은 18:00 -
187사의 선도 하에 63군의 3개 사단은 개미떼와 같이

일시에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


187사장 서신은 부숭벽에게 자기 사[師-1만 명]가 10분안에

임진강을 도강하겠다고 장담했는데 실제 도하시간에

걸린 시간은 10분이 되지 않았다.


현장에 가보면 놀라운 기록임을 알 수가 있다.
적의 공격에 취약한 도하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전 사단이

전력 질주로 건넌 것 같다.


공격을 개시한 63군은 3만 병력으로 공격 전면 최 좌측에
배치된 벨기에 대대를 패주시키고 황혼 속의
적성 일대 평지를 가득 메우며 남하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187사는 일개 연대를 동원하여

그날 밤 21:00 적성 남방 설마리 일대 산에 배치된 영연방

29여단 그로스터 연대 1대대에 야간 대공세를 취했다.

[그로스터 연대는 1634년 창설 되었고 워터루 전투에도
싸웠던 역사와 전통이 깊은 부대였다.]


다른 연대는 밤을 도와 29여단 1대대의 후방을 차단하고

계속 진격하여 감악산을 점령했다,

영국군과 인접 미 3사단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작전의도의
점령이었다.


영군 그로스터 연대 1대대는 서신의 187사단의 급박한
대 공격에 완전히 궤멸 상태에 빠졌다.

영군의 세 배가 넘는 파도 같은 대부대 공격이었다,

전방에 자리 잡은 1대대 A중대 같은 부대는 단숨에
전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로스터 1대대는 설마리 일대 고지들을 붙들고
사흘을 더 버티었다.

영 여단은 세 번에 걸쳐 증원 군을 보내 대대의 남은 생존자를

구하고자 노력했지만 1대대를 겹겹이 포위하고 접근로의
고지를 차지한 중공군의 반격이 너무 완강해서 여단은 사흘 간
노력하다가 구조를 포기했다,


29여단에게도 철수 명령이 내려서 공격에 노출 되지 않았던

다른 두개 대대는 탱크의 지원을 받으며 의정부로 철수했다,


철수하면서 여단은 구출할 수없었던 1대대에게 자력으로
탈출하라는 실현 불가능의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대대원은 300여명이 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태반이 부상자였다.


대대장 카엔 중령은 기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을 차마 그만 두고
갈수가 없어서 자기와 군목 데이비슨, 군의관 하키 대위 등
몇 명이 그냥 포로가 될 것을 각오하고 남기로 하고
나머지 걸을 수 있는 부대원은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이날이 1951년 4월 25일 이었다.


A,B,C 3개 중대가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D중대는 반대로

북쪽 적성 쪽 파평산 기슭로 탈출했다.


남쪽으로 향했던 3개 중대는 한명도 본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반면 북으로 향했던 D중대원들이 국군 1사단을 지원하던

미 73탱크 대대에 구출 될 수 있었다.


대대병력 662명중 귀환한 부대는 앞에서 미 73전차 대대에

구출된 D중대 37명이 전부였다.

나머지 병력은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중공군 63군 187사는 한반도에 파병되어 싸운 최초의
전투에서 유럽 대국의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사기가
최고로 올랐다.


반면 오른쪽 임진강 하류 쪽에서 도하를 해서

문산 쪽으로 공격을 했던 64군, 65군은 초반부터 죽을 쑤었다.


63군이 영국군의 목을 혼절하게 죄고 연타를 가하고 있을 때

3키로도 떨어지지 않은 식현리에서는 도강했던 중공군은

미군 73탱크의 매서운 반격을 만나 섬멸되어 버렸다.


중공군은 임진강 바로 옆 국사봉 계곡으로 도주하여
탈출을 꾀했지만 계곡 안까지 쫓아와서 포화의 세례를 끼얹는

전차 중대에 의해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첫 전투부터 징조가 영 좋지 않았다.


두 군[북한군 1군단 포함]은 선전을 하며 쾌속 남진을 하는

63군과는 달리 한국군 1 사단과 미 1 기병사단에 막혀

거의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번 춘계 대공세를 기획하면서 은근히 서울도 점령해볼 기대도

해보았던 팽 덕회나 양득지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졸전이었다.

노발대발한 팽덕회는 두군장[曾思玉, 肖應棠]들을

해임해버렸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의 근대사에서 아편 전쟁이래

굴욕을 준 오만한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되어 오던 차였다.




공산주의의 교조 칼 맑스를 가난 속에 방치하고

학대한 나라였다.

그런 못 된 국가의 군대를 섬멸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63군은 계속 진군하였다.

다시 한 번 양놈[洋鬼]부대를 잡아서 거덜 내어 버릴

욕심이 187사단장 서신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기민한 철수 솜씨로 도망만

가고 있었다.




그냥 도주한 것이 아니었다,.

