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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親)소(蘇聯)파가 악질(惡質)이다
고문승 1 403 2005-09-05 23:57:17
친(親)소(蘇聯)파가 악질(惡質)이다

고 문 승

2005년 8월 30일 동아닷컴 http://www.donga.com 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親日) 인사 3090 명을 발표했다는 기사가 있다.

----< 친(親)소파 김일성 등 >--------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는데, 친일파란 일본(日本)과 친(親)한 사람들이란 뜻인데,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일본에게 나라가 멸망되는데 협조한 사람은 몇 명 안 되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일본에 협조한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하여 발표하였다.
1910년 이후의 친일파라고하는 사람들보다 김일성을 비롯한 친소파(親소련파)가 악질이다.
1945년 8월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정(軍政)의 지원을 받으며 김일성 세력은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만들고 후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고, 북조선공산당을 북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만들었고 후에 박헌영 세력의 남조선노동당의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만들었다.
조선노동당의 총비서가 된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이 친소파(親소련파)이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여 수상이 되었고 남쪽에서 월북한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이 부수상 겸 외상 이 되었다.
박헌영은 조선공상당의 총비서였는데 1947년 조선공산당(박헝영)과 신민당(백남운), 그리고 인민당(여운형)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한 후 남로당의 부위원장(위원장은 허헌)이면서 실력자였는데, 월북하여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데 협조했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북한에서 공산주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38도선 남쪽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도록 선동을 했고,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은 남한의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의 빨치산들에게 살해되었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빨치산이 아닌 선량한 양민(良民)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1945년 5월10일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든 제헌의회(制憲議會) 의원(議員) 선거를 하여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UN(국제연합)이 결정하였는데 소련군정(軍政)과 친소파(親소련파)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선거를 거부했고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주석”인 김구 선생은 친소파(親소련파)는 아닌데 이 선거를 거부했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5.10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로당의 제주인민해방군이 일으킨 폭동으로 5월 10선거가 무효 처리된 제주도의 선거구 3개 중에 2개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남한의 국민들이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을 선출했다.

이 제헌의회 의원들이 대한민국의 헌법 초안을 만들고 심의하여 1948년 7월 17일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헌법(大韓民國憲法)을 제정하였다.
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서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고, 7월 24일에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세계에 선포했다.
국제연합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唯一)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했다.
친소파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을 확정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여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에 박헌영으로 하는 친소파인 김일성세력과 월북한 남로당 세력이 합작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1948년 9월 9일에 창건하였다.
친소파(親소련파)인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설되기 전에 1948년 2월 6일에 소련군정(軍政)의 후원을 받고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후원으로 1947년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정권장악을 다져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친소파인 김일성은 20만 명의 조선인민군을 거느리고 남한으로 침공해왔다.

6.25 남침하기 전에 친소파인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의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며 소련의 수상인 스탈린에게 남침할 것을 승인받아 두었다.
미국의 조지아대학(The University of Georgia)의 홈페이지
http://www.uga.edu 에 있는 한국전쟁에 관한 Phil Williams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또 미국의 Yahoo에서 William Stuek을 검색하면 다음 내용이 있는 글을 볼 수 있다. )
번역문 뒤에 영어원문이 있다.
“침공(공격 -한국전쟁에서의)은 조셒 스탈린( Josep Stalin)에게 승인을 받았고 공격하라고 독촉 받기까지 했다, 설혹 소련의 군부대들이 전쟁(한국전쟁)에서 제한된 부분만을 수행했고 그것도 매우 뒤 늦게 했다. (전쟁말기에) ”

Though the attack on June 25, 1950, came as a surprise to American and South Korean troops, it should not have, said Stueck. There were numerous warnings that an attack might have been imminent, but South Korea was simply unprepared.

(The attack was approved and even urged by Josef Stalin, though Soviet troops played only a limited part in the war and that much later.)

