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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대안적 구상에 대한 고찰: 단독정부론을 중심으로
United States 반도인 0 189 2012-07-26 08:43:03

건국의 대안적 구상에 대한 고찰: 단독정부론을 중심으로

이철순 (부산대 정외과 교수)

1. 머리말

이 글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표출된 건국의 대안적 구상들 가운데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살펴 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과 끝까지 경합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실현된 구상이었다. 결과론적인 평가일수도 있으나 우리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실현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만큼 현실성이 큰 구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민족”이나 “통일”과 같은 명분을 중시하는 이상론이 득세하면서 어떤 구상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그러한 구상의 순수한 동기나 의도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해 왔다. 그러한 이상론 때문에 좌우합작론이나 남북협상론의 순수한 동기와 열망에는 주목하면서도 실제로 실현된 구상이었던 단독정부론의 정당한 평가에는 매우 인색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기껒해야 권력욕의 소산이었으며 미국의 정책과 결부되어 한국의 분단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단독정부론에 대한 기존의 몇 가지 오해를 푸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2.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사전 교감설

남한 단독정부론은 해방 직후 미국과 이승만의 사전교감이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양자간의 교감 하에서 이승만이 추진했다는 커밍스와 같은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있다. 해방직후 사전교감설의 첫 번째 근거는 이승만이 맥아더의 지원에 의해 누구보다도 빨리 남한에 귀국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 근거는 이승만이 귀국하는 길에 동경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나 아마도 남한 단독정부론과 관련된 모종의 협의를 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커밍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는데 최근에는 정병준 교수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정병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의 귀국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은 1945년 8월 27일 맥아더를 통해 자신의 귀국 알선을 부탁했고, 8월 28일 굿펠로우를 통해 중경 경유 입국을 국무부에 청원했다. 태평양전구 총사령관 맥아더는 관할 지역의 통과를 허가했고, 전쟁부를 통해 수송 수단이 마련되었다. 9월 5일 국무부는 이승만의 여권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중경 대신 맥아더가 있던 마닐라를 거쳐 귀국하는 것을 희망했다. 또한 이승만이 여행 허가서에 기재한 임시정부 한국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이 국무부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고, 이 때문에 여권 승인이 취소되었다. 이승만은 국무부에 다시 여권을 신청했고, 위원장이란 명칭을 삭제하고 9월 24일 합참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맥아더가 동경에 진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마닐라가 아닌 동경을 경유하기를 희망했다. 국무부와 합참은 이승만에게 동경 경유와 군용기 사용 문제에 대해 맥아더의 승인을 요청했고, 이승만은 9월 29일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승인을 얻어냈다.

