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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탈출(7)
Korea, Republic o 백심 1 922 2010-12-15 13:09:47

배급소 습격사건

 

나날이 지날수록 성분과 돌봐주는 친척간부들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대원들과의 통제도 지겨웠다. 그리고 어쩐지 최소한 관리장과 같은 장교들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 같은 생각만 들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바보 등신처럼 그들의 이용물이 되어 사병들의 미움깨나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정말 인간으로서는 못할 짓이었다. 창고에 갇히어 관리장의 임무만 수행하다가는 입당은 고사하고 간부출세의 밑천인 대학에 가는 꿈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무섭게 맴돌았다.

 

내가 가는 길은 다른 곳이 없었다. 오직 대열과장과 더 친해야 대학에 가는 길을 열수 있게 된다. 또, 병기과장, 사단 지형학 참모에게 뇌물을 더 많이 주어야 입당도 할 수 있었다. 모든 열쇠는 사단 지휘부 장교들이 손에 쥐어졌다. 그래서 나는 93년 7월 다시 사단체육 조에 나오게 되었고 레슬링을 통한 몸 단련과 함께 뇌물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체육 조는 시간이 많았고 기회도 많았다. 힘없는 서민의 자식이라 성분이 좋은 간부 집 자식들과는 달리 뇌물로 해결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그 뇌물이 마치 간부가 될 수 있는 밑거름처럼 생각하면서 어느 것이 정의고 어느 것이 불의인지, 과연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인지 아직도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고향집을 천리밖에 두고 군에 나온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알몸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주는 밥이나 먹고 시키는 일이나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면 어려서 꿈꾸던 꿈은 고사하고 고향땅에 머리를 들고 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앞으로의 장래를 위해서도 뇌물로 꿈을 이루겠다는 나의 야망에는 더더욱 끝이 없었다.

 

도처에서 급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의 등골을 뽑아먹으려고 날뛰는데 나라고 항상 앉아서 그들에게 당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기회가 많은 체육조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배짱과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 성철을 데려온 것이었다.

 

나는 성철에게 진심을 터놓았다.

"너도 알다시피 이대로 가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군대 나오기 전에 너는 중학교 공부를 하면서 학급반장을 하고 공부 역시 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나 내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부모님까지 행복하게 하려는 소박한 꿈이 무엇이냐? 오직 간부가 되어야만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이 시점에서 뇌물을 마련하여 대열과장과 지형학 참모, 그리고 사단 정치부 군관들을 완전히 매수하는 것이 어떠냐? 내 말에 동의 하냐?"

"좋아. 그런 일이라면 하자!"

나는 나의 진심을 선뜻 받아주는 성철이의 마음과 배짱에 왜서인지 위기의 전장에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와 손잡고 뇌물 마련을 위하여 낙원 광산 배급소를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낙원광산은 광산 종업원 수가 1만여 명을 가진 특급기업소였다. 북한 노동당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를 맡은 광산은 연, 아연, 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 일제시기부터 개발하기 시작한 광산은 그 역사 또한 길기도 했다.

수직갱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굴을 형성하여 캐먹기 시작한 광산은 북한 사회안전부(경찰)소속 인민경비대 군인들이 직접 틀어쥐고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일병 공병 국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81여단이 틀고 앉아 여단장의 손에 모든 광산 운영권까지 쥐어졌다. 그래도 군인보다 일반사회노동자가 더 많았다.

 

당국과 법기관의 차원에서 오매불망 순조롭게 나가던 광산은 아홉 고개를 넘기기 힘들어하는 팔삭둥이처럼 언제인가 위기의 국면을 맞았다. 89년 초에 글쎄 광산의 어느 갱에서 사고가 났던 것이다. 30여명의 노동자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은 사고였다.

수직갱에서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 식으로 된 궤지(북한말)가 수백미터 높이에서 운전공의 잘못으로 뒤집혀 모두가 갱 바닥에 추락 하여 사망하였는데 19세의 한 청년만이 수직갱 벽에서 삐져나온 동발 목에 간신히 걸려 살아났던 것이다.

 

출근길 아침에 일어난 사고로 노동자들은 충격에 빠졌고 북한 당국은 그 사고를 수습하려고 정무원 총리까지 내려 보내며 부산을 피웠다. 그리고는 사망한 사람들에 한하여 세대주는 정확히 모르나 독신보다 많은 돈을 주는 쇼를 벌렸다. 그때 독신에게는 2000원을 주었는데 시장에서 백미 1kg당 10원을 할 때였다.

 

사고의 여파는 자못 날카로워 노동자들은 한 달 동안 작업을 중단하고 갱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 간부들과 법관들도 그들의 행동에 수수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충격에 빠진 노동자들을 통제할 순 없었다.

