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지난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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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등교 3학년 때 서울 홓능에서 하왕십리 까지 걸어서 학교를 디닌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걸음으로 거의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청량리를 지나 용두동을 지나노라면 청계천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4~5년 후의 일이니까 여러가지로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였죠. 그 때 다리를 건너며 개천(하천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넓었음)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양쪽으로 판자집이 즐비 하였습니다. 그 판자집들이 얼마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집들의 경계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고 하천 바닥에 나무 기둥을 세워 집을 버티고 있었는데 발로 한 번 차면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싶으리 만큼 위태롭게 보였습니다. 그 판자집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각종 오물로 물은 언제나 시커먼 색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 오염된 물에 빨래하는 모습도 보였으니 그 때 청계천은 서울의 빈민촌의 대표적 존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초에 경제개발에 힘입어 복개공사를 하여 청계천 도로를 만들어 더 이상 개천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여러 곳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지금의 성남이라는 곳에 많이 이주해 갔었고 어떤 사람들은 서해바다를 메운 간척지로 집단 이주하여 넓은 소금땅에서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성공적으로 농사에 성공하여 지금은 넉넉한 공동 기업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이름이 두레~). 경제개발이 성공적으로 되어가면서 차량이 늘어나니 청계천을 복개한 도로는 서울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되어 밀려다니는 차량에 교통이 마비되자 1970년대에 고가도로를 놓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최초 고가도로가 되었습니다. 이 때 차가 고가도로를 지나가는 모습은 자동차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이 환상적으로 보여 모두 신기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계천도로 양쪽으로 영세민 아파트가 줄줄이 생겨나고 건설경기와 전자제품의 경기가 살아나면서 공구상가를 비롯하여 전자제품을 비롯하여 각종 없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다양한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이 생겨났고 아무나 물건을 사고 파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좀 더 흘러 도시가 너무 환경적으로 오염되고 각박하여 옛 청계천을 다시 살리자는 연구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서울 시장으로 있는 이 아무개씨는 서울시장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기치로 내 걸었고 당선 된 후 2003년 부터 공사를 하여 고가도로는 철거되고 오늘처럼 이렇게 청계천을 복원 시켜 놓았고 예전과는 달리 오염되지 않는 물로 서울의 환경은 한 층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내일모래 10월 1일이 완공식이며 물 개통식을 한다고 합니다. 혹 탈북자님들 보시게에는 북한의 좋은 풍경에 비교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 될지 모를지만 이 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참으로 의미있는 날이며 경제개발이며 우리의 사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짚어보는 반성의 날이기도 합니다. 분주하시겠지만 한 번 구경해 보시는 것도 이 사회를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남한에 서 죽 살아 온 사람들은 오히려 더 무관심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실향민을 부모로 둔 저로서는 여러가지로 그 동안의 어려웠던 시절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계천 9가에 있는 청계천 문화관에 가시면 전시관을 무료로 관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찾아 갖은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며 오신 분들께 앞으로 사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 청계천을 소개하였습니다. 청계천의 역사는 남한에서의 삶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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