대한민국 즉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 세력들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여 미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드디어 국회는 미군철수를 결의했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군은 10만 명 정도 이었고, 무기도 초라했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인민군이 침공한 지 3일 만에 대한민국은 서울을 빼앗겼고, 드디어 대구와 부산을 비롯한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지역들을 김일성의 인민군이 점령하였다.
남한의 국민들이 약탈당하고 젊은이들은 조선인민군으로 입대가 강요되었고 전선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조선인민군으로도 죽었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은 남한의 점령지역에서 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인 남조선 노동당 세력과 합작으로 인민재판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병사들로 구선된 UN(國際聯合)군이 맥아더 장군(Douglas Mac Arthur)의 지휘 하에 1945년 9월 15일 인천상륙을 하였고 이어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에 당황한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은 후퇴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국민 즉 많은 남한 사람들을 납치해갔다.
가요에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꼭꼭 묵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절름거리며) 끌려가신 이 고개야 한 많은 미아리고개 ”라는 가사처럼 비참하게 끌려갔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김일성의 조선인민군 그리고 나중에 참전한 중국의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대한민국의 국군이 15만 명이 전사했고, UN군 병사들도 수만 명이 전사했다.
남한의 민간인들도 수십 만 명이 죽었다.
사관학교 한국전쟁사에는 남한의 민간인의 피해를 사망 23 만 명, 실종 29 만 명, 북괴의 학살 12 만 명이라고 하여 사망자가 35 만 명이 된다.
인민재판으로 죽은 사람들과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죽은 사람들이 35 만 명이 된다는 것이다.
행방불명자 29 만 명 중에 북한으로 납치되어간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조지아대학의 홈페이지 http://www.uga.edu 에 Phill Williams가 쓴 한국전쟁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어원문은 번역문 뒤에 있다.

“130 만 명의 한국인들이 죽었고, 이에 더하여 100 만 명의 중국인들, 약 50 만 명의 북한사람들, 5만 4000 명의 미군 병사들이 죽었다.”

While the battlefield of the Korean War was regional, the war was seen as a threat to
U. S. credibility and to the viability of the United Nations. The conflict eventually included 20 governments from six continents. Some 1.3 million South Koreans died, as well as 1 million Chinese, about 500,000 North Koreans and some 54,000 American tro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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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http://www.moreorless.au.com
에 있는 20세기의 영웅들과 살인자들 (heroes & killers of the 20th century)
가운데 20 세기의 살인자들에서 김일성에 대한 자료의 일부이다.
영어원문은 번역문 뒤에 있다.
------------- 약 300 만 명이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60 만 명과 100만 명의 북한사람들이 김일성 정권의 경제적 유산 때문에 불필요하게 굶어 죽었다.-----------

moreorless : heroes & killers of the 20th century

killer file
Kim Il Sung

AKA 'Great Leader', AKA 'Eternal Leader', AKA 'Suryong' (Supreme Leader).
Country: North Korea.
Kill tally: About three million killed in the Korean War. Between 600,000 and one million North Koreans needlessly starved to death due to the economic legacy of Kim's regime. (Some reports claim that as many as three million starve.)


물론 UN군과 대한민국의 국군은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을 38도선 북쪽으로 몰아내었는데, 드디어 멸공통일을 달성하기위하여 북진을 했으며,평양을 점령하고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은 만주로 피신했고 UN군이 만주까지 쳐들어와 중국의 모택동 공산당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정권은 중국인민군 100만 명을 한국 전쟁에 투입시켰다.

UN군과 대한민국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또 다시 서울도 빼앗기는
곤경에 처하였다가 현재의 휴전선에서 1953년 휴전하게 되었다.

중국의 인민군도 UN군의 공격으로 90 만 명이 전사했으며, 김일성의 조선인민군도 수십만 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은 친소파인 김일성이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남침했기 까닭이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집권하여 1994년 7월 8일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공산당인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이 일당 독재하면서 그리고 정권을 인계받은 그 아들 김정일과 함께 수백만 명의 북한 동포들을 굶어 죽게 하였다.

친소파인 김일성의 악질적인 죄악보다 더 악질적인 죄악이 어디에 있는가?

일본이 1919년 3. 1 운동 때 대한 독립만세를 부른 한인들을 8천명 죽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한인들을 성을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기도 했고, 한인들이 징병으로, 징용으로 끌고 갔고, 일본은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로 여인들을 끌고 갔고, 사할린에 수만 명의 한인들을 징용해가서 탄광 등에서 강제 노동시키는 등 무자비한 짓을 했다.

