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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김일성이 낳은 민족의 고질적 고난
United States 우뢰수 0 302 2012-06-10 09:28:30
가짜 김일성이 낳은 민족의 고질적 고난 김일성을 알기 전에 북한을 말 할 수 없다  
이명산 북한전문가


가짜 김일성,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우리는 북한을 말 할 수 없다

가. 20세기는 우리민족의 시련기 (試鍊期)

우 리민족은 일제 식민지 통치 밑에서 36년간의 고난에 시달렸고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공산주의사상으로 역사상 가장 심각한 시련을 겪어야했다. 거의 1세기동안 지구상에 돌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공산주의사상은 그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문명을 파괴했고 우리의 북한은 아직도 그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1919년 독립만세 사건이후 좌절과 실의에 빠진 우리민족에게 역사의 악순환으로 공산주의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푸로레타리아 해방, 약소민족의 해방” 같은 구호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1925년에 드디어 서울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조직되었고 이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념적 구조나 이론을 이해하거나 소화하지도 못한 채 오직 투쟁의 구호와 행동방침만을 앞세우고 뛰어 들었다.

불 과 3년 내에 일본의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와해가 되고 8.15 해방 때까지 재건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국내에서 지하로 들어갔고 그 주역들은 박헌영, 오기섭, 주영하, 이강국, 김삼용, 이주하, 이승엽, 허성택 (朴憲永, 吳琪燮, 朱寧河, 李康國, 金三龍, 李舟河, 李承燁, 許成澤) 등이었다.

한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에 가입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中國共産黨)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中國共産黨 滿洲省委員會) 산하 각급 조직에 가입했고 그 이후로 만주에서는 한인들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이 영원히 사라졌다. 국내에서는 지하에 들어갔던 공산당이 8.15 해방 후 박헌영 (朴憲永)을 주축으로 재건되었고 1946년 11월에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 -南勞黨)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민족은 국내 국외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특히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의 독립투쟁은 3.1 민족봉기를 계기로 새로운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후세에까지 그 용명을 떨쳤던 사람들로는 만주에서는 김좌진(金佐鎭)장군, 홍범도(洪範圖)장군,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김일성(金日成)장군을 거론할 수 있다. (이때의 金日成장군은 본명이 金光瑞이며 북한의 金日成이 아닌 별개의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겠음.) 지금부터 이 글에서 언급되는 김일성은 애국투사 진짜 김일성인 金光瑞가 아닌 가짜 김일성이고 북한의 김일성(본명 金聖柱)도 그 가짜 김일성 중의 한 사람이다.)

만주에서의 항일무력투쟁(抗日武力鬪爭)은 수십만의 한인동포들을 기반으로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군부대가 활동했으나 그들 대부분이 상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산하의 군대임을 표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민족주의자들의 항일투쟁은 고난에 찬 가시밭길이었으며 내외의 역사적 정치적 여건에 따라 여러 형태의 도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일은 1925년 전후해서 중국의 한인사회에 공산주의운동이 침투되어 <조국광복을 일념>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세계 공산화> 내지는 <중국공산화>를 궁극목적으로 하는 공산주의혁명노선과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만주지대에서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중국본토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으로 행동무대를 옮겼으나 당시의 역사적 여건은 너무나 복잡했다.

1930년 전후해서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활발해진 중국공산당의 세력은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정부(國民政府)로 하여금 새로운 대공전선(對共戰線)을 형성하게 했고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 땅을 강탈함으로 중국의 항일투쟁은 너무 힘에 겨웠다.

