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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아래 인격 없다(옮겨 모셔온 글)
Korea, Republic o 배꼽아래거시기 0 788 2011-09-24 21:07:51

최고 권력자는 실제 모습과 관계없이 온갖 포장을 둘러쓴 채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검소함에 대한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그러한 포장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여론의 사정권을 벗어나게 되면, 국민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숱한 곳에서 인간 박정희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궁정도 안가일 것이다.
 
1. 3공의 요화 정인숙 사건 
 
본명 정금지(鄭金枝), 자유당 시절 대구부시장을 지낸 공직자의 딸. 대구 신명여고 졸업 후 문리사대(명지대) 중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오빠 정종욱의 총에 맞아 한강변에서 숨졌다.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 기록된 전현직 고관 및 재계인사는 20여명이 넘었고 정인숙이 남긴 3살박이 사내애가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이 사건은 결국 김계원 중앙정보부 부장이 직접 나서기 까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지만 당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의 가사가 바뀌어 '박의 소생'이라는 노래로 퍼질 만큼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육영수 여사는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대통령에게 들이대며 따졌다고 한다.(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2. 궁정동 안가
 
이렇게 사건화 된 여인관계 말고도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계는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통령의 사생활을 관리한 박선호(예비역대령, 중정 의전과장)는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80년 1월 25일 육군고등군법회의 증언에서 " 궁정동 안가에 박대통령은 한달이면 열 번이나 그곳에 왔다" 말했다.
박선호의 진술에 의하면 이 집은 암살사건으로부터 10년전인 60년대말 이후락(6대 중정부장)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통령의 특별한 안가로 사용되었다.
 
"박대통령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박종규만이 야행시간과 장소를 아는 '천기'에 속했다. 육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경호 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 체 모른 체 하고 넘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박대통령은 스태미나가 절륜했고 상대는 두세 차례 만난 뒤 꼭 바꾸었다. 그래서 교유 여배우 숫자가 많아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10?26  당시 박선호(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최후 진술) 
 
100여명에 가까운 연예인이 이곳을 다녀갔다. 세검정에도 비슷한 안가가 있었으나 청와대와의 거리가 멀어 궁정동이 주로 쓰였다. 잡지나 TV에서 대상이 선정되면 궁정동에서 가까운 내자호텔로 불렀다. 부르는 과정에 회유도 압력도 있었다. 예컨대 79년 10?26 당일 오후 5시 20분 가수 심수봉은 내자호텔 커피솝에서 대학생 모델 신양은 프라자호텔에서 각각 궁정동으로 인도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란한 여성편력은 육영수여사의 사후 한층 더 심해졌다.궁정도 안가에서는 사흘에 한번 꼴로 '대행사', '소행사'로 불리는 미녀파티가 열렸고 측근들 사이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경쟁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은 여성관은 당시 고위층들의 입에서 흔히 오르내리던 '배꼽 아래 인격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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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방 ip1 2011-09-24 22:01:0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머저리들은 자기가 머저리인줄을 모른다.
    아니 저 내용이 사실이라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거야?

    박정희가 김길태처럼 초등생을 강간했냐?
    싫다는 여성을 위협했더냐?

    머저라 좀 부ㄲ럽지 않으냐?
    이 세상 남자치고 다른여자 안아보지 못한건 너같은 머저리를 내놓고는 없어.

    돈과 권력을 쥘수록 여자는 더 꼬여.
    남자가 끌어 당기는 것도 있겠지만 ...또 여자들도 그런 남자들을 좋아하는거야.

    하기사 너같은 머저리야...일생동안 다른여자 배꼽 한번 못보고
    그렇게 죽은 사람 험담이나 하다가 썩어 지는거지.

    머저라 너ㅡㅡㅡ 장가는 갔냐?
    하긴 물어 보는 내가 바보지.
    저런버러지에게 어떤 여자가 가겠는가.

    남자가 남자 다워야 여자가 몸도 맡기는 법인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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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정경찰 ip2 2011-09-24 22:06:56

    - 민정경찰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9-25 17: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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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ip3 2011-09-25 02:19:46
    김대중 딸 SBS 보도 녹취 내용
    http://goo.gl/dBTVb

    김대중 딸 '어머니는 자살로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http://goo.gl/HpWPd

    김대중 딸 보호에 국정원 동원?
    http://goo.gl/BTn2n

    77세 김대중 처남 노인이 17세 소녀와 원조교제
    http://goo.gl/oSh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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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아 ip4 2011-09-25 05:04:22
    ★ 박정희(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 岡本實)의 구체적 친일 행적 열 가지 ★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이다. 친일부역의 정도에 따라서 A급, B급, C급 등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에게는 A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 친일파(A+)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저질적인 친일파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파쇼로 통치를 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나 경제전문가들에게서 긍적적인 평가의 대상조차 되기 힘든 박정희가 대중들에게 휼륭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며 그 문제점과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역류시키고자 글을 올린다.

    그 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글을 몇 편 올렸지만("너(박정희)의 가면을 벗겨주마 1∼8편" 등) 구체적 친일행적에 대한 글은 올리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친일분자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십팔년 간이나 통치하였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겨울공화국 같은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의 죄상을 묻지 않아도 친일행적 하나만으로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 죄인이다.