한인들이 일본군의 병사로 전사(戰死)한 사람들과 징용으로 가서 죽은 사람들과 기타 일본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많은데 친소파인 김일성 때문에 죽은 한인들 500만처럼 많지 않고 몇 만 명 수준일 것이다.

이 때는 일본의 식민지여서 한인들이 (한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이) 강제로 일본국민이 되어있어서 일본제국의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친소파인 김일성 의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 6.25 전쟁에서 한국군 15만 명 전사, 인민재판에서 살해된 사람들, 북한으로 납치 및 살해, 된 사람들, 북한의 인민군병사 수십만 명 전사, 북한의 민간인 수십만 명, 이들을 합치면 200만 명 더 된다. 그리고 북한에서 굶어죽은 동포들 300만 명을 합치면 그러면 500 만 명이 된다.

친소파인 김일성과 함께 한인들을 죽인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먼저 하여야 하는 것이 역사의 엄숙한 명령인데 이를 어기는 의도가 무엇인가?

친일파나 친소파라는 개념도 검토하여 다른 개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친일파(親日派) 는 일본과 친한 사람들의 구릅이란 뜻인데, 친일파보다는 아일파(阿日派) 다시 말해서 일본에 아첨(阿諂)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일파(阿日派))라는 개념을 개발하였으면 한다.

왜냐하면 친일파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에 진출하려면 일본과 협력하여야 할 일들이 많을 터인데 반일파(反日派)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는 없지만 건실한 친일파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소파도 마찬가지로 아소파(阿蘇派 - 阿소련파) 다시 말해서 소련에 아첨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개발했으면 한다.
친북파(親北派)의 명단을 발표하는데, 아북파(阿北派)다시 말해서 북한에 아부한 사람들과 구별했으면 하는데 북한의 동포들이 불쌍해서 식량이나 의약품 등을 보낸 사람들을 친북파로 보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부하 같은 자들로써 북(北)에 아첨한 사람들을 아북파( 阿北派)로 했으면 한다.

예컨대 한인으로 일본에서 2차 세계대전 후에 (태평양전쟁 후에) 기업으로 세계적인 기업가들이 출현하고 있는데 소프트뱅크( Soft Bank)의 송정의 사장이나 롯데 구릅의 신격호 사장등은 건실한 친일파(親日派)로 인정하고 일본이 한인들이 일본에서 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정 해주고 일본 사회의 합리적 분위기를 평가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80만명의 재일본(在日本) 동포들이 제2의 송정의,제 2의 신격호가 나올 수 있다.
러시아에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하는 50만 명 가까운 한인들이 있으나 송정의 나 신격호처럼 기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없으며, 혹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 조선족 동포들이 240 만 명이 있다고 하는데 송정의나 신격호 같은 조선족 기업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일본에서 야구선수로 활동했고 하고 있는 한국의 선동열 감독이나 이승엽 선수가 한국인의 기백을 발휘하였고 하고 있는데 선동열 감독이나 이승엽 선수도 건실한 친일파로 보고 아일파(阿日派)는 아니라고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유대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유대민족을 구출하여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로 인도하여 갔다.
모세는 이집트의 궁전에서 이집트의 왕의 누이동생이 길러주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도 될 수 있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에서 배운 지식이 유대민족에게 도움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친(親)이집트파라고 하지 아니 한다

한인들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창간하려면 일본제국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을 때이기 까닭에 일본제국에 대항하여 만주나 중국에서 항일(抗日) 독립투쟁을 하면서는 창간 할 수 없다.
서울에 있으면서 신문사를 하고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신문사를 하려면 일본제국의 관리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까 어느 정도의 일본 관리들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 놈에게 머리 숙이느니 신문사를 하지 않겠다면 모르지만 신문사를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신문사 만들고 정간(停刊)도 당하고, 폐간(廢刊)도 당하면서 광복운동관계자들이 찾아오면 군자금도 보태고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던 사람들이 동아일보며, 조선일보의 창설자들인 방응모 사장, 김성수 사장인데 이 창설자들을 규탄해서 무엇을 노릴 것인가?