그 러나 1943년 11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수상 처칠, 그리고 중국총통 장개석이 합의한 대일 전략선언(對日 戰略宣言)은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自由 獨立國家)로 일제(日帝)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이것이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첫 번째의 역사적 공약이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는 장개석 총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깊은 교감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집요한 항일독립투쟁의 결실인 것이었다.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책임자였던 이승만(李承晩)은 미국에서, 김구, 이시영, 김규식, 이범석, 이청천, 조소앙, 신익희, 김홍일, 최용덕 (金九, 李始榮, 金奎植, 李範奭, 李靑天, 趙素昻, 申益熙, 金弘壹, 崔用德)등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 요인들이 수 십 명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 들의 항일투쟁 전통과 정신이 1948년에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 (大韓民國)에 계승되었으며 인적 요소라든가 국호(國號)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기미년 3.1운동으로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재건> 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렇듯 선열들의 고귀한 피와 불굴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UN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탄생했다.

나.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내에서는 국민정부나 중국공산당 모두 항일무력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33년부터는 중국공산당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조직했고 많은 한인 공산주의자들도 가담했다.

1936 년에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칭개편 되었고 제1로군 (第1路軍)은 동남만주(東南滿洲)에, 제2로군(第2路軍)은 동북만주(東北滿洲)에 배치되고 제3로군(第3路軍)은 북만주(北滿洲)를 작전지역으로 했는데 총 병력은 약 2,000명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군율(軍律)이나 기강이 없었고 중앙보급이 없었던 관계로 산림지대에 야영(野營) 하면서 결국은 항일투쟁보다는 인민약탈이 더 빈번하여 인민의 적으로 전락하고 1940년경에는 동북항일연군이 붕괴되어 약 300명이 남아서 소련(蘇聯)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외에도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한 줄기는 중국 국민정부 관할지역인 화북(華北)에서도 발생했는데 연안(延安)에 있는 중국공산당의 한인 간부들 중심으로 1941년 1월에 조직된 화북 조선청년 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가 바로 그것이다.

이 조직은 1942년 7월에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발전했고 조선의용군은 한인들을 규합하고 중국공산당의 제8로군(第8路軍) 산하 각 부대에 배치되어 직접 항일투쟁에도 참가하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의 항일투쟁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해 아주 소규모에 그치나 동북항일연군 계열의 활동보다는 역사적으로 인정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면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연안파(延安派)라고 하고 연안파의 주역들은 김두봉, 무정, 최창익, 허정숙, 김창만 (金枓奉, 武亭, 崔昌益, 許貞淑, 金昌滿) 등이며 그들은 해방 후 북한에 들어가 북한정권 수립에 동참했으나 후에 북한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계열의 업적을 부각하고 역사를 날조 미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다른 계파들, 즉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갑산파 (延安派, 蘇聯派, 國內派, 甲山派)를 반당종파(反黨宗派)로 몰아 모조리 숙청했다. (1953년 봄에 국내파 박헌영 이승엽등을, 같은 무렵에 소련파 허가이 박창옥 등을, 1956년 여름에는 연안파의 김두봉 최창익 등을, 그리고 1967년에는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朴金喆 李孝淳) 등을 숙청했다.)

다. 동북항일연군과 보천보전투 (普天堡戰鬪)

1936년에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칭개편 되고 예하 제6사(第6師)의 사장(師長)이 한인 김일성(金日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金日成은 북한의 金日成이 아닌 또 다른 가짜 김일성이다.)

그 당시의 성명서나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공산당의 지휘 하에 있던 그들의 목표는 일제를 몰아내고 동북실지(東北失地)를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코민테른> 지령에 의한 국제공산주의노선이나 중국공산당의 배일정책에 더 보조를 맞췄고 조선의 독립이나 민족해방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거의 한인만으로 구성된 第6師같은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일종의 외인부대(外人部隊)에 지나지 않았다.