정병준 교수가 이승만의 조기 귀국 과정에서 강조하는 점은 첫째로, 이승만이 맥아더를 몹시 만나고 싶어 했고 그 때문에 이승만의 경유지가 중경에서 마닐라, 다시 마닐라에서 동경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5년 10월 1일자 메모에 따르면 이승만이 중경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를 귀국시키지 않고 붙잡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중국에 들를 경우 역시 그런 신세가 될까 하여 중국을 피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승만이 마닐라로 가는 길을 택했다가 도쿄를 경유하게 된 것은 여객기 사정으로 경유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병준 교수가 두 번째로 강조하는 점은 맥아더가 이승만의 귀국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의 귀국은 하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의 요청이 맥아더사령부를 통하여 미군 총참모부(펜타곤)에 전달되어 펜타곤이 워싱턴 출장소의 킨트너 대령으로 하여금 이승만을 귀국길에 오르도록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병준 교수는 국무부나 전쟁부의 문서 어디에도 하지의 요청과 킨트너 대령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킨트너 대령은 누구인가? 킨트너 대령은 당시 육군성 소속 ‘군사정보처 워싱턴 출장소’의 행정관으로서 부소장 격이었고 후에 이정식 교수와 같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근무했다. 이정식 교수는 두 차례의 면담을 통해 킨트너 자신은 전혀 내막은 모르지만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한 장교를 시켜서 수소문해 워싱턴 디씨 매사추세츠 가에 있는 사무실에서 이승만을 찾아내 서울로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서상으로는 밝혀 지지 않았지만 두 차례의 면담이 있었으니 신뢰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반해 맥아더의 영향력을 밝혀 주는 문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문서는 커밍스 교수가 처음 인용하고 정병준 교수도 인용하고 있는 문서이다. 내용은 이승만이 10월 12일 오전 11시에 동경에 들어갔는데, 맥아더는 이승만을 위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이 대령(Colonel Rhee)이 전쟁부의 굿펠로우 대령에게” 보내는 전문을 전쟁부에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이 문서가 언급하고 있는 이승만이 굿펠로우에게 보낸 전문은 현재 후버 도서관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고 있는 문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서의 진위 여부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맥아더, 이승만, 하지, 맥아더의 정치고문 애치슨의 동경 회동에 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정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이승만-맥아더-하지 삼자 회담이 두 번 있었으며, 하지와 애치슨의 양자 회담이 한 번 있었다. 다만 이승만, 맥아더, 하지, 애치슨이 모두 모인 4자 회담은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병준은 10월 14일 맥아더가 이승만을 만났을 때 애치슨과 하지가 배석했을 것이라고 강한 추측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맥아더가 이승만을 두 번 만난 일이나 하지를 불러들여 이승만과 만나게 한 일은 전무후무하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도 지적하고 있지만 맥아더의 약속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두 번 만났는데 10월 15일 두 번째 만남은 출국인사차 만난 것이었다. 따라서 두 번째 만남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맥아더가 하지를 일부러 불러들였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업무 연락 차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 중이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맥아더가 이승만과의 만남을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하겠다.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런 모든 회합에 대한 의사록이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만남에 대해서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커밍스는 동경 회동에서 하지, 맥아더, 이승만이 이미 확립된 국무부의 국제주의적 정책에 반하는 계획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하고 있는데 정병준 교수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정병준은 조심스럽게 맥아더, 하지, 이승만은 국무부의 신탁통치 계획에 반대하며, 그 대안으로 이승만-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미군정 통제하에 있는 임시정부 혹은 ‘임시한국행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논의했을 것이며, 이 논의가 더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것이 11월 20일자 ‘랭던안’으로 구체화된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 구상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커밍스는 랭던안이 남한 단독정부 구상의 기원을 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랭던안의 원형이 논의된 동경회동에서 단독정부 구상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된다. 그러나 우선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이 단독정부 구상이라는 주장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기 전까지 미국은 미소협조 하에 통일된 한국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이지 단정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병준도 인정하듯이 미군정이 단정론에 개입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 미국식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는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동경회동에서 맥아더, 이승만, 하지, 애치슨 사이에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설사 그 이야기가 후일 랭던안으로 알려진 정무위원회 구상의 원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남한 단독정부의 시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1945년 10월 경 이승만이 귀국할 무렵에 이승만과 미국이 사전에 구체적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증거는 찾아 보기 어렵다. 우선 이승만이 귀국할 때 맥아더를 만나려고 열망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맥아더가 이승만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동경 회동에서 맥아더, 이승만, 하지, 애치슨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는지 의사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도 단독정부 논의가 심도있게 논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커밍스나 정병준의 추론대로 신탁통치에 반하는 미군정 통제하에 있는 임시정부 혹은 ‘임시한국행정부’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이 논의가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지향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미소공위가 무산되기 전까지 미국이 추구한 것은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 미국식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남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남한과 북한 중 어느 쪽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며 따라서 어느 쪽이 더 분단정권 출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역시 커밍스와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1945년 11월의 랭던의 전문을 남한 단독정부의 기원이라고 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한이 더 먼저 단독정부 수립에 착수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북한에 대해서는 남한과 같은 비중으로 언급하지 않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남북관계는 相互 互發的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쪽만 따로 분리해 놓고 보아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다. 따라서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론을 제기했을 당시의 남한과 북한의 정세는 어떠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최근 공개된 소련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단독정권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단독정권 출발점은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이었다. 스탈린은 이 지령에서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소련은 전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5개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외무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런던회의(1945년 9월 12일 - 10월 2일)에서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트리폴리타니아를 소련에 양도할 것과 소련이 일본 관리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는데, 연합국이 소련의 요구를 묵살하자 스탈린은 소련의 점령지역에서의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도 전에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북한 정치의 전개과정은 미소간의 타협은 안중에도 없는 친소적인 단독정권으로 줄달음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한은 1945년 10월 28일 ‘북조선5도행정국’을 발족시켰고 1946년 2월 8일에는 이 기관을 사실상의 정부라고 일컬어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재발족시켰다. 또한 이 기관의 주도하에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나 실시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1946년 3월부터 실시하였다. 그리고 1946년 1월 5일에는 조만식을 연금하고 1월 23일에는 공개 석상에서 반동이라고 규탄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에서 우익 세력을 실질적으로 절멸시켰다. 소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코리아에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합의에 상관 없이 그 이후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발족, 토지개혁의 실시, 조만식의 연금 등과 조치들을 단행한 것이다. 또 이러한 조치들은 미소협조를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시행된 조치들이었다. 이로 미루어 소련은 미소협조는 안중에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북한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련의 이러한 조치들은 1945년 12월 25일 경에 나온 소련군 총정치국장 대장 슈킨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슈킨은 “1945년 9월 21일자 최고사령부의 훈령에 언급된 북조선에서의 민주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한 부르조아민주주의정권 결성을 겨냥한 노선이 대담하게 관철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1.반일 민주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블록을 토대로 한 북조선의 부르주아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2.조선에서 소련 군대가 철수될 경우 소련의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굳건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아직 쟁취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 민족간부가 아직 충분하게 파악되지 못했다. 현재 북조선에서 인기가 높은 인사들은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과 박헌영, 민주당 지도자 조만식이 있는데 조만식의 소련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아직 모호하다. 연해주군관구 평의회에 따르면 민주주의 단체들을 지도할 수 있고 소련의 이익을 고수할 수 있는 민주주의 민족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4-5개월이 소요 될 것이다.