만주에서 광복투쟁을 했던 광복군처럼, 혹은 독립운동을 평생 동안 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모든 한인(韓人)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으나 한반도에 있으면서 땅을 지키고, 농사도 하여야하고, 공장이나 기업도 지키려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광복군처럼, 혹은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저항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처럼 독립운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윤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못했던 것을 했기 까닭에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관리가 되어서 일본 사람이 하는 것보다 당시 한인(韓人)들에 고통을 안 주었다면 좋은 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법정에서 판사로 있던 한인이 판사를 그만 두고 변호사로 법정에서 때로는 독립 운동가를 변호하고 한인들이 일본관헌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법정에서 변론했다면 이것은 찬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관리로 일제시대에 군수를 했는데 일본사람이 군수를 했을 때보다는 한인들에게 고통을 덜 주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대한제국의 국민들이 잘못해서 대한 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국력이 당시 대한제국보다 강했고, 일본의 지도자들이 오만불손해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지도자들이 국력을 다시 말해서,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과학적 지식과 응용력을 기르지 못해서 국력이 비참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1897년에 선포되었는데 그 이전의 조선왕국의 임금인 고종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 1895년 일본의 미우라 공사가 지휘한 깡패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가 중전(中殿)을 시해하는 야만적인 짓을 했을 때에 경복궁에 있는 것이 두려워 러시제국의 서울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을 지냈으니 조선왕국이 존재한 것인지 러시아제국의 공사관에 피신한 사람이 조선의 임금 -왕이라면 조선은 이때 이미 사망한거나 마치 한가지였다.

박정희 장군 같은 사람이 이때에 나타나 왕정을 철폐하고 민주국가를 만들고, 국력을 신장하고 공업화를 촉진하여 나라의 부(富)를 축적하고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으면 1910년에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박정희 장군은 민족의 역사에 나타나는데 지각한 것이다.

그래도 1961년에 늦었지만 박정희 장군이 나타나 100년 이상 걸릴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한민족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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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의 관계자들의 부모님들을 조사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고 민조문제연구소의 관계자들 가운데 1945년 8월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일본식 이름인 창씨개명(創氏改名)된 이름이 있을 것이다.
1945년에서 1950년대에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이름으로 일본 등에서 대학생 혹은 전문대학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선생님들이었고 그들에게 배웠다.
창씨개명(創氏改名)한 부모님들도 친일파이고 자기들을 가르쳐준 선생님들도 친일파라고 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1인당 GNI 14,000 달러가 더 되고 GNI 7000 억 달러로 셰계의 11위의 나라가되었는데, 친소파인 김일성이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인당 GNI 750 달러, GNI 198억 달러 대한민국의 32분의 1수준이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대한민국의 최초의 헌법안을 만든 사람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서울대학교의 전신)의 수재 유진오 전(前) 고려대학 총장이었다.

유진오 박사도 친일파라고 하면서 유진오 박사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자들은 김일성을 찬양하여 김정일에게 충성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친소파인 김일성은 소련의 비밀경찰의 두목 베리아의 후원으로 조선공산당 총비서였던 박헌영도 재판을 통해 살해했고 월북한 남조선노동당 당원들을 집권과정에서는 이용하고 나중에는 많이 죽였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이 남침했을 때에 이를 물리친 것은 UN군이었지만 대한민국의 국군도 크게 기여했는데, 국군의 장교들이 일본 군대에서 배운 군사지식이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백선엽 장군, 정일권 장군 등이 일본 군대에서 배운 군사지식이 대한민국을 보호하고 한국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지켜주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군(軍) 장교들을 친일파라고 규탄하는 자들은 김일성이 남한을 공산화시키는데 방해했다고 이들을 증오하려는 것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아시아에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군인을 비롯해서 일본의 민간인이 310 만 명이 사망했고 매해 이 310만 명을 위하여 일본의 천황과 일본의 수상 등이 참가하여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일본의 군인이었던 한인들이 얼마나 전사했는지 정확한 수자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죽은 한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만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한인들이 있는데, 친소파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에게 죽은 사람들과 굶어 죽은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500 만 명이라면 만주에서의 전사한 광복군은 몇 천 명 전후가 될 것이다.
광복군의 숫자는 naver 백과사전에는 3,782 명이다.
다음은 naver 백과사전의 기술이다

--------------------광복군 지방 영장(營將)은 제1영장에서 제6영장까지 두었고, 그 아래에 다시 제1영 대대장(大隊長) 이하 제7대장(隊長)까지, 제2영 대대장 이하 제7대장까지, 6개 영에 3,782명의 군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