미군은 조직적으로 철수하면서 포병과 항공력으로

밤낮 없는 화력을 퍼부어 추격하는 중공군의 전력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미군들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중공군의

큰 약점이 보급에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보급체계가 형편없어서 병사 개개인이

휴대한 식량과 실탄이 다 떨어지면 전투를

중단하거나 철수해버리거나 했었다.




미군은 화력으로 추격 중공군을 약화시키면서

바로 이런 반격의 시점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정신없이 도주하는 적군을 쫓던 중공군에게도

그 시기가 굶주림의 예고와 함께 찾아왔다.

굶주림은 공세 내내 중공군을 괴롭힌 고통이었다.

미군의 극심한 공습아래 우마차로 해주는 보급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군장 부 숭벽 마저 먹을 것이 없어서 당번병이 끓여주는

뽕나무 잎사귀 국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다



공세를 시작한지 7일 만인 4월 29일,

총사령관 팽 덕회는 할 수없이 작전 정지를 명령했다.

병사들이 휴대한 실탄이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열흘 정도의 작전 기간동안 어설픈 보급 체계를 통해
탄약과 식량이 재 추진되자 일선의 중공군 지휘관들이
의견 상신을 해왔다.




전과가 미약하니 공세를 조금 더 지속해서 좋은 수확을

거두고 점령지도 확고히 확보 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대전이니 안동이니 하는 점령 목표는 휴지가 되었다.
그러나 물정 모르는 중공군 간부들의 욕심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팽덕회는 모택동의 재가로 위의 의견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16일 오후 황혼 무렵에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제 2차 춘계 공세였다.




2차 공세 발령과 함께 63군의 3개 187, 188, 189사단은 일제히

한강을 건너 경기도 양평군으로 진입했다.




63군의 최선두에서 달려온 187사단은 공격 정면의

동쪽 지역,즉 좌측을 맡아 홍천 강을 도하했다.




63군이 공격한 전면에 사단 다른 연대보다 훨씬 돌출해서

국군 6사단 2연대가 고지를 점령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대기 하고 있는중이었다.




5월 16일과 17일에 한강을 도강을 완료한 63군은 2연대를

6사단의 주력으로 오인하고 5월 18일부터 총 전력을 기울여
공격했다.




상대가 [무장과 훈련이 빈약한 약체여서] 낮추어 보던 한국군임을

알게 된 서신의 187사단은 다시 한번 설마리의 대승을 되풀이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믿고 다부지게 공격했다.




더구나 국군 6사단은 불과 한 달 전 화천 사창리에서
중공군 3집단군에게 대 참패를 당하고 패주했던 부대였다.




초전에 대영제국의 부대를 두들겨 부수었던 그에게 이런 약체

군대는 간단히 먹어치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던 부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6사단 장병들은 엄청난 투지로 응전했다.

63군의 3개 사단이 나흘간을 공격했지만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6사단의 2연대가 사수하던 세 개의 고지 중 한개도 점령하지

못했다.
반면에 전사자만 4,000여명,포로가 1,000명이
넘게 발생하는 대 피해를 입었다.



한편 팽덕회가 중공군의 숫자만 믿고 감행했던 춘계공세의

말기적 증상이 이 용문산 전투에서부터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즉 야심만만하게 춘계 공세를 시작했던 중공군에게는

군사 용어에서 말하는 ‘공세 종말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도 없이 전쟁을 시작했던 중공군의

문제 있는 전근대적인 의식 구조가 대 비극을
불러 오고 있다는 말이다.



그 때까지 철수만 하던 유엔 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했다.


양득지의 집단군이 팽 덕회의 구상대로 동부와 서부에서 양팔을

벌려 전선의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구상대로 서부전선
북쪽에서 중부전선 남쪽으로 긴 수건처럼 늘어져 있는 배치롤
공중정찰로 파악한 미군은 그 중간,머리 부분을 절단 하는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용문산의 전투 이틀째 되던 5월19일이었다.


전차 200대와 군단급 보병이 협동한 보전조 반격이 허기지고
피로한 중공군에게 매섭게 가해지기 시작했다.




63군의 좌측 189사에 미군 7사단의 수색 중대 전차가
나타나서 탐색 공격을 해보고 후퇴했다.




전투경험 풍부한 부 숭벽은 2차 춘계공세 개시 때부터

마음 속에 검은 구름처럼 커지던 불안감이 풍선처럼
부푸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달려드는 중공군을 피하면서 지켜만

보고 있는 미군의 주력이 반드시 무서운 화력을 동원해서 총반격을

해오리라는 예상을 이 경험 많은 노장은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이 바로 현실화 되어 전부대가 차단하기 좋은 강을
건너가 있는 위기의 순간인 지금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때 용문산의 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겪고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한 187사 사장 서신이

후퇴를 상신해왔다.