3.최단시일내에 북조선 경제를 복구하고 민족 간부를 양성하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조선내 정권의 중앙집권화하여 이를 민주활동가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4.인민민주주의운동은 대지주의 토지소유 현실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 빠른 시일내에 농지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우선 이 보고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보고서가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보고서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보고서 결론 2번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북한에 “소련의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교두보”를 세우려는 의도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즉 소련은 북한에 배타적인 친소단독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세 번째로 결론 3번은 1946년 2월에 발족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연결되는 것이며 네 번째로 결론 4번은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과 연결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 문서는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리는 와중에 나온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미소간의 협조라든가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1945년 9월의 스탈린의 지령, 이 지령과 연관된 12월의 슈킨의 보고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발족, 3월의 토지개혁의 실시는 모두 연결되는 것이며 이러한 일련의 시도를 통해 소련은 북한에 사실상의 단독정권을 세우려고 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미군정을 중심으로 이승만이나 김구와 같은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결집시키려는 하나의 복안은 가지고 있었지만, 소련과 같이 남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려는 실질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다. 1946년 6월 시점에 북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같은 사실상의 정권기관도 없었으며 북한에서 우익세력이 거세된 것과 달리 남한에서는 아직 좌익세력이 활동할 수 있었다. 또한 신탁통치나 미소협조에 회의적인 미군정과 달리 미국의 국무부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면서 미소협조에 의한 통일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미소간의 협조에 임하는 태도는 미국과 소련이 확연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통일정부 수립을 1차 목표로 하고 그것을 위한 예비적 단계로서의 남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면, 소련은 미소협조에 의한 통일정부 구상을 떠난 독자적인 북한정권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은 이렇게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 시도가 가시화되고 미소협조에 의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단순히 자신의 권력욕에 집착하여 돌출적으로 나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상황이 그대로 흘러간다면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이 들어설 수 있고 남한도 이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단독정부 발언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만이 남북한 분단정권 출현의 원흉이라는 지적은 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이승만은 단순히 권력욕에 집착하여 단독정부론을 고집하였는가?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하여 단독정부론을 고집하였다는 주장이 한동안 유행하였다. 물론 정치인 이승만은 당연히 권력욕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권력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단독정부론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 단독정부론의 배경은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철저한 불신에 근거한 반소?반공 의식인데 그러한 의식은 자신의 집권을 위하여 갑자기 표출된 것이 아니라 그 연원은 매우 깊은 것이었다.