 

낙연 광산은 장연군에 속한 지역이지만 한개 노동자구이다보니 당 및 행정기관과 자체 프로독재 기관인 보위부와 안전부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광산 지구는 또한 그 범위가 하도 커 1지구와 2지구로 나뉘었고 광산주민의 약 60%가 1지구에서 생활했다.

낙연 역전으로부터 송화온천과 남쪽으로 약 2.5km의 방대한 구간에 여러 개의 갱과 채취시설들이 가지런히 들어서 있었다.

 

광산의 낙연 역전 앞 반대 방향인 역전골 마을에는 나의 고향인 혜산에서 온 한 집안이 있었다.

그 집 세대주는 황해남도 배천군 사람이었으나 6.25전에 임진강에 나갔던 아버지가 남쪽으로 갔는지 모르나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일명 북한은 이런 사람들의 성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미해명자라는 딱지를 붙혀 고향에서 추방하여 양강도 두메산골로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행방 때문에 군에 10년간 복무하였으나 입당도 못하고 집단배치로 이 광산에 오게 되었고 양강도에 어머니와 형제들을 놔두고 그 곳의 여자와 결혼식을 하고 이곳까지 데려왔다.

고향 근처로 간다고 온 것이 장연군이였다. 그런데 그렇게도 헌신분투하며 육신을 바치던 그가 40살이 되던 해에 광산에서 일을 하던 중 오른 쪽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군대에서 이루지 못한 노동당가입을 광산에서 하려고 10여년을 열심히 일한 그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낳은 것은 당원이 아니라 결국 장애밖에 없었다.

 

살아생전 김일성이 실수 한 것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을 내각결정 159호에 의해 산간오지로 추방시킨 것이었다.

주민교체라는 대집단이주는 그렇지 않아도 외세에 의하여 두 동강이 나고 6.25전쟁으로 하여 천만 이산가족이 생긴 이래 그 후손들의 가슴에 두 번 다시 칼을 박는 천추에 씻지 못할 만행이다.

 

김일성이가 적을 통제하고 또, 될수록이면 적게 만든다고 한 것이 결국 더 많은 적을 만드는 시행착오(試行錯誤 ) 만 가져왔다.

중국 공산당을 하늘처럼 믿고 국가 정책으로 진행한 강제 이송이 중국의 배반으로 그 후손들에게 위기국면과 같은 역전극의 시나리오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개혁개방으로 뛰어들고 한국과 외교수립을 한 중국의 의지를 미처 간파하지 못한 김일성의 머리는 누구보아도 천리예안의 예지가 아니라 돌대가리보다 더 한심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같은 혜산사람이라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서로 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많은 것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군 하였다. 그 곳에는 또, 이 철호라고 26살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2명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평양시 건설에 동원된 당원돌격대원이었으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을 견딜 수가 없어 도망쳐 온 무직 건달이다. 그래서 2년째 놀고 있는 그를 경찰서는 요시찰 인물로 점찍었다.

 

자유가 없는 그곳에서 싫던 좋던 서민들이 공장이나 직장에 가지 않으면 무직업자가 되어 법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일명 실업자가 없는 나라이다.

 

오곡백과가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93년 7월 31일 밤 9시경, 나는 체육조의 옛 부대 동창 친구인 성철이와 함께 낙연 광산 배급소를 습격하게 위해 그 곳으로 향했다.

 

역전골에 들어서자 오리종기 붙어선 하모니카 주택 굴뚝들에서 조용한 밤하늘에 대고 하얀 연기가 줄무늬를 띄운 것처럼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상 가까이 다가가면 초라하고 버거운 삶의 역경들이 널브러져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 나라의 평범한 마을이었다.

 

낮은 대문을 열고 오른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무직업자 철호의 집이였다. 그의 집엔 마당 가득 영롱한 별빛들이 하늘에 튀밥처럼 무더기로 매달려 있었다. 달빛과 별빛과 운무가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고 있는 밤하늘이었다.

 

정격전압 220볼트가 들어와야 할 방안의 전등은 수수떡 같은 희미한 빛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비루먹은 강아지마냥 외롭게 떨고 있었다. 마치 나라의 허약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비틀거리는 전등의 아픔은 집안의 가긍한 몰골도 예의가 없음을 그대로 시시해줬다. 부엌 아궁이엔 죽을 듯 말듯 시들어가는 구멍탄의 불길이 겨우내 수명을 연장하고 있고, 시큼시큼한 돼지죽이 끓지도 못한 채 냄새만 역하게 풍기는 가마들은 가난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눅눅한 어둠마저 푸근하게 다가오는 광산 역전골의 밤. 그리고 이내 찾아드는 상쾌하고 촉촉한 새벽의 공기는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이었다. 허나 인간의 기초적인 식의주가 해결안 된 현실은 하루하루 탈탈 거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아름다움 그 자체를 깡그리 빼앗아 갔다.