第6師는 장백현(長白縣) 오지에 밀영(密營)을 두고 활동했다. 문제의 김일성 부대(第6師)는 항일투쟁보다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장백현(長白縣) 일대와 갑산군(甲山郡) 일대에서 주로 한인농촌을 기습하여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으며 공산당 특유의 극단적이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특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나 주장은 무조건 적으로 취급하고 무자비한 투쟁의 대상이며 적과 대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잔인무도한 폭력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적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는 “지주(地主), 부르조아, 지식인,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국가”등등이며 심지어는 항일투쟁에서도 계급혁명이나 무산자 국제주의노선에 반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상목표>로 투쟁하던 민족주의자들도 적으로 간주했다. 그 예로 1930년 1월 24일 민족주의 항일투사이었던 김좌진(金佐鎭)장군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투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들의 길을 갔고>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나라는 분단의 비극과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체험을 해야 했으며 아직도 고난을 겪고 있다. 특히 보천보(普天堡)와 그 일대의 한인 동포들을 공포와 비탄 속에 몰아넣었던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襲擊事件)의 자초지종은 아래와 같다.

1937년 5월 21일 동북항일연군 소속 第4師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甲山郡 普天面 胞胎里)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을 기습하여 대대적인 약탈 납치를 자행한 사건으로 국경일대의 일본경찰은 총동원하여 第4師 부대 추격에 나섰다. 보천보작전을 위하여 사전에 현지답사를 끝내고 작전준비를 해 두었던 김일성은 (이 사람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상흥경수 사건 때문에 보천보에 치안공백이 형성된 틈을 이용하여 1937년 6월 2일 대원 약 90명을 거느리고 밀영을 떠나 다음날 밤에 강을 건너 보천보에 접근, 6월 4일 밤에 대원들을 6개조로 편성하고 부락의 전화선을 절단한 후 기습을 감행했다.

당시 보천보는 한인 280여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 합계 300여호의 면사무소 소재지이며 주재소(경찰 파출소), 보통학교(초등학교), 소방서, 우편소 등이 있는 비교적 큰 부락이었다. 30분가량 집중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170발등과 기타 물품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등을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교, 우편소등을 방화하고, 시가지에 들어가 주택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 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 등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기습 한 시간 후에 철수했다.

第6師가 항일전투부대라면 당연히 일본의 관서나 일본의 경찰이나 군부대등을 상대로 작전을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절대로 동포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일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 (순경)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순사의 2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죽고,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과 주재소 무기를 탈취한 것 외에는 피해자가 전부 우리 한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작전 목적이나 방법이 물자 약탈이지 항일전투가 아니었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1937 년 8월 23일에 김일성 부대는 만주 임강현 5도구(臨江縣 5道溝)에 있는 채목장을 습격하여 인부 5명을 납치했고, 9월 3일에는 갑산군 운흥면 중평리(甲山群 雲興面 仲坪里)에 있는 광산 3개를 털고 사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보천보사건과 그 후 잇단 약탈 사건으로 혜산경찰서 (惠山警察署)는 第6師에 대한 비상경비태세에 들어갔다.

김일성과 내통하는 국내인사들을 색출하고 권태국, 김석태, 조신제 (權泰國, 金錫泰, 趙信濟)등을 체포하여 정보를 수집한 후 혜산경찰서는 60명의 특별 수사반을 조직하여 장백현에 파송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조직망 11명을 체포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된 162명, 장백현에서 60명, 도합 222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9월과 10월에 박달, 김성연, 이용술 (朴達, 金成演, 李龍述)등 279명이 더 체포되고 1-2차 검거에서 체포된 자가 도합 501명이나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 혜산사건 (惠山事件)이라 한다.

혜 산사건 피의자들의 (權永壁, 李悌淳, 朴金喆, 馬東熙, 朴達) 심문조서에는 국경지대를 소란케 하던 第6師長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당시에 나이 36세(1901년생) 이었고,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으로 되어있다. 이 사람은 절대로 북한의 김일성 (1912년생)과 동일 인물이 아니다.

보천보 사건이 있은지 5개월 후 1937년 11월 13일 그가 만주의 무송현 양목정자(撫松縣 楊木頂子)라고 하는 밀영에서 부하 약 100명과 함께 휴식하고 있을 때 일본의 만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전사했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는 항일연군측이 회수하지 못했고 인근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京城日報) 조간 7면에 그의 사망기사가 “공산비적 김일성(共産匪賊 金日成)이 사망, 조만국경지대 주민들이 이제 근심을 덜었다”고 보도되었다.