다만 일본군을 비롯한 일본인 민간인이 310만 명 죽었다고 하는데 310 만 명의 일본인들 가운데 한인들이 몇 명이 있는지, 이 310만명에는 없으나 한일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아직 알 수없다.
한인(韓人)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일본이 점령할 때에 일본 군인으로 참전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데 참전한 한인들이 몇 명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국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과 중국 침략을 포함하여 2,000 만 명의 아시아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고 있고 최근에는 3,500만 명을 죽였다고 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고 있다.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 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제군(諸君)의 2005년 8월호의 106쪽에 좌담회에 참가했던 야기히데쓰구(八木秀次) 교수(高崎經濟大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 중국정부는 1995년 즈음 (경-頃)부터 “일본군에 의한 중국인민의 희생자는 3,500 만 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수자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오래 동안 수수께끼 이다. ----
--- 대부분의 일본인은 “공산주의 흑서(共産主義 黑書)”의 6,500만 人이라고 하는 이것은 약간 적을 듯한 수자입니다만 중국의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의 실태를 알지 못합니다. ----

야기히데쓰구(八木秀次) 교수(高崎經濟大學)는 (제군(諸君)의 2005
년 8월호의 101쪽에 )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는 뉘른베르크(Nuremberg) 재판(히틀러등에 대한 재판)의 “평화에 대한 죄(罪)” “인도(人道)에 대한 죄”라고 하는 관점에서공산주의국가의 행상(行狀)을 판가름한 것이다.
그 결과 구(舊) 소련은 나치스의 만행 이상의 잔학(殘虐)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저자는 각국별로 사자(死者)를 분류하고 예를 들면 강제노동(强制勞動)에 의한 죽음(死), 반란(反亂)의 항쟁(抗爭)에 의한 죽은(死), 굶어서 죽음(아사-餓死) 등의 수자를 여러 가지 자료로부터 파악하여 바란스 시트(balance sheet- 결산공고)를 작성하고 있다.죽은 사람들(사자-死者)의 수자만을 인용하면 --
소련 --- 2,000 만 人 , 중국 --- 6,500 만 人, 베트남 -- 100 만인, 북조선 --- 200 만 人 , 캄보디아 -- 200 만 人,
동구(東歐) --- 15만 人, 남미 --- 15 만 人 , 아프리카 --- 170 만 인, 아프카니스탄 -- 150 만 인
이렇게 되고 있고 공산주의(共産主義)에 죽은 인구는 1 억(億) 人 가까이 추측되고 있다. -------------

중국 공산당이 6,500 만 명을 소련공산당이 2,500 만 명을 집단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가 발행하는 文藝春秋의 2005년 8월호의 108쪽에 좌담회에 참석한 櫻井요시꼬(저널리스트- journalist) 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중국은 동경재판의 초기에 일중전쟁(日中戰爭)에서 희생된 중국인의 수는 320 만 人이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사이에 570 만 人으로 불어났습니다.
더욱이 국민당 정부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정부(중국공산당정부)로 정권이 넘어가니 2108 만 人이라는 터무니없는 수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1995년 장져민 (江澤民) 총서기 시대가 되니 갑자기 중국은 3,500 萬 人이라고 수자를 말하였습니다. -------------

중국의 공산당 (共産黨) 총서기(總書記)이며 국가주석(國家主席)인 후진타오(胡錦濤)는 2005년 9월 3일 중국인민(中國人民) 항일전쟁(抗日戰爭) 및 세계반파시스트전쟁승리 60주년 대회 (世界反fascist戰爭勝利 60周年大會)의 기념사(記念辭)에서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전쟁기간에 중국군민의 상망자(傷亡者 - 부상자와 사망자)는 3,500 만 인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신화사통신 http://www.xinhuanet.com 있는 기사에서
(中國人民抗日戰爭曁世界反 法西斯(fascist)戰爭勝利60周年大會 上的講話 -- 据不完全统计,战争期间,中国军民伤亡3500多萬人 )
伤亡은 傷亡(상망)의 간체자 (簡體字)

중국의 교과서에 사망자(死亡者) 3,500 만 명이라고 하고 있는지, 상망자(傷亡者) 3,500만 명이라고 하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일본의 학자 등이 상망자(傷亡者)를 잘못 읽어서 사망자로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중국의 공산당 서기자의 연설에서는 상망자(傷亡者)가 3,500 만 명이라고 하고 있다.