 

불빛이 희미한 방으로 우리는 철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다. 초저녁인데 고단한 하루를 보냈는지 여동생들과 그의 어머니는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윗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철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짜고짜 담배 한대를 입에 무는 것이었다. 윗방에는 전등마저 없었다. 희미한 달빛이 뒷문으로 환하게 비쳐들어왔다.

"형님. 아무래도 돈이 있어야하는데 생각하다 못해 집으로 왔소."

"너는 계속 술과 맥주를 가져가곤 하는데 무슨 군대가 뇌물을 그렇게 많이 고이냐? 시키는 대로 군사복무나 하다 집에 가면 안 되는 거까?"

 

머리를 짧게 깍은 나와 성철이와는 달리 긴 머리를 왼쪽으로 넘기고 넙적한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는 그는 누구 보아도 푸짐한 호남형의 스타일이다. 그는 우리가 오자 면바지를 찾아 입었는데 한 절반 때가 반질반질한 바지에는 바늘로 꿰맨 흔적이 여러 개 있는 것이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식량이 모자랐다. 그래서 하루에 아침 아니면 점심은 늘 굶고 살았다.

먹을 것이 없다보니 초상난 집처럼 방안도 말이 아니었다.

 

덩그렇게 놓인 이불장은 리스 칠을 한 색깔의 윤기가 다 빠져 거덜이 났다. 또, 유리가 붙어있어야 할 문짝에는 비닐 을 대신하여 붙여놓았고 벽체에 걸려있는 옷 걸개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도배를 한 벽체는 습기가 많아 떨어져 너펄거리고 곰팡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첫눈에 봐도 궁핍한 살림이다.

 

내가 살던 고향집이나 철호네 집이나 이 나라 서민들의 집은 어데 가나 거기에서 거기였다. 그러니 다리 부러진 노루 한 곳에 모인다고 옛날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듣지 못하게 조용한 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오늘 밤 이 곳 배급소를 습격하자고 하오. 형님이 좀 도와주시오."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철호의 눈은 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순간적으로 커졌다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는 펄쩍 뛰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담배만 피우던 그가 입가에 조용하라는 표시를 하더니 연신 애꿎은 담배만 계속 빨아댔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이 섰는지 도간, 도간 소리를 죽여 가며 속삭였다.

"배급소는 현재 늙은 내외가 경비를 서고 있고 쌀도 많다. 지붕위로 올라가면 공기통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다. 쌀을 넣는 칸에 있는 넓은 문은 서쪽에 있고 안으로 잠가 경비실로 연결되었으니 들어갈 통로는 공기구멍밖에 없다. 그 곳으로 들어가 안으로 잠근 것을 열어두면 깊은 잠에 빠진 경비들을 속이고 마음대로 쌀을 꺼낼 수가 있을걸."

 

철호는 결심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허접한 인생 한번 목구멍이 뚫어지도록 이밥이라도 싫컷 먹자는 심산이었는지 그의 설명은 진지했다. 전등이 없고 쇠로 만든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배급소의 위치와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니 그 이상 더 힘이 되는 것은 없었다.

"좋소, 형님은 밖에서 망이나 보고 있소. 성철이와 내가 모든 일을 맡겠으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오. 만일 일이 성사되면 대가는 푸짐히 하겠소."

 

나는 몹시 흥분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절반이라고 그 순서가 정해진 이상 목표물을 향해 전진하는 일만 남았다. 대각이 맞으면 직사각형이 절로 쉽게 맞는 것처럼 무슨 일에서나 일머리와 처리에는 그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 순서를 어기면 사고가 나고 불량품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대각선이 50% 맞아 떨어졌다.  순서만 정확히 지키면   100%  맞는 시나리오였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빠르니 여기서 눈을 좀 붙였다가 새벽 2시가 되면 움직이는 것이 좋을 거다."

 

잠시 내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는데 철호가 입을 열었다.

 철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였다.

흥분은 또다른 비극을 불러 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흥분과 보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 않는가?

어쩐지 성심성의를 표하는 철호의 모습에서 한줄기 흘러드는 가느다란 빛처럼 천천히 솟구쳐 오르는 힘을 느끼며 잠에 설쳐 모대기던 성철이와 나는

그의 권고대로 눈을 조금 붙였다가 새벽 1시가 되어 배급소로 접근하여갔다.