라. 또 한사람의 金日成

김 일성의 죽음과 혜산사건으로 위축된 第6師는 밀영을 옮기고 1938년 봄에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다. 새로 취임한 사장도 한인으로서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계승하여 김일성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건재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가 첫 번째로 일으킨 대 사건은 1938년 4월 26일 임강현 제3구 5도구(臨江縣 第3區 6道溝)의 습격이다.

타 부대와의 합동작전으로 약 500명의 병력과 경기관총 6정으로 시가지에 침입하여 물자 약탈 작전을 자행했는데 일인 2명과 중국인 1명이 즉사하고 주민 51명이 납치되었고 많은 양의 현금과 식량이 약탈된 큰 사건이었다.

그 무렵 동북항일연군은 주로 물자 약탈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1939년 초 제1로군(第1路軍) 산하 제1.2군이 제1.2.3 방면군(方面軍)으로 개편되었다. 제2로군(第2路軍)은 대체로 괴멸 상태에 빠졌고, 제3로군은 1940년에도 북만주에서 끈질기게 출몰했고, 지1로군도 동남만주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이와 같이 편제가 바뀔 때 第6師長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第2方面軍長)으로 승진했다.

1939년 봄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도 각처의 부락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그 중에서도 1939년 5월 3일 밤 2백여 명의 병력으로 장백현의 한 부락을 습격했을 때 만주국 경찰과 4시간 교전하여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경관과 주민 약 40명이 살상되었다.

그때 김일성 부대도 손실이 컸으며 특히 제2방면군 여자청년부장 이었던 김일성의 처 김혜순 (金惠順)은 부상을 입고 부대에 돌아가지 못하고 밀림 속 산가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 6일에 체포되었다. (朝鮮日報 1940년 7월 5일자 제1석간 2면에 체포기사가 실렸음.) 金惠順과 기타 체포된 대원들의 진술에 의하여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어릴 때 간도 용정 (間島 龍井)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를 다녔고 1930년 5.30 간도폭동사건 때에는 행동대장 이었으며 소련 사관학교 출신이고 당시 나이는 34세(1906년생)라고 밝혀졌다. (이 사람도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일만 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동남3성(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에서 치안숙정공작(治安肅正工作)으로 공비섬멸작전을 실시했는데 그 지역에서 준동하던 약 3천여 명의 항일연군 병력이 전멸되었다. 1940년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관 楊靖宇가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휘관이 죽었고 병력이 괴멸되었다.

그 때의 전과기록을 보면 유기된 시체만 해도 1,282구, 투항자 1,040명, 체포 896명, 파괴된 병영이 2,923개나 되었다. 그러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살아남아서 1940년 12월 말에 패잔병 20여명을 이끌고 소련원동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 중에서 제2.3로군 패잔병은 <하바롭스크> 야영지에 수용되었으며 제1로군 패잔병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오케얀스카야> 야영지에 수용되었다.