다음은 미국의 하바드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hup.harvad.edu 에 있는 공산주의의 흑서 (共産主義의 黑書) The Black Book of Communism을 소개하는 글의 일부이다.

전(前) 소비에트 연방(the former Soviet Union)에서 2,500 만 명 그리고 중국에서 6,500 만 명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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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Stéphane Courtois, Nicolas Werth, Jean-Louis Panné, Andrzej Paczkowski, Karel Bartosek, Jean-Louis Margolin
Edited by Mark Kramer
Translated by Jonathan Murphy
As the death toll mounts--as many as 25 million in the former Soviet Union, 65 million in China, 1.7 million in Cambodia, and on and on--the authors systematically show how and why, wherever the millenarian ideology of Communism was established, it quickly led to crime, terror, and repression. An extraordinary accounting, this book amply documents the unparalleled position and significance of Communism in the hierarchy of violence that is the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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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떤 정당의 홈페이지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아시아 사람들이 2,000 만 명이 죽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야수쿠니신사(靖國神社)의 유취관(遊就館)에 들어가면 2,000 만 人의 아시아의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은 침략전쟁(侵略戰爭)을 아시아의 해방전쟁(解放戰爭)이었다고 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민(自國民) 310 만 명의 사망자들만을 위해서 위령제를 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2,000만 명의 사망자들을 위한 위령제도 하여야 할 것이다.
2,000만 명의 사망자들 속에는 한인들은 없는데 그것은 당시는 한인들이 일본의 국민이 되어있었던 식민지 시대였기 때문이다.

2,000만 명의 아시아 사람들이 죽은 태평양전쟁을 지휘한
일본의 수상이며 육군 대장 도조히데끼 (東條英機) 등을 모신 야수쿠니신사 (靖國紳社)를 참배하는 일본의 지도층에게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에서 참배를 받고 있지도 않고 독일은 2차대전에서 유태인 600만명을 살해하였고,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의 야만적 만행에 대하여 독일 국민을 대신해서 브란트 독일(서독) 수상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일본의 지도층은 이를 상기하여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2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의 위폐가 있는 야수쿠니신사(靖國神社) 에 도조히데끼(東條英機) 전 수상을 비롯한 A급 전범들 중의 14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즉 분사(分祀)를 하고 참배하라고 주장하는 중국과 한국의 요구를 검토하겠다고, 한 후에도 분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참배하려는 태도를 고쳐야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소련의 전투에서만 2,000 만 명이 죽었다고 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5,000 만 명의 세계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처럼 대량으로 사람들이 죽는 전쟁은 없었으나, 중국에서의 국민당 정권과 공산당 정권의 전쟁, 한국전쟁, 월남전쟁 같은 제한전쟁(limited war)들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승리했고, 월남에서 월맹공산당이 승리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북한공산당이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친소파 김일성이 세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GNI의 32분의 1 정도밖에 안되고 완전히 패배했다.
그리하여 친소파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추종세력들이 발광 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 한민족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에 있었고 광복군에 편입하려고 노력했고 뒤늦었지만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아시아 사람들을 살해하는 다른 지역의 일본군과 함께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대한민국의 군인들의 교과서도 저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북한의 1인 당 GNP 130 달러였고, 남한의 1인당 GNP가 87 달러인 때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고 근면, 검소, 절약, 저축. 증산, 수출, 건설의 표어를 내걸고 온 국민의 분발을 촉구했다.
1970년 북한의 1인당 GNP를 초과하는 업적을 세웠고, 근면 , 자조, 협동의 새마을 운동으로 근대화 작업을 착실히 수행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실 때에는 1인당 GNP 1600 달러를 초과하였으며, 수출 1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spirit)으로 기업가,근로자, 농민, 교사, 공무원, 군인, 모두 열심히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북한의 1인당 GNP를 두 배 이상 초과했으며,

남한의 생산 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1960년까지 남한사람들은 1인당 GNP 70달러 정도의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한국은행 홈페이지--( http://www.bok.go.kr ) 의 북한경제 편을 보면

2004년 북조선의 GNI(Gross National Income)는 208억 달러이고,
2004년 남한의 GNI는 6,810 억 달러이고 남한의 GNI가 북조선의 GNI의 32배이다.