    "변신의 황제"였던 그는 결국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 즉, 다카키 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반전술, 변장술, 위장술, 둔갑술 등을 이용하여 천황주의를 완성하고 진짜천황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역겨운 구토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라!
    교사에서 군인으로ㅡ>조선청년에서 일본군 장교로ㅡ>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ㅡ>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ㅡ>오카모토 미누루에서 다시 박정희로ㅡ>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무기수에서 반공의 기수로,충성스런 장성에서 군사반란 두목으로,육군 대장에서 대통령으로.

    박정희는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며-- 그에게는 조국과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단지 "권력의 디딤돌"이었을 뿐이다.

    -. 민족과 반민족, 정의와 불의 따위 구분은 깡그리 무시하였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아무리 반민족이고 불의라도 권력으로 통하는 길만 보이면 돌진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기회주의는 그의 처세술이고 천황주의는 그의 사상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제 그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용 ]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있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6.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미국 정보의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십팔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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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ip3 2011-09-25 16:58:13
    이거 개발린지 10 년이 넘은 횡수인데 아직도 베끼는 애들이 다 있네 그려.

    뭐 장황하게 소설 쓴거 일일이 짚어주기 힘드니 몇개만 정리해주마. 우선 일본군 입대했으므로 친일이란 소리는 개소리의 정점. 가까운 경로당에 가봐라. 여전히 일본군 상좌 대좌였던 분들이 우글거린다. 그 분들을 친일파라 한다면 니들 대부분은 친일파 후손이 되는게다. 헌데 그런식이면 이 곳의 탈북 남성의 대부분과 상당수의 여성들도 군복무 경험이 있으니까 인민군, 친북파, 빨갱이라 불러야할까?

    육사 생도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참군인 김종오 장군 역시 일본 육사 출신. 적군의 탱크가 밀려오고 전투기가 하늘에 뜨는 세상이 됐는데 우리만 삽과 곡괭이로 싸울 순 없는게지. 그래서 현대전에 필요한 최신 군사지식을 탑재하고 훈련을 받은 엘리트 군인이 우리에게도 필요했던 것. 당시 우리 군에는 독립군 출신들도 있었지만 일본 육사출신 역시 많았는데 일본 육사 출신들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결국 이 분들이 목숨걸고 김일성과 싸워 이 나라를 지켜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데 이분들이 친일파면 니들은 친일파에 덕분에 빨갱이로 부터 목숨부지한 놈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시의 북한에도 일본 육사출신은 많았고 특히 북한의 공군은 대부분이 일본의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란건 알고있나? 북조선까지 실정이 이랬는데 우리가 우리를 친일파라 손가락질하면 이건 뭐 자학사관도 아니고 무슨 닭짓?

    참고로 인민군 공군 사령관 이활과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도 일제의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었단다. 북한군의 대공포를 맞고 엔진이 고장나자 적진의 탱크부대로 돌진해 산화한 우리 공군의 이근석 장군은 일본의 구마다니 항공학교 출신.

    지금은 욕만 처먹고 공중분해된 '열우당'을 놈현과 함께 창당했던 신기남이 애비도 일본군에 자원입대했지. 그게 들통나니 지 애비 무덤에 가서 울면서 "그런 분이 아닌데~~" 하며 통곡을 하더만 ㅋ 그 후로 신기남이가 친일파 타령하는걸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울러 열우당의 이미경이나 유시민 백부가 뭐하던 놈들인지 이 참에 조사 좀 해 볼것. 얘들 역시 친일타령 뚝! 하게된 것들이니까. 특히 열우당의 '동대문 큰 이모' 김희선은 독립투사의 딸이라고 구라치고 다니다가 악질 친일파 딸이란게 밝혀져 소송걸고 쌩 난리 ㅋ 조선일보가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친일행적 증거를 제시했더니만 조작이라 방방 뜨니 조선일보는 만약 조작이라면 모든 법적 책임을 질 것이고 해당 기자는 퇴직시키는 것은 물론 조선일보는 자진 폐간하겠다고 울트라 초강력 응수. 결국 직접 중국 쪽에 자세히 알아 보겠다던 김희선은 그 후로 아직까지도 잠수 ㅋ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 만들겠다며 소경인 권오석이가 동네 사람 불러다 놓고 손 만져 보고 대화 하며 손이 곱다는 이유로,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죽창에 찔려 죽게 만들었는데 권오석이가 누군지는 아냐? 권양숙이 애비란다. 권오석이는 공산주의를 끝까지 찬양하며 전향을 거부하고 감옥에서 죽을 정도로 골수 빨갱이였지. 빨갱이의 딸도 영부인 되는 세상이란다.