 

광산에는 2개의 배급소가 있었는데 명철이가 알려주는 배급소는 1배급소로서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광산 지휘부가 있는 중심에서 약 1500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1배급소는 주변에 마을이 끼고 있었고 도로 오른 쪽에는 만포로 가는 철길이 있다.

도로래야 토사도로였고 야간작업인 밤 12시 교대가 끝난 일꾼들 몇몇이 손전지 불이나 아세틸렌가스등잔을 켜들고 지나가곤 하였다.

 

사실 국가공공기관인 배급소는 정치적 성격의 소유지였다. 김일성은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최고 목적은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기 국을 먹이고 비단옷에 기와집만 쓰고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양곡으로 정치를 하려 했다. 일단 양식을 취급하는 매개 군의 단체를 양정사업소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배급표도 직접 평양에 있는 양정총국에서 발급하여 그것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군 하였다.

 

김일성의 지시로 아첨꾼들은 농민들로부터 국가가 쌀 1kg당 15전에 사서 노동자들에게는 7전에 공급한다면서 나라가 손해를 보는 조건만큼 그 통제 또한 가관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쌀독의 쥐가 쌀을 먹기 마련이다"라는 말과 같이 배급을 공급하는 사람들은 간부 집 사모님들 아니면 성분이 좋고 당 간부들의 눈에 좋게 보인 여성들이 모두가 자리를 차지하고 지들 마음대로 퍼먹으며 호의호식하였다.

 

자기들은 3~4달분의 쌀을 앞당겨 집에 가져다놓고 자기와 연관된 간부나 친척들에게 아첨을 부리다 보니 100kg의 쌀이 배급소에 오면 70kg은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는 남은 쌀도 자기 집 쌀을 주는 것처럼 힘없는 노동자들을 무시하였다.

서민들은 하루 종일 등판대기가 타들어가도록 햇볕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노력해도 하늘처럼 바라보는 배급소에서는 개뿔도 먹을 것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주는 배급은 당당한 몫이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간신들에게 예의를 바치며 한 알이라도 가져가고 싶어 하는 곳이 서민들의 심정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배급소였다.

 

점점 배급소는 간부들의 양식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결국 서민들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도둑놈이면 그들은 강도였다. 그러니 오직 강도들의 것을 빼앗아 강도가 되어야만 그들의 착취대상이 되지 않았다. 

어쩜 배급소를 습격한다는 것은 북한 당국으로부터는 정치적성격의 범죄자로 되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당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나와 성철, 철호는 개도 잠든다는 새벽이라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시간을 이용하여 배급소 건물로 접근했다.

 

겁이 많은 철호를 철길 건너에서 망을 보게 하고  나와 성철은 일단 경비실문을 5mm철근으로 잠가 놓았다. 만약 안에 있는 경비원이 깨어나도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굴뚝을 타고 지붕위에 올라가 철호가 알려 준대로 공기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잠근 문까지 여는 데는 약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스라쳐 놀랐다. 50kg의 쌀 마대들이 산더미처럼 많이도 쌓여있었다. 이렇게 많은 양곡을 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주지 않는지 정말 의문만 갔다. 하지만 그럴 생각에 빠져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껏 지내왔던 모든 것이 또 7년 동안 군복무하며 쌓아놓은 공중 탑을 하루아침에 말아먹을 수 있었다. 일단 잡히지 말아야 하는 것은 초미의 문제였다.

 

나와 성철은 새벽 4시까지 약 15개의 쌀 포대를 부지런히 날랐다.  그러면서 절반을 나누어 배급소와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내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인민반장(통장)네 집과 또 다른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철호에게는 쌀 2포대를 주었다.

정신없이 쌀가마를 옮기다보니 땀은 온 몸을 적시였다. 그래도 긴장된 탓이라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인민반장네 집은 배급소에서 약 150m지점에 있었고 또 다른 집은 400m 지점에 있었다.

처음엔 두 집다 놀라운 눈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단히 기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 날은 귀신이 도왔는지 그렇게 땀 흘리며 정신없이 약 2시간이 움직였지만 하나의 돌발 상황도 제기되지 않았다. 늙은 경비원 내외도 1600킬로그램이나 되는 쌀이 도난 당하는 데도 정신없이 잠을 잤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만은 우리를 부지런히 쫒아왔다.

