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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교사③-점수를 뜯어먹고 과외로 살다 (43)
United States 돈이주의 0 380 2012-05-24 05:48:32

북한의 교사③-점수를 뜯어먹고 과외로 살다 (43)

by 주성하기자   2010/04/05 5:58 pm

(앞글에
이어)

 

그랬던
황 선생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변했다.

 

돈이
없으면 대학은 물론 중학교조차 다니기 힘든 실정에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칠 이유가
사라졌다.

 


선생 반에서 10명 이상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처럼 가난하면 공부할 의욕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라는
것을 내지 못하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기 때문에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국제사회가
지원한 과자를 배급받아 먹고 있는 학생들. 첫번째 학생의 팔에 달려 있는 것은
‘간부표식’이라고 불리는 북한 소년단 학생 간부 계급. 줄 하나에 별 셋은 7~8명
정도를 통솔하는 반장, 줄 2개에 별 하나(사진)은 학급 위원(한 개 학급에 대개
학습담당위원, 위생담당 위원, 꼬마계획 담당 위원 등 4~5명이 있음), 줄 2개에 별
2개는 학급반장(학급에 1명), 줄 3개에 별 3개는 소년단 위원장(학급에 1명), 줄
3개에 별 1개는 학교 소년단 위원, 줄 3개에 별 2개는 학교 소년단 부위원장, 줄
3개에 별 3개는 학교 소년단 위원장이다. 이렇게 간부가 많기 때문에 한개 학급 절반은
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도 먹고살기 위해 학부모들에게 손을 내민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년
학급 편성이 달라지는 한국과는 달리 북한은 중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 구성이
달라지지 않는다. 소학교도 마찬가지다. 한번 같은 반이면 졸업할 때까지 같은 반이고
학생과 담임도 6년을 함께해야 한다.

 

6년이면
담임과 학생, 학부모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진다. 그러니 좋은 학부모를 만나면 담임은
6년간 행복하다. 반대로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학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교원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자식을 학교에 안 보내고 장사를 거들게 하는 학부모 중에는 담임이 눈 감아주는
것이 고맙다고 이따금 뭘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갈 수만 있다면 황 선생도 도시에 가서 교원을 하고 싶다. 도시 교원들이 농촌 교원에
비해 좀 낫기 때문이다. 특히 제1중 교원이면 더욱 좋다.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초기에는 농촌 교원들이 좋았다. 적어도 도시에서 교원을 하는
황 선생의 사촌동생처럼 장마당에 나가 앉아 국수장사는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당시엔
도시 교원 중에 수업을 마친 뒤 장마당에 나가 부업을 하는 교원이 많았다.

 

이때
교원들이 손쉽게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국수장사였다.

 

북한엔
전기도 귀했기 때문에 옥수수를 가공해 먹기가 쉽지 않다. 군수공장 같은 곳은 그나마
다른 곳보다 전기 공급 사정이 나았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공장의 방앗간에
가서 국수를 만들어 내다 팔거나 장사꾼에게 넘겨주었다.

 

국수장사는
밑천도, 돌아다닐 시간도 없는 선생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사였다.

 


선생 사촌동생도 처음에는 매우 수치스러워했지만 점차 뻔뻔스러워졌다.

 

나중에
황 선생이 어쩌다 놀러가서 걱정해주면 “이게 내 탓입니까, 국가 탓인데”하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학생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처음엔 학부모나 학생들은 장마당에서 선생을 보면 피해
달아났다. 하지만 점차 심부름 나온 학생들까지 스승에게 가서 국수를 사주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선생을 돕는 게 낫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이는 선생들이 국수장사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장마당에 있던 선생들이 사라졌다. 시장경제가 고착되면서 이제는
선생들도 장마당에 나가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부업거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사촌동생은 과외선생으로 변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도시에서 과외 붐이 일면서
도시 교원들의 살림 형편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소학교에서 12개 과목을, 중학교에서 23개 과목을 배운다. 이 중 대학입시 과목은
김 부자 가문의 혁명력사, 문학, 외국어, 수학, 물리, 화학으로 모두 6개 과목이다.
체육시험도 치긴 하지만 별 의미는 없다.

 

북한의
교과서. 종이가 없어서 폐지를 재가공한 이런 낡은 종이에 인쇄했는데 학생들이 선배에게서
넘겨받아 사용한다. 하지만 한 학년을 지나면 보풀이 일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어
덧글을 쓰면서 배운다. 기자가 학교를 다니던 20년 전부터 김 부자 과목을 내놓은
다른 교과서들은 종이가 저랬다. 물론 지금은 다 그렇다고 한다. 저런 교과서라도
지방에 가면 학생 10명에 1개가 차례질까 말까해서 다른 학생들은 교과서를 장마당에서
사든가 또는 필사해서 사용한다. 위에 조선화구라고 쓴 것은 장마당에서 파는
도화공작용 수채화이다. 한국에 오니 교과서가 너무 좋았다. 교과서가 좋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과목을
가르치는 교원의 인기는 높다. 이제는 과외시장에서 선생의 능력에 따라 평판이 엇갈린다.
유명 교원에겐 학생이 몰린다. 이는 도시만의 일이다.

 

물론
농촌에도 아주 적극적인 학부형이 나타나면 예외적으로 과외선생 자리가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도시에선 시장 가격에 따라 합당한 대가가 돈으로 계산되지만 농촌에선 선생님의
노고에 답례하는 형식으로 양곡 위주의 현물이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현물을 얼마나
줄지는 학부모의 마음에 전적으로 달려있지만 대체로 도시 가격보단 훨씬 못하다.