    독립군의 활동 추정지역과 박정희가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부대의 거리가 너무 멀었는데 당시 박정희와 함께 근무한 조선인들도 여럿 있었단다. 당시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분이다 (http://i.imgur.com/UwXeY.jpg) 이 분들의 증언이 교차일치하는 부분 중에 특기할 만한 내용은 바로 박정희가 부대 밖을 나갈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웃긴건 이 분들은 당시에 '독립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단다. 장교들 조차 독립군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는건 그 일대에 독립군으로 인한 전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있다하더라도 지하에 숨은 조직이었다는 뜻인게지 그런데도 무슨 얼어죽을 독립군을 토벌했다는둥 독립군 토벌만 하면 기분 좋아했다는 둥 판타지 소설 쓰나? 부대 밖에 나갈 일도 없는 사람이 무려 110회나 토벌을 해??? 아놔 ㅋ 심지어 워싱턴大에서 김일성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 받은 극좌빨 교수 한홍구 조차도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소리는 근거가 없는 것이니 이런 억지주장만은 제발 하지 말라고 할 정도다. ㅋ

    그나마 최근에 다시 쟁점이 됐던게 '진충보국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박정희가 썼다는 것이었지. 대를 이어 빨갱이짓을 하고 70년대 최대 지하혁명 공산 조직이었던 '남민전' 사건을 주동해 무려 10여년을 복역했던 임헌영이가 대표로있던 '민족문제연구소'가 어느날 갑자기 박정희 혈서의 증거를 일본에서 찾았다는게야. 그래서 박정희 혈서 사본을 들이대며 언플하고 난리를 쳤는데 정작 원본이 어디있는지 출처가 어딘지를 아직까지도 못밝혀 ㅋㅋ 역사적 증거자료가 될 수 있으니 원본의 성분 분석등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의 어느 대학 어느 도서관인지 아니면 어느 수집가가 소장하고있는지라도 밝혀달라는데도 모르쇠로 일관 ㅋㅋ 결국 조작질이나 하고 앉았다는 비난이나 듣고는 쑥 들어가버렸지.

    자 여기까지는 형이 아는 것을 직접 기술한 것이고 니가 퍼온 글은 이미 수 없이 개발린 내용이므로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되겠다.

    http://cafe.naver.com/bebemori/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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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국사 ip5 2011-09-25 09:38:30
    역사를 보면 훈구나 사림이나 똑같았다는 것을 알수가 있지 박정희나 김대중이나 똑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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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을써라 ip6 2011-09-25 09:44:22
    병신 개대가리들아,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10년 좌파정권동안 왜 그것을 들춰내지 못했다냐? 박정희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몰아붙이던 정의로운 놈현씨는 막강한 대통령이라는 벼슬을 갖고 왜 못 밝혀냈냐?
    제3의 김대업이를 만들고 싶은가보네.
    사기꾼 좌빨새키들. 너네 그 김씨들 족보 유명하잖아.
    김대업이 김경준이 .....
    평소에 가만 있다가 대선이나 중요한 선거때면 나타나는 좀비같은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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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피4 ip7 2011-09-25 09:51:45
    아주 소설을 옮겨왔구나.
    그래서 박통이 항일운동가 수십/수백명을 어찌어찌했다는 것까지 부풀리고 조립해야 좀더 그럴듯 한데~
    어쨌거나 혼자 부르고/쓰고 고생많다.

    퀴즈다!!
    요것 잘 하면 북한에서 열리는"빨간 골든벨"에 너를 보내주마~

    이조500년 내내 한민족은 배고프고 굶어죽는 아사자가 끊이질 않았다.
    한민족역사에 배고픔을 처음으로 없앤 임금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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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어울프 ip8 2011-09-28 23:28:46
    발제자 놈의 사고로 평가하자면 뇌물현이야말로 유신의 앞잽이가 아니더냐? 유신법으로 판사했고 판결을 내렸으니...

    개같은 반역자 새끼들... 그 시대 안 살았다고 주둥이를 나불대는군

    일제시대 때 배운 기술, 거대한 군사조직을 대한민국 발전에 썼으면 그 사람의 과를 면하고도 남는다 슨상족, 노빨족아

    니들이 말하는 친일파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 안들어가 있어. 왜 고종과 순종은 빼냐?

    최고사령관이 항복했는데,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몰아대는 꼴을 보자니 좌빨들의 대가리는 어떻게 된 건가?

    사람잽이 좌빨통족들... 그 당시 창씨개명 안 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발제글을 쓴 놈의 할배도 창씨개명을 했으니 이놈도 친일파의 후손이로고...

    누구 말대로 김연아가 금메달 딴 것은 보여주지 않고 엉덩방아 찐 것만 과대포장해 인신공격하는 것과 같은 비열한 짓을 일삼는 것들이 후레인간 수구좌빨들이다.

    박정희가 이룩한 국가조직 과정과 성취는 모조리 지우고 독재자와 친일파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반역자의 말에 혀를 짤라줘야 말을 못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추악한 범죄행위인가? 좌빨들은 친일파보다 수억배 죽일 인간들이다. 이 개명천지에도 하는 짓거리들을 보라~ 선동과 거짓말, 파괴를 일삼는 역사의 퇴보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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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어울프 ip8 2011-09-28 23:31:52
    제대로 된 역사를 공부했으면 사림파 후예들이 우리 조국을 망쳤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비론으로 살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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