총인원은 양쪽 다 합해서 약 300명이었다. 김일성은 도착 후 <오케얀스카야>에서 얼마 후에 병사했다. 소련은 먼 안목으로 동북항일연군 패잔병들의 장차 이용가치를 계산하여 저들을 받아들였고 각종 훈련까지도 실시했다. 그들 중에 한인은 약 100명 정도이었다. 해방 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 한인들을 약 60-70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의 약 반은 최용건, 김책, 최현 (崔庸健, 金策, 崔賢)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고 약 반은 소련태생 2세들인데 허가이, 박창옥, 기석복, 남일 (朴昌玉, 奇石福, 南日)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들과 소련에서 자란 한인 2세들과 화북에서 돌아온 연안파 계열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북한의 공산정권을 수립할 때 앞에 내세울 민족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인정받는 소련원동지방에서 항일투쟁 하던 김일성 장군(본명 金光瑞)이나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연군의 김일성이면 좋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소련에서 데리고 온 33세의 새파란 청년 김성주(金聖柱 1912년 생)에게 김일성장군이란 이름과 호칭을 붙여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지금의 모란봉경기장)에서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를 김일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중들의 생각에는“김일성장군은 김좌진장군이나 홍범도장군의 동년배로서 60전후의 노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주둔 소련군은 <치스챠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단 이었으나 모든 정치공작은 <로마넹코> 정치사령부가 담당했다. 청년 김성주에게 김일성장군의 탈을 씌워 <로마넹코> 정치사령부에 추천한 사람은 연해주지구 경비사령관 <스티코프> 장군이었다. <스티코프>는 김성주(金聖柱)가 <오케얀스카야> 야영에서 4년 반 이상 생활할 때 이미 그를 지켜봤고 한인들 중에서 비교적 지도력이 있으며 외모가 가장 준수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바로 <김성주> 이었던 것이다.

<스티코프>는 소련군정 시기에 평양에 있었고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 집행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대표로 있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남북한 분단이 불가피하게 되어서는 평양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눌러앉아 이 가짜 김일성(金聖柱) 중심의 북한정권 수립에서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마. 북한의 金日成은 누구인가

그러면 북한의 김일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며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平安南道 大同郡 古平面 南里 萬景臺)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와 조부 김보현(金輔鉉)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 김형직(金亨稷)은 (1894년생) 신식교육을 받았고 평양에서 숭실중학교 (崇實中學校)를 다니기도 했다. 집안이 어려워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18년에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1919 년 5월에 다시 만주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으로 이주하여 한의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후에 다시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로 이주하여 한의원을 개업하고, 고향 외가에 맡겼던 아들 성주를 데려다가 八道溝小學校에 넣었는데 1923년에는 무슨 이유로 그를 다시 고향에 보내 외가 마을에 있는 창덕학교(彰德學校)를 다니게 했다. 그리고 1925년 봄에 성주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때 김형직은 長白縣 일대에서 유력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또 長白縣 서쪽에 있는 무송(撫松縣 撫松)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에 가입했고 독립 운동가들이 병나면 열심히 한약을 지어 주었다.

1926년에 성주는 撫松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樺甸縣에 있는 樺甸義塾에 입학했는데 아버지 김형직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 학교를 또 중단했다. 1926년 여름에 그의 나이 32세 때 김형직은 민족주이 독립 운동가들을 협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 된 것이다. 그때 김형직의 처 강반석(康盤石-34세)은 세 아들 성주(聖柱-14), 철주(哲柱-10), 영주(英柱-4)를 데리고 撫松에서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다가 김성주는 그 무렵에 撫松 일대를 횡행하던 마골단(馬骨團)이란 공산폭력배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이 마골단은 십대 한인 깡패조직으로 당시 공산주의열풍이 그 지역을 휩쓸 때이었음으로 혁명운동을 한답시고 중국인 한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부유한 집을 털며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고 때려눕혔다. 그때 한인자치기관이었던 정의부 (正義府)에서는 이종락(李鍾洛) 소대를 보내어 마골단을 와해하고 소년 성주는 붙잡혔다. 정의부에서는 김성주가 정의부 소속 白山武士團어서 신망이 있었던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용서하여 이종락으로 하여금 그를 훈육하도록 했다. 1927년 봄에 이종락은 성주를 奉天에 있는 중국인학교인 平旦中學校에 입학 시켜 주었다.

平旦中學校에서도 김성주는 마골단의 기질 때문에 잘 적응하지 못 하고 퇴학을 당했다. 김성주는 撫松으로 돌아갔고 그의 가족은 또 安圖로 이사를 했다. 安圖에서는 安圖縣 경찰대장 중국인의 도움으로 1928년 봄에 김성주는 吉林의 중국인학교인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갔다. 吉林에는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소년들은 조선인 길림소년회 (朝鮮人吉林少年會)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었고 김성주도 가입을 하고 얼마 후 그 소년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무렵 공산주의자들은 활발하게 조직 확장운동을 벌리고 있었으며 농민들과 청년학생들에게 접근했다.