 


선생의 사촌동생은 화폐개혁 이전에 매일 저녁 2시간가량 수학을 가르치고 1인당
월 3만원을 받았다. 이는 쌀 15㎏ 정도 살 수 있는 큰돈이다. 학생 3명만 가르쳐도
사촌동생의 가족은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과외선생
중에도 여러 과목을 한꺼번에 가르칠 수 있는 소위 ‘다과목 선생’의 인기가 높고
가격도 비싸다. 반면 암기 위주의 ‘혁명력사’나 ‘문학’은 과외 수요가 없다.

 

그래도
대학에 가려면 이 과목도 점수가 좋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점수를 가지고 농간을 부린다. 그래서 북한엔 “사회과학 선생은 점수를 뜯어먹고
자연과학은 과외로 산다”는 말이 있다.

 

물론
당국에서는 선생들의 과외를 엄격하게 통제하려 하지만 퇴근 뒤에 가정집에서 이뤄지는
과외를 적발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통제해야 할 간부들부터 자식들을 경쟁적으로 과외를 시키기 때문에 이를 근절하기는
매우 힘들다.

 

예전에는
성적이 뒤떨어진 학생은 당연히 늦게까지 개별지도를 해야 하는 줄 알고 있던 ‘공산주의
교원’들이 이제는 모두 변했다.

 

아직도
그런 교원이 있으면 깨지 못한 미개한 사람이란 시선을 받기 쉽다. 북한의 과외시장은
점점 확산되는 양상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또는 제1중이나 수재학교를 가기
위해 모두들 과외선생을 찾는다.

 

그러면
대학을 뇌물로만 갈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불가능하진 않지만 좋은 대학일수록
실력도 중요하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300~500달러의 뇌물이 오가고 김일성대처럼 최상급 대학의 경우 수천달러가
오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한다는 바탕에서 그렇다.

 

어차피
좋은 대학 입시는 간부 자식들끼리 경쟁이기 때문에 실력 없이 돈으로 가려고 하면
탈이 나기 쉽다.

 

그래서 무턱대고 막대한 뇌물을 쓰기보다는 그 돈으로 차라리 가정교사를
고용해 자녀의 학력을 높이는 것이 훨씬 ‘싸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대학입학
경쟁은 2000년 초반 병역제도가 바뀌면서 매우 치열해졌다.

 

북한에서
간부로 성장하려면 군에 다녀와서 노동당원이 되고 대학을 나오는 3대 ‘징표’를
갖추어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징표를 갖추는 데 보통 군 복무 10년, 대학 4년을 합해 14년이 걸렸다.

 

2005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대학생 상봉모임 개막식에 참가한
북한 학생들. 남한 대학생들과의 만남이라고 사상적으로 투철한 10년 씩 군 복무한
제대군인 출신 대학생들을 뽑아 내보내다 보니 북한 남성 대학생들은 보다싶이 얼굴이
30살 넘은 ‘노땅’들이다. 이런 학생들은 단지 자격증이 필요해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대학에 와서도 공부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군에서 노동당원이 되고 대학을
나와야 간부가 돼도 고속승진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먼저 가면 군에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간부가 자식들을 먼저
군에 보내려 했다.

 

그런데
바뀐 병역제도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자원할 경우 군에 5년을 복무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예전에 14년이 걸리던 코스가 대학을 먼저 가는 경우 9년으로 무려 5년이나 단축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대학 4년 졸업 후 군복무는 3년만 해도 된다. 병역제도가 바뀌면서 북한 간부
선발 기준에 ‘군 복무를 최소한 3년 동안 한 자’라는 구절이 명시됐기 때문에 3년은
간부기준을 갖추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또한
자녀를 먼저 대학에 보내면 중학교 졸업 후 4년간 집에 끼고 있다가 다 성장한 21세에
군에 보낼 수 있기 때문에 한창 자랄 나이인 17세에 군에 가 발육에 지장을 받는
현상도 없앨 수 있다.

 

바뀐
병역제도로 인해 대학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지만 대학 입학 정원은 크게 늘지 않았다.

 

2002년
북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 전국의 1개 학년 학생수는 평균 40만명이었다. 반면 대학은
2년제 전문학교까지 다 합쳐봐야 한해 입학생 숫자가 8만명에도 못미친다.

 

8만명
중에 절반 정도를 제대군인으로 보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 있는 인원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추산이 나온다.

 

참고로
2008년 통일연구원이 남한 입국 탈북자 1만3760명을 조사한 데 따르면 대학 이상
학력은 7.6%, 전문학교 졸업은 7.1%에 불과했다.

 

대학
폰트가 주로 제1중에 집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 중학교 학생 100여 명 중 대학에
가는 학생이 다섯도 채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니
모두들 제1중에 가거나, 바늘구멍 통과하기처럼 어려운 대학 입학 폰트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과외에 매달리는 것이다.

 

더구나
몇 안 되는 인기대학을 가려면 재력과 함께 실력도 출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외전쟁은 다 도시의 일이고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의 전쟁일 뿐이다.

 

농촌
학교는 재력과 실력 모두 도시와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행복중학교에는
남성은 군 제대 후 농장원으로, 여성은 곧바로 농장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꿈을 잃은 학생들만 가득하다.

 


선생은 이제 학생들에게 “장군님과 당에 충성을 바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마 곧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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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이면다야 ip1 2012-05-24 05:51:40
    솔직히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북한의 대학의 학력을 신뢰할 수 있을가? 돈안내도 공부하는 중고등학교는 어차피 무료에 의무로 다니니까 중고등학교 학력은 인정해줘도, 북한에서 대졸이나 박사 준박사를 남한에서 인정할 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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