 

배급소 지붕위에 올라갔을 때만 하여도 총총한 별빛이 보이던 조용한 밤하늘이 4시가 조금 지나자 동이 터오듯 별빛도 식어가고 있었다. 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허리를 펴며 담배 한 대를 깊숙이 빨고 있을 때에는 벌써 올망졸망한 하모니카 주택들 여기저기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나와 성철은 성공의 기쁨을 안고 다시 체육조로 돌아왔다.  사실 배급소 습격으로 그날 밤, 우리는 한 잠도 자지 않았지만 기쁨에 겨운 마음으로 다음날 훈련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다.

 

그 후, 나와 성철은 쌀처리를 더욱 부드럽게 하였다. 일단 맡겨놓은 주인집들에 각각 두포대씩 주었고 나머지는 3일이 지나 장연-만포행 열차원인 내가 짝사랑하던 미선이에게 넘겨주어 먼 자강도 땅에다 팔아 줄 것을 부탁했다.

찹쌀이 약 400kg정도 되었다.

 

사건이 터져 수사가 진행되었다는 생각에 도저히 그 지역에서 처리 할 수가 없어 열차를 이용하여 먼 자강도 북부지역으로 가져가는 것이 어쩜 안정성이 담보된 첫 번째 이유였고 황해도 쌀 고장보다 조금 비싼 자강도 강계나 만포에 보내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본다는 두 번째 이유였다.

 

성철이와 나는 쌀을 팔아 손에 쥔 2000여원의 돈으로 술 100리터를 샀다. 그리고는 절반씩 나누어 자기 의사에 따라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나는 사단 지휘부 병기 과장에게 10리터, 대열과장에게 20리터, 지형학참모에게 10리터, 포탄창고 관리장에게 10리터를 뇌물로 주었다.

 

중앙대학에 가기 위하여서는 대열과장과 지형학참모의 힘이 필요하였고 노동당에 가입하지니 관리장과 병기과장의 힘이 필요하였다.

 

포탄창고는 해마다 2명의 입당수가 배정되었다. 그런데 사단 지휘부가 주관하는 입당대상은 직속상관인 관리장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병기과장이 관리장에게 압력을 넣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나 쌍수를 치는 것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서로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는 사단체육 조에 나와 배급소습격으로 하여 여러모로 좋은 결과만 가져왔다.

 

내 딴에는 그야말로 모든 일처리가 깨끗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마침 성철이도 제 나름대로 뇌물을 주었다.

 

우리가 습격해온 쌀을 받았던 주인집들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와 성철이를 자기 집 식구처럼 생각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푸짐히 대접하군 하였다. 또, 낙연 광산의 상황에 대하여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철호 역시 배급소가 습격당했으나 평상시와 같이 소문도 나지 않고 조용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쌀 중에 우리가 가져간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양이어서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배급소 습격에는 정권호를 개입시키지 않았었다. 이유는 성철이와 두 명이 하여서도 능히 해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튼 쌀로 술도 바꾸고 맡겨둔 주인집에 두 포대씩 주다나니 남은 것이 400kg이 전부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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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홍길동 ip1 2010-12-16 15:10:38
    참으로 고된 삶의 경험을 잘 봤읍니다.
    절절이 자세히 표현도 참 좋읍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암튼 안걸렸다니 다행이고 다음 호에도 계속 발각 안되길 바랍니다.
    백심님은 작은 홍길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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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사람7 ip2 2010-12-16 16:46:58
    저도 백심님의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 독자 일인 입니다. 북한에서 군생활 예기만 나오는데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쓰시는지요. 실화인 것 같은데 거이 한 편의 대박 무협지를 읽는 느낍니다. 남한에서 사셨으면 훌륭한 작가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한 번 도전해 보시면 어떠실지요? 한 번에 잘 안될수도 있습니다. 세계적 대박 소설 헤리포터도 12번이나 거절당했고, 나니아연대기도 37번인가? 백번 넘게 거절 당한 대박 작품들도 있으니 꾸준히 문을 두드리다보면 열릴 것입니다. 요즘은 지금 여기 올리시는 글처럼 인터넷소설이라는 것이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중 회원이 많은 사이트인데 참고하시고요. 바로 돈이 되진 않지만 꾸준히 독자들과 대화하며 만들어가다 인기있는 글이 되면 나중에 출판이나 영화로 만들어질수도 있다고 봅니다.
    http://cafe.daum.net/youllsosul
    신인 소설가를 발굴하는 대회도 여러 기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아래 정리된 사이트가 있어서 참고로.
    http://cafe.daum.net/ass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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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점 ip3 2010-12-28 23:30:46
    스릴이 넘쳐가고 있는데 웬지 불안한 느낌을 지을 수 없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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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서리 ip4 2011-01-27 01:12:01
    어쩜 그리 글도 잘썻는지 밤새는줄 모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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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6.15, 10.4선언을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