이승만의 반소의식은 구한말의 반러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1898년 3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의 대조선 이권침탈을 규탄하는 반러운동에 몰두하였고 1899년 박영효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 갇힌 뒤에 반러의식이 더욱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투옥된 상태에서 1903년 제국신문에 쓴 논설 “러일양국의 대한 관계”에서 “러시아는 탐욕 있는 호랑이” 이며 “세계를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본다”고 지적한 후 “피요트르 황제(피터대제) 이후로 천하를 통합할 주의로 유명을 끼쳤으매 대대로 이 유명을 지켜 남의 토지도 많이 침탈”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도 강한 반러감정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세 가지 정치구별”이라는 글에서는 러시아를 “태고시대에 인심이 양순하고 풍속이 순후할 때에 無爲而治하던 전제정치를 아직도 펴고 있는 나라”로 묘사하였고, “갑오 을미 후 일?러시아”라는 글에서는 “자래로 러시아 사람의 정치주의가 전혀 남의 토지를 빼앗기로 위주하매 혹 기회를 타서 계책을 부리거나, 혹 은혜를 베풀어 국권 잡은 이를 장악에 넣거나, 혹 다른 여러 가지 수단을 부려 한조각 땅이라도 저의 세력에 넣으면 영원히 제 것을 만들어 장차 온 세상을 다 통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나니”라고 러시아의 팽창야욕를 지적하였다.

유영익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의 이러한 반러의식은 그가 미국에서 유학?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되다가 1917년 볼쉐비키 혁명을 통해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하고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반공사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 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라고 간주하고 이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그가 1933년 외교행각차 모스크바를 잠시 방문했을 때 소련 국민의 비참한 생활을 목도하고 확신으로 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소?반공의식은 2차대전이 발발하고 미영소간의 대동맹이 형성되자 전쟁 이후 소련이 다시 아시아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은 1942년 1월 미국무부장관 특별 보좌관 알저 히스(Alger Hiss)에게 소련은 시베리아를 통한 무역을 위해 한국의 부동항을 장악하려고 반세기 이상의 세월을 노려왔으며, 미국이 한국 독립을 미리 승인하여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소련은 일본 패망 후에 반드시 한반도로 들어와 한국을 장악하려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1943년 3월 루즈벨트가 영국의 이든 외무장관에게 신탁통치를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자 5월 15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은 1905년 일본의 한국 병탄을 허락함으로써 한국 사람들이 36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소련이 ‘소비에트조선공화국’(the Soviet Republic of Korea)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그러기 전에 빨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승만은 40년전 미국이 우려하던 극동에서 소련의 팽창 위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고, 만일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미국 자체가 ‘장차 더 큰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1945년에 들어와 미국이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을 문제 삼으며,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는 한길수 등과 협력할 것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미국이 소련과의 협조를 우선시 한 나머지 한국인에게 무분별한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경우 전후 한국에는 폴란드의 루블린(Lublin)정권과 비슷한 친소 괴뢰정권이 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친소정책을 비난했다.