1929년에 17세가 된 김성주에게도 그 손이 뻗쳐서 그 해 5월 초에 어느 한인 집에서 모이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참석하고 그 모임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의 길림 총영사관 경찰대에 의해 가담자 거의가 검거되고 김성주는 길림을 빠져나가 전에 자기를 돌봐주던 이종락을 찾아갔다. 그때 이종락은 마골단을 토벌하던 정의부나 국민부 소속의 민족진영이 아니라 변절하여 공산주의 활동에 이미 깊숙이 빠져 있었다. 이종락은 찾아온 김성주를 자기부대의 대원으로 삼았다.

당시 이종락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에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이란 것을 조직하여 인근의 한인 농촌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1929년 가을부터는 五家子 지방까지 손을 뻗쳤다. 이종락 부대의 약 50명 대원들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농촌에 들어가 소득의 1/10을 <吉黑農民同盟>에 세금으로 바치라고 횡포를 부렸다. 김성주도 五家子에 파견되어 이렇게 세금징수와 반동분자 색출에 설치고 다녔다.

1930년 말에 길흑농민동밍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고 이종락이 체포된 후 김성주는 五家子를 떠났다. 그때 그는 봉천의 平旦中學校 때 중국인 친구였던 장아청 (張亞靑)과 같이 장의 고향인 撫松으로 갔다. 1931-1932년경에 김성주와 장아청은 자기또래 젊은 애들을 규합하고 공산혁명을 위한 군자금이란 명목 하에 돈 있는 중국 사람들 집을 털어 撫松에서는 “조선 놈 김일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비난 소리가 비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朝鮮革命軍 總司令 梁世奉)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는 일군을 저항하기 위한 두 개의 한인 민족주의 무장부대가 있었는데 하나는 북만의 한국독립군이고 하나는 남만의 조선혁명군이었다) 예하부대의 고동뢰 (高東雷) 소대장과 대원 9명을 撫松에 파송하여 김성주 일당을 퇴치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김성주 일당은 撫松에 도착하여 피곤하게 잠든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덮쳐 전원 사살하고 그들의 권총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

그 무렵 安圖縣에 살고 있던 김성주의 모친 강반석(康盤石)이 1932년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933년 6월에 김성주는 汪淸縣에 있는 중국인 항일부대의 하나인 오의성(吳義成) 부대에 나타나 오의성의 당번병으로 시작하여 그 부대의 대원이 되었다.

1934년 2월 현재로 동만과 남만에는 의용군, 구국군, 자위군 (義勇軍 救國軍 自衛軍)등의 이름으로 20-30명 또는 100-200명 규모의 100여개의 항일부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吳義成의 동북의용군 (東北義勇軍)은 600명 정도의 대부대 이었다. 1936년 4월에 吳義成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5군과 합동으로 항일협동전선(抗日協同戰線)을 구축했다. 그 해 8월 17일에 동북항일연군 제6사, 즉 김일성 부대는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吳義成 부대와 합류하여 약 2천명의 병력으로 撫松縣城을 포위 습격하는 합동작전을 벌렸다.

이때 김성주는 제6사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전속했던 것이다. 1937년 초에 安圖縣 치안대 한인 이도선 경좌 (李道善 警佐)가 김일성부대 토벌에 나갔다가 그 부대의 소년대원 한 사람을 붙잡았는데 자기 이름은 김영주(金英柱)고 바로 위 형 김철주(金哲柱)는 1935년에 죽고 “큰형 김성주(金聖柱)는 지금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라고 진술했다.

