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보니 취업난 … 미국 택한 이유죠
고향 회령이 그리울 땐 구글 어스로 봐요”
탈북자 지원단체인 링크의 LA 사무실에서 대니 리(앞)와 조셉 김이 구글 어스를 이용해 둘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을 찾아보고 있다. 미국생활 3년차인 이들은 페이스북으로 친구를 사귀고 휴대전화 문자가 오히려 편한 신세대 탈북자들이다. 하지만 ‘고향’인 북한을 그리워하며 자신들의 통일관을 밝히는 모습에선 굴곡진 그들의 삶을 느끼게 된다. 10대에 북한을 탈출해 폭풍 같은 청년기를 보내는 조셉과 대니는 각각 미국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일자리를 찾으며 차곡차곡 아메리칸 드림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조셉 김(20)은 3년 전 학교 미술시간에 나무를 그렸다. 나무는 그의 인생이다. 그림 속 꺾어진 나뭇가지는 부모를 잃은 것을 의미했다. 대신 가지가 많다. 친구들이다. 그의 나무는 키가 작다. 자신이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란다.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조셉을 만났다. 유튜브에 오른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서다. 동영상 속의 소년은 일반 탈북자의 모습과 달랐다. 너무 활기차게 축구공을 차는 모습이 마치 나이키 광고 같았다. 영상 밑에 붙어 나오는 자막만이 그의 과거를 알려주고 있었다. “내 이름은 조셉입니다, 저는 북한 사람입니다. 축구를 좋아합니다. 북한에선 축구를 하면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 인터뷰는 쉽지 않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셉은 다를 것 같았다. 글=LA중앙일보 김기정 기자
사진=LA중앙일보 김상진 기자
소년 김광진, 조셉이 되다
LA에서 남쪽으로 30분 거리의 링크(LiNK) 사무실을 찾아갔다. 링크는 탈북자들의 미국 정착을 돕고 있다. 조셉이 거기 있었다. 조셉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미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 중 한 명이다. 링크에 따르면 2010년 6월 현재 99명의 탈북자가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서 살고 있다. 조셉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16세까지 그는 김광진으로 살았다.
소년 김광진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두만강을 지척에 둔 중국과의 국경지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이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다른 곳보다는 경기가 활기찬 편이다. 하지만 회령 주민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다. 조셉은 “아버지는 회계 일을 하다 결국 굶어 죽었고, 어머니와 누나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혼자 남겨진 광진은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그만 뒀다. 고아가 되면서 이웃 노인들의 농사를 도우며 생활했다고 한다.
“고아로 4년을 살았어요. 빌어 먹어도 보고 도둑질도 했어요. 하지만 항상 배가 고팠어요. ‘여기 있으면 100% 죽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가자. 살 확률이 50%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6년 2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그것도 낮에 건넜다. 밤이 더 무서웠다. 밤에 건너다 잡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감시가 덜 할 것 같았다. 중국에서의 처음 한 달간은 북한에서보다 더 자유가 없었다. 중국 공안에게 잡힐까 봐 밖으로 다니기가 힘들었다. 생활도 쉽지 않았다.
“아무 집이나 찾아가 무작정 밥 한 그릇만 달라고 했어요. 한 집, 두 집, 세 집의 문을 두드리고는 포기해야 했어요.”
요즘에도 조금 피곤하면 악몽을 꾼다. 중국에 있는데 공안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 꿈이다. 깨어나 보면 베개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2007년 2월 15일 링크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왔다. 17세 때다. 김광진은 조셉 김이 됐다.
SAT만 없으면 낙원이죠
“내가 에세이에서 엠퍼사이즈(emphasize:강조)했던 건 북한을 탈출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된 과정과 문화적 차이, 내 꿈들이에요.” 미국의 조셉은 청소년이라 적응이 빠르다. 인터뷰 중간 중간 영어가 튀어나온다. 조셉은 버지니아의 위탁가정에서 미국인 양부모와 지낸다. 하지만 영어 발음은 아직 고칠 데가 많다.
“사전 하나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는데 발음기호를 읽을 줄 몰라요. 무조건 단어만 하루에 50개씩 외우고 있어요.”
조셉은 늦깎이 고등학교 3학년 생이다. 다른 청소년들처럼 대입준비를 해야 한다. 조셉은 여름방학 동안 SAT(대학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LA에 왔다. 링크에서 소개해 준 자원봉사자가 조셉의 학업을 돕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개인교습을 받는다.
“하루 두세 시간 자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에세이를 쓸 때는 한 시간도 못 잤어요. SAT만 없으면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점수가 1200점밖에 안 된다. 2400점 만점에 반타작을 하는 셈이다. 목표는 1800점 이상이다. 점수와 상관없이 하버드·예일대 등 최고 명문대에도 지원해 볼 생각이다.
조셉은 대학 지원 에세이에 농구 얘기를 적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던 조셉의 첫 시련은 언어도 이념도 아니었다. 농구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학교에서 농구를 했어요. 규칙도 모르고. 말도 못 알아듣고. 북한에서는 농구공을 딱 두 번 만져 봤어요. 친구들이 무시하듯 뭐라고 하는데 너무 속이 상했어요.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농구공을 사서 하루 2시간씩 연습했지요.”
같은 또래 아이들이 사춘기를 경험할 때 조셉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나도 모르게 예민해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누가 농담해도 짜증이 나요. 하지만 부모님이 모두 양부모라 (반항 같은 것을) 못 해요.”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불렀다
대니는 미국을 방문한 어머니(아래쪽) 덕분에 오랜만에 북한식 김치를 맛볼 수 있었다. 북한식 김치는 만드는 법이 다르다고 한다. SAT 공부를 위해 LA에 있는 동안 조셉은 링크가 제공하는 집에서 링크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곳에는 대니 리(23·리성)가 있다. 또 다른 탈북 청년이다. 대니는 오랜 만에 ‘북한식 김치’를 먹었다. 북한식 김치는 담그는 방법이 다르다고 한다. 엄마가 직접 담가 준 김치다. 대니는 3년 전 중국에서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대니를 따라 미국으로 오려 했지만 주중 미국 영사관 앞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는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 엄마가 지난 2월 대니를 보러 미국을 찾았다. 다시 만난 엄마와 샌타모니카 해변을 함께 걸으며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둘은 많이 울었다.
대니도 조셉처럼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다. 대니는 18세에 북한을 탈출해 중국 룽징(龍井)시에서 살았다. 선교사를 통해 링크를 알게 됐고 그 도움으로 미국 유타의 위탁 가정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은 같지만 조셉과 대니가 처음 만난 것은 중국에서다. 둘은 링크의 도움을 받아 북한으로 오기 전까지 중국에서 6개월을 함께 있었다. 탈북자들은 보통 중국 내 미국 영사관에서 4개월 정도 신분확인 과정을 거친다. 진짜 탈북자인지 확인하는 기간이다. ‘김일성 장군’ 노래나 북한의 최신 유행 가요를 불러 보라고 한다. 고향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물어본다. 대니는 북한에서 학교를 그만둔 사정을 얘기했다.
북한은 11년 의무교육제도가 있다. 하지만 대니는 8년 정도만 학교를 다녔다.
“교육은 무료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학부모에게 돈을 요구해요. 돈이 없으니 토끼가죽 같은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저는 그게 싫어서 학교에 안 나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