지금까지 보아 왔듯이 해방직전까지의 이승만의 반소반공 의식은 구한말의 반러의식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의 팽창야욕에 대한 불신, 그러한 소련이 추구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이승만이 행한 연설문을 보면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공산주의의 건전한 평등주의적 이념이고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장악 방식이었다. 이승만은 전자에 대해서는 찬성하였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불신하였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방송연설에서 공산주의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에게는 얼마만큼 찬성하지만, “경제정책의 이해는 어찌되든지 공산정부만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는 중에서 분쟁이 생겨 국사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과는 협력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장악 방식에 대한 우려, 그들의 배후에 있는 소련에 대한 불신은 1945년 12월 17일자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연설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오, 공산당 극좌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 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 그 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과 영광을 위하여 ---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 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로국(露國)을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쟁이 가열되자 이승만의 반공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탁치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을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나아가 이승만은 “병든 가지는 쳐 버려라”고 외치며 공산당의 본 의도가 한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이승만은 1946년 3월 4일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통일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내 집에 불 놓은 자와 함께 일하라는 말과 같으니 될 수 없는 일이므로 불 놓은 사람이 주의(主義)를 그치기 전에는 합동될 수 없으며 그이들이 그 주의를 고집할 동안에는 평안히 살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은 그 배후에 있는 소련 때문이었으며 소련에 대한 반감은 구한말의 반러의식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었다. 단독정부론을 최초로 제기한 정읍발언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과 합동할 수 없다는 의견의 표명이었으며 이러한 반공의식은 갑자기 표출된 것이 아니고 그 연원은 구한말의 반러사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의 배경으로 그의 해박한 국제정세 인식, 특히 소련의 동유럽 침투에 대한 경계 의식을 들 수 있다. 이 점도 단독정부론이 단순히 그의 권력욕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이승만은 1910년에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S)”이라는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랫 동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위한 로비활동을 해 왔다. 따라서 그는 국제정치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했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1942년 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워싱턴에 연락사무실을 열고 올리버 교수와 1, 2명의 직원들을 고용하여 각종 운동을 전개했는데, 사무실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 내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미소 양대국 간의 관계 진전도 잘 알 수 있었다.

이승만의 국제정세 인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항이 동유럽에서 진행된 소비에트화이다. 특히 폴란드 사태가 중요했는데 1945년 초에 형성된 폴란드 좌우연립정부는 명목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공산정권이었다. 우선 간단하게 폴란드 사태를 일별해 보자.

1941년 폴란드 영토 조정 문제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스탈린은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련 영토 내에 ‘폴란드 애국자 동맹’을 만들고 1938년에 해산한 공산당을 부활시켜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시켰다. 폴란드 공산당은 1943년 3월 1일의 성명에서 ‘민족통일전선’의 구성을 주창했고 런던 망명정부를 통일전선의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8개월 후인 11월의 성명에서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구성을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망명정부는 반동분자들의 집단이므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않겠다고 선포했다.

미국과 영국은 친서구적인 망명정부 각료들의 참정권을 옹호했는데, 스탈린은 미국?영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20명의 각료 중 4, 5명의 보수진영 인사를 포함하기로 동의했고 그 후 미영소 3국 대표들이 각료들의 전형을 위한 회의를 거듭했다. 이때 소련 측 몰로토프 외상은 미국과 영국 측이 지명한 인물들에 대한 비토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측의 추천 대상자인 16명을 체포함으로써 큰 물의를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폴란드에 연립정부가 구성되기는 했으나 좌우연립은 명목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공산정권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소련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 침투하여 자신의 위성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연설에서 “이 같이 患中亂을 만들어 종당은 중국과 波蘭國(폴란드)과 같이 민족간에 내란을 일으키어 피를 흘리고 쟁투하기에 이를 터이다”라고 폴란드 사태를 언급하였고 12월 17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폴란드 사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공산당 격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오.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波蘭國(폴란드) 극렬분자는 波蘭國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波蘭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이 德國(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영미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가 급기야 露國(러시아)이 덕국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波蘭國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자탁: 다른 일을 빙자하여 핑계함)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 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구라파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 가서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爲主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뭔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서 항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因緣하여 分裂紛爭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이 연설문으로 미루어 이승만은 당시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라파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정권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이러한 동유럽에 정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좌우연립정부를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공산화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통일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나?

흔히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때문에 분단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 한 동안 풍미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과연 통일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을 위해 단독정부론을 제기한 것일까?