그때 김성주는 중국인 친구 장아청(張亞靑)과 함께 제6사 대원이었다. 김성주는 1937년 6월 초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도 제6사장 김일성으로가 아니라 그 부대의 일개 대원으로 참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북한에서는 한동안 기를 쓰고 제6사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그 전적(戰績)을 확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들은 나이가 다르고 신원이 다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졌을 무렵에 장아청이 吳家子에 있는 친구 이선일(李善一)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와 김성주는 지금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 김일성 부대에서 싸우고 있으니 자네도 동지들을 데리고 와서 가세 해 달라”라는 권유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도 김성주가 김일성부대의 일개 대원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37년 11월에 제6사장 김일성이 죽고 그 후계자, 또 다른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되었을 때에도 김성주는 계속 김일성부대의 대원으로 남아 있었으나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그러나 김성주는 1939년에 같은 김일성부대의 여자 대원이었던 김정숙(金靜淑)과 부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졸 들은 결혼할 수 없다는 동북항일연군의 규칙으로 봐서 김성주는 중간간부 이상의 직위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金靜淑은 191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고 1949년 9월에 평양에서 사망했다.)

1940년 전후해서 일만군경의 합동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괴멸되고 1940년 12월 말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부하 20여명을 데리고 소련원동으로 도망갈 때에도 거기에 김성주가 끼어 있었다. 그의 처 김정숙은 그보다 먼저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에 도착해 있었고 1941년 2월 16일 그곳에서 그들의 첫 아들“유라” (김정일)을 출산했다.

김성주는 해방 후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특수훈련과 교육을 받았고 그 사실을 늘 자랑삼아 말했는데 대체로 군사참모학, 정보학, 통신, 낙하산훈련이었고 그리고 철저한 <막스-레닌주의> 교육을 받았다. 훈련은 소련 연해주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교관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바. 역사의 날조 (歷史의 捏造)

북 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사의 대부분은 세 가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없었던 일을 날조한 것이며 둘째는 있었던 일을 변조하거나 미화해서 셋째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도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문제가 되는 사건이 보천보 전투인데 2002년 8월초에 한국의 김대중 정권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보천보전투를 비중 있게 소개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또 학계 일부에서는 일제시대의 공산계열의 독립운동도 사실(史實)로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도 제기가 되었다.

대 한민국의 북한학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중의 하나가 철저한 연구 분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북한이 날조미화 (捏造美化)한 문헌과 자료를 비판 없이 접수하는 태도이다. 요즘에 와서야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내재적 접근법>(內在的 接近法)이라는 것으로 재독 북한간첩 송두율과 그를 추종하는 사이비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부정적인 면을 극대화하며 북한의 모순과 허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판하지 않으며 날조된 역사를 史實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金聖柱)은 죽을 때까지 여러 겹의 남의 탈을 쓰고 살았다. 그가 그토록 무서운 독재자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어쩌면 이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속이지 않은 것 도 있다. 그의 출생지, 생년월일, 부모와 조상들의 이름 등등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과거의 행적은 거의 다 거짓말이다.

진실과 허위를 배합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또 어려운 일을 추가적으로 해야 한다. 그 하나는 역사를 날조하는 작업이요 다른 하나는 그 허위를 알고 있는 사람과 알만한 사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어렸을 때는 깡패요 청년시절에는 동족을 괴롭히는 공산비적으로 살아온 그가 “만고의 애국자요 항일영웅이요 민족의 태양”으로 둔갑해서 49년간 (1945-1994) 살아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고 비참하게 되었는지 역사는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가짜 김일성이 도용한 진짜 김일성의 얘기는 아래와 같다.

* 金日成 將軍 (본명 金光瑞, 별호 金擎天, 1888년 6월 5일 咸鏡南道 北靑郡 海晏 昇坪에서 출생, 호적상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 191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 제23기생으로 졸업) - (金光瑞)는 구한말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여 장교가 되고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되었다. 당시 일본육사 출신 한인들은 金光瑞 외에도 제26기생 洪思翊 李應俊등 13명과 제27기생 金錫源 金仁旭등 20명, 계 34명이 있었다.