2004년 북조선의 1인당 GNI는 910 달러이고,
2004년 남한의 GNI는 14,162 달러이고 남한의 GNI가 북조선의 15.5 배이다.
2004년 북조선의 무역총액은 10억 달러이고,
2004년 남한의 무역총액은 248억 달러이다.

1962년 북조선의 1인당 GNP는 130 달러이고,
1962년 남한의 1인당 GNP는 87달러여서 김일성의 북조선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는데 이제는 남한에 북조선이 패배했다.

1962년대에 남한의 박정희 정권이 근면, 검소, 절약, 저축 증산, 수출을 표어로 내걸고 노력하여 1970년에는 남한의 1인당 GNP가 북조선의 1인당 GNP를 추월했고 이때부터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운동으로, 한국은 더욱 발전했다.

이제는 엄청난 차이가 생겼다.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타결하여 청구권자금으로 세계적인 기업이 된 “포항제철”을 건설했고, 뿐만 아니라 한국 도처의 빌딩정글, 수많은 공업단지, 고속도로, 와 수많은 댐들 등 놀라운 자본형성(capital formation)을 이룩하여 세계가 감탄하고 있다.
.


세계은행 http"//www.worldbank.org 의 자료에 의하면

2004년의 중국의 GNI(Total GNI)는 1,676,846 백만 달러(1조 6천 768억 4천 6백만 달러 )로 세계에서 6위이고, 미국의 GNI는 세계 1위로 12조 달러가 더되어 중국의 7배가 되고, 일본의 GNI는 4조 7천억 달러가 더 되어 중국의 GNI의 2.7배가 더 된다.

한국의 GNI는 673,036 백만 달러로 세계에서 12위 이고 조선만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세계은행 자료에는 없다.

2004년 중국의 1인당 GNI는 1,290 달러이고 세계에서 132위이다
2004년 한국의 1인당 GNI는 13,980 달러이고 세계에서 49위이다.
2004년 북조선의 1인당 GNI는 825달러 혹은 그 이하($825 or less)라고 하고 있는데 세계에서는 825달러면 150위이다.

2004년의 북조선의 인구 22745천명에 1인당 GNI 825달러를 곱하면
(22,745천명 × 825달러 = 18,764,625 천 달러) 18,764,625 천 달러
약 187억 달러이고 이것이 북조선의 GNI(Total GNI)이고 세계에서는 78위가 된다.

2004년 미국의 1인당 GNI는 40,650 달러이고 세계에서 4위이고,
2004년 일본의 1인당 GNI는 37,180 달러이고 세계에서 9위이다.

김일성은 박정희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FORTUNE (2005년 7월 25일 발행)의 세계 500 대 기업에 한국의 기

업들이 11 개나 있다.,
39위--삼성전자, 92위에--현대자동차,
115위에-- LG 전자, 117위에--SK, 251위--삼성생명,
276위에 -- 포항제철(PSCO), 277위에--한국전력, 393위--한화,
414위에 --한국통신(KT) 442위--삼성물산, 446위--SK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든 박정희 대통령마저 친일파라고 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참패당하고 우리의 북한 동포들 수백만 명을 굶어 죽게 한 김일성의 불명예를 씻어주어 김정일에게 아첨하려고 하는 가?

대한민국 국민은 현명하고 어리석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했고, 후계자도 양성하지 못했고,
유신으로 기본인권에 대한 유보를 했다는 등의 잘못한 점들도 있지만 한민족의 5,000년 역사에서 삼국시대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동안에 이룩하지 못한 자본형성(CAPITAL FORMATION)을 이룩했고,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SPIRIT)을 국민의 가슴에 심었고,
후진국가, 저개발국가(低開發國家)인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향하여 가게 했다는 점에서 5,000 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뛰어나 지도자였다.

한국의 많은 대통령들이 대통령을 그만 두었을 때에 본인이 혹은 그 아들들이 부정한 돈 때문에 본인들도 수치스러웠던 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돈 문제도 깨끗하여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될 정치세력에게 도움을 보태려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를 망가트려 보려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부하 같은 짓은 중지하고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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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 승의 E-mail chungwon3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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