우선 우남의 측근이었던 허정의 목소리를 통해 우남의 생각을 들어보자.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우남이나 한민당이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가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우남이나 한민당이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분단의 고정화를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안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우남이나 한민당의 노선이 남북을 통틀어 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음은 추호의 의심을 할 여지도 없다.”

“우남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으므로, 공산당의 음흉한 전략 전술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남북협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남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정세의 장기화를 피하고 최소한 미군 점령하의 남한에서만이라도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지를 마련하려는 현실적 구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통일정부라는 궁극적 이상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을 잠시 유보하고 남한을 확고한 민주국가로 육성함으로써 이상 실현의 지름길을 마련하려는 착상이었고, 이러한 점에서 그의 구상은 타당성이 있었다.”

요컨대 허정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통일정부라는 이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남한에 민주국가를 이룬 후에 통일정부를 이루려는 현실적 관점에서 단독정부론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선통일 후정부수립>이라는 원론적인 통일론을 제시했다. 예컨대 1945년 10월 19일에는 “우리에게 급한 문제는 잃었던 3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 급한 문제이고 유일한 문제이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통일뿐이다. 여하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잃은 땅을 찾는 일에 전력할 뿐이다”라고 발언함으로써 원론적인 통일론을 제시했다.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던 1946년 4월 8일 기자회견에서는 “38선을 철폐하여 다시 통일을 회복하기로 이 회의에서 결정되기를 바란다”고 역시 통일 우선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승만의 통일관이 <선통일 후정부수립>이라는 원론적인 통일관에서 <선정부수립 후통일>이라는 단계론적인 통일관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이 자신의 단독정부론을 직접 미국 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은 1947년 1월 31일 미국에서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남북통일에 나아가는 정당한 계단”이라고 주장하여 단독정부 수립후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 후 4월 23일 발표한 첫 번째 성명에서도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위선 남조선에서 내치외교상 문제를 해결하며 남북통일을 미소 양국과 연합 각국으로 교섭개방할 계획이니 서북동포들도 이것을 절대 지지하는 것이 하루바삐 38이북을 해방하는 첩경이라”면서 역시 <선정부수립 후통일>을 주장했다. 이어 이승만은 (남한) 총선거를 통하여 정부수립을 완성한 후 남북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다. 1947년 8월 15일 해방2주년 기념식에서 “남북통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서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해서 우리 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미소 양군은 철퇴하고 38선을 철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9월 16일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門路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 민족이 다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이상의 이승만의 발언들을 볼 때 이승만이 통일을 전혀 도외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처음에는 원론적인 통일을 강조하다가 제1차 공위가 결렬된 후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한 후 이에 근거해서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계론적 통일관을 피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통일은 좌우의 합작, 남북의 통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반공체제를 확립한 남한의 건설 이후 남한의 주도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김일영 교수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북한 김일성의 “민주기지론”과 기능적으로는 등가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쪽이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한 후 자신의 체제를 상대에게 연장시켜 단계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면에서는 발상이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논자가 언급했듯이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자유기지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6. 맺 음 말

지금까지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맥아더, 하지, 이승만 사이에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에 동경에서 단독정부론을 사전에 모의하였다는 확정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설사 어떤 논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논의가 단독정부론과 직접적으로 결부되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미국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둘째로 1946년 6월 이승만이 정읍에서 최초로 단독정부론을 제기하였을 때 북한에서는 이미 사실상의 단독정권이 이미 수립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남북한의 분단을 초래한 기원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의 문제 제기는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에 맞대응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셋째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단순히 그가 단순히 집권하기 위한 욕심에서 제기된 정략적 발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단독정부론의 사상적 뿌리는 반소?반공의식인데 그 연원은 구한말의 반러의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단독정부론은 평생에 걸친 자신의 신념의 소산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승만의 동유럽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단독정부론의 배경이 될 수 있다.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좌우연립정부에 기초한 동유럽이 실제로는 공산화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단독정부론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단독정부론은 우선 남한을 확고한 민주국가로 육성한 이후에 통일을 이루겠다는 <선정부수립 후통일>이라는 단계론적인 통일론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이 통일을 도외시한 분단의 원흉이라는 지적은 성립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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