1919년 2월 20일에 병가를 얻어 서울의 사직동 166번지 자택에 와 있는 동안에 3.1운동을 맞았고, 일본군을 떠나 해외로 도피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그 해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池大亨(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탈출했다.

이들은 遼寧省 孤山子에 있는 한인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李始榮이 설립)를 찾아가 교관이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구한말에 正尉(大尉) 이었던 申八均도 교관으로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의 장교출신 교관들은 다같이 <天>字 돌림의 별호(別號)를 갖기로 하고 申八均은 申東天으로 金光瑞는 金擎天으로 池大亨은 池靑天 (또는 母姓을 따라 李靑天)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들을 한국독립투쟁사에서 <南滿三天>이라 부른다. 그 해 중국본토에서 운남사관학교 (雲南士官學校)를 졸업한 李範奭도 南滿三天과 합류했다.

1919년 겨울에 金擎天은 무기 구입 차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에도 한족 이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만주의 간도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의 한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그때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대의 한인들에 대한 잔학행위가 극심했다. 그래서 金擎天은 그곳에서 항일무력투쟁을 조직하고 선두에 나섰다. 그때 金擎天이 <金日成>이란 별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이 소문으로 국내에 전해져 시베리아에서의 항일투쟁의 영웅적인 존재로 흰말을 타고 날아다니는 일본육사 출신 金日成장군의 신비로운 얘기가 널리 퍼졌고 그와의 인터뷰 기사가 金光瑞의 이름으로 1923년 7월 29일자 東亞日報에 실렸다. 항일투쟁에서 金光瑞 (金擎天-金日成)는 볼셰비키 적군과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1922년 가을에 일본군대가 철수하자 시베리아를 장악한 볼셰비키는 그를 배신하고 한인독립군 부대들을 적군에 편입시키거나 무장해제 시켰다. 1925년 6월 25일자 東亞日報가 金光瑞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또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고 그것이 金光瑞 (金擎天-金日成)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사. 結論

북 한 金日成의 역사위조와 신분위장은 철저한 것 같으면서도 엉성하다. 그가 보천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金日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사용하지도 않았던 장군이란 군사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동남만주 산악지대에서 싸웠다는 그가 흰말을 타고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주장은 만화책 수준의 웃기는 거짓말이다.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 (朝鮮革命博物館)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金日成의 그림이 걸려 있으며 金日成 전기에는 그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白馬를 탄 金日成 장군>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金光瑞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며 보천보 전투의 얘기는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金日成 (그것도 가짜 김일성)의 얘기를 도용하여 미화한 것이다.

그 외에도 英雄 金日成將軍, 朝鮮民族 解放鬪爭史, 金日成將軍略傳, 朝鮮近代 革命運動史, 歷史辭典, 朝鮮全史 등등의 북한 저서에는 역사위조, 변조, 도용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신분의 위장과 도용이요, 金日成이 조직하고 지휘했다는 사실무근의 조선인민혁명군(朝鮮人民革命軍) 얘기와 그가 지휘했다는 보천보 전투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다.

이 가짜 김일성(金日成)이 49년간 독재하면서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으며 그도 모자라서 권력을 자식 <김정일>에게 물려주어 그 애비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독재자로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인민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山)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20723&section=sectio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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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애호 ip1 2012-06-10 23:43:56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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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밀성 ip1 2012-06-10 23:49:10
    이자료들을 비라에실어 북한종심 평양에 보냇으면 얼마나 조을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암튼 조은글 감사합니다 협잡의 달인 김일성, 그리고 그가 남긴 가족과 굶주린 북한의 노예들, 현재의 무능한 세습정권 공산주의 외피를 뒤집어쓴 악마들의 소굴 북한! 윗글과 쭈욱 연관시키니 고리가 풀리는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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