불안감에 고민을 하던 부 숭벽은 전 63군이 며칠간 공격했어도

미동도 안하는 국군 6사단 방어선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섰고 더구나 두려운 미군의 반격이 개시된 판에

더 이상 강 건너에서 꾸물거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고

즉시 서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강 남쪽의 63군에 철수를 명했다.




이 명령은 자기의 상급부대인 19군의 양 득지의 허가도 득하지
않은 전선 지휘관의 독단 전횡권을 휘둘러서 결정한 것이다.


이 신속한 결단이 63군을 구했다.바로 옆 60군은
8집단군을 지휘하던 무지한 왕진산이 황소 고집을 부리며
철수 명령을 적시에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강을 건너 가서
작전하던 180가 전멸의 타격을 입었다.
일만명의 병사중 귀환한 병사는 단지 일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참고한 중국군 전사는 용문산 자락에서 중공군을
패배시킨 군대가 한국군이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막연히
강한 적군이라고만 써있다.

읽는 중국인 독자는 모두 이 강한 군대를 미군으로 오해할만하다.

참전 초기에 쉬운 승리로 형성된 약체 한국군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기가 싫었던 것이었으리라.



결단을 내린 부숭벽은 전 63군이 한강을 역도하는
철수작전을 밤을 세워 추진해서 완료했다.

마지막으로 한강을 도하한 187사가 추격하는
미군이 상류에서 도하하는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강을 건너 차단에서 빠져 나오는 철수였다.

피해가 막심해서 만신창이가 된 63군은 이제 유엔군의
휘 몰아치는 추격을 피해서 북으로 정신없이 도피해야 하는

필사의 도주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미군의 전사에 ‘오월의 대학살’이라고 기록된 참혹한
살육전의 추격전이었다.




중공군의 패주는 지휘체계와 보급 체계가 마비된 부대가
보이는 붕괴 현상을 표본적으로 보이는 최악 '붕괴 패주'였다.




187사가 후미 엄호를 맡았지만 엄호보다 자기들 부터 살기에
급급해야 할 만큼 전차와 전투기를 앞세운 한미의 추격은 매서웠다.

이미 길은 미군 전차 부대가 장악해 버려서 63군은 산을 타고

도주했다.


63군장 부 숭벽조차 차를 버리고 일반 전사들과 같이
산을 타고 도주했다

기진맥진한 그는 뼈만 남게 마른 몸을 호위병에게 기대다시피
걸어 겨우 낙오를 피했다.




굶주림까지 겹쳐 마구 발생하는 군 사상자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뒤에 방치해야하는 정신없는 패주였다.




패주의 비극은 전 중공군을 덮쳤다

무수히 많은 중공군이 포로가 되고 사살되었다.



진격하던 한미군은 수십, 수백 명의 집단 투항 포로를
수집하느라 진격을 지체해야 했다.



용문산에서 중공군 63사를 격퇴한 국군 6사는 이들을 추격하며

화천호에서 전설이 된 큰 전과를 거두었다.



63군은 기진맥진하여 연천부근의 19군 사령부를 찾았지만
사령부는 보따리를 싸가지고 북으로 야반 도주한지 오래 되었다.


팽덕회의 총 사령부마저 보따리를 싸가지고 함경도

성천 근처로 도주했는데 19군 사령부야 말할 것도 없었다.




63군이 겨우 철원까지 도망친 뒤에야 미군의 추격이 중지되었다.

이 때 63군의 남은 잔존 병력은 원래의 절반도 되지않았다.

중공군이 전개했던 한국전 최대 규모의 춘계 공세 작전은

중공군 최대의 대패로 끝났다.




중공군 발표로는 전사자만 3만 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공세의 실패 뒤 모 택동이나 팽 덕회의 입에서
남조선 해방이니 미군의 한반도 축출이니 하는 배부른 소리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중공군이 4월 22일 호호탕탕[浩浩蕩蕩-중공군이 좋아하는 표현]
건넜던 임진강 이북 유역과 영국군을 격파했던 경기도 적성과
설마리 일대도 유엔군에게 수복되었다.




영국군은 임진강변에서 글로스터 대대가 압도적인 중공군에게

맞서서 희생했던 이 전투를 크게 다루고 있다.

‘글로스터’라는 부대 명칭도 ‘임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설마리 전적비 건립식에도 찰스 영국 왕세자와 다이아나 세자빈

부부가 참석했던 것은 설마리 전투가 영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말해준다.




전사 연구는 전사에서 한 의미나 가치를 발굴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국군 6사단이 용문산과 화천 전역에서 대승했던 것은

우리 국군 전사에서 크게 다루고 있지만 설마리에서 승리했고

용문산에 패배했던 중공군 187사에 시각을 맞추고 분석한
글은 아직 만나본 본 일은 없다.




한국군이 영국군을 대패시킨 중공군을 패주시켜서 그 설욕를

했다는 사실이 일찍 알려졌었다면 설마리에서 전사한 영국군

호국영령들이나 그 유족들이 한국 수호의 희생에 보람을

느낄 수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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