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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방북연기 (펌)
Malaysia 초생 0 264 2013-01-29 00:21:01

김대중을 수금 대상으로 본

(조폭) 두목 김정일

殘金 다 들어오지 않았다고

"평양에 오지 말라" 통보!

金銀星 당시 국정원 차장 증언.

趙甲濟

金銀星 前 국가정보원 차장 증언

6·15 남북 頂上회담과 관련 “김정일,

수금 다 안됐다고 김대중 방북 연기했다”

글 :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국정원이 중국은행내 김정일 비자금 계좌로 보낸
네 번째 돈(4500만 달러)이 기재 착오로 송금 차질을 빚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2000 615일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잔을 부딪치고 있다.

 
 
<퍼주기식 원조가 저들을 상전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訪北) 하루 전에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전문(電文)을 보냈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결국 경호와 통신기기 보완을 구실로
방북 일정을 하루 연기했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돈 다 보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
“그날이 2000610일인데,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러 방북하기로 한 612일(월) 전 토요일이었습니다.
610일은 국정원 창설 기념일이고 직원들은 오전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하였고,
저는 오후에 골프를 쳤으므로 기억이 또렷합니다.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운동장 스탠드엔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
권진호(權鎭鎬) 해외담당 차장,
그리고 국내담당 차장이던 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전 1030분쯤이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김보현(金保鉉) 제5국장이 황급히 우리한테 왔어요.
그는 김대중-김정일 회담 준비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국장이 문서 한 장을 원장에게 건네면서 당황한 말투로
‘정상회담 못하겠다고 합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원장도 문서를 읽더니 안색이 변해요.
일어서면서 ‘차장들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청 원장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원장이 한 페이지짜리 문서를 회람시켰습니다.
북()에서 보낸 전문이었는데,
두 문장 정도 되었습니다.
‘나머지 돈을 다 줄 때까지 회담을 연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컨대 수금(收金)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평양에 올 수 없다는 협박조 글이었습니다.
임동원 원장은 당황하기도 하고 화도 난 표정이었는데,
차장과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했습니다.
남북회담을 여러 차례 치르면서 경험한 전례(前例)가 있어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북측에서 경호와 통신문제로 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다고 발표하면 안 될까요.
’북한과 회담할 때 늘 문제가 되는 게 경호와 통신이었거든요.
원장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15분 요담한 뒤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아마 그날 우리가 북측과 급하게 협의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을 거예요.”

김대중 회고록도 정상회담 연기이유 제대로 안 밝혀

2000427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김은성 국정원2차장(오른쪽).

일요일이던 2000611일 오전 청와대 박준영(朴晙瑩) 대변인은
“남북정상회담이612~14일에서 13~15일로 하루 연기됐다”고 발표했다.
“북한에서 준비가 덜됐다는 이유로 연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김정일은 그러나 방북 첫날인 613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 머물던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외신(外信)들은 미처 우리가 준비를 못해 (김 대통령을 하루 동안) 못 오게 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은성 전 차장의 증언은 정부 발표와 청와대 측의 설명을 뒤엎는 것이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평양 방문이 하루 연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돌연 북에서 평양 방문을 하루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10일 대남(對南)통신문을 보냈다.
“기술적 준비관계로 불가피하게 하루 늦춰 13~1523일 일정으로
대통령님이 평양을 방문토록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대공(對共)실장 김은성씨가 보았다는 전문 내용엔 물론 그런 내용이 없었다.
‘하루 연기’가 아니라
‘나머지 돈을 다 보낼 때까지 연기한다’는 엄포였다고 한다.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핵심 사안에 대한
김대중의 증언은 그동안 너무나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평양회담 준비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다른
국정원 간부도 “연기 사유가 돈 문제였다”고 확인해 주었다.
10일 오전 ‘방북 불가’ 통보를 받은 국정원 측이 송금에 차질을 빚은 점에 대하여
북한측에 설명하고,
‘은행이 문을 여는 12일 중에 나머지를 송금할 것이니 하루만 연기하자’고 설득,
북측이 그날 오후에 다시
김대중 회고록에 나오는 그런 내용의 대남전문을 보냈을 가능성은 있다.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이 평양회담 이전에
김정일에게 송금(送金)하기로 약속했던 45000만 달러를 다 받지 못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통보를 했다면,
떳떳하지 못한 비밀거래를 연상시킨다.
김은성씨 주장대로 수금 차질로 회담이 연기된 것이라면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본질적 성격은 ‘정상회담 구걸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국정원이 送金責
2003623일,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비밀송금 의혹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이○○씨는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 회장을 불러 송금 과정을 캐물었다.
<문(검사) : 북측에 45000만 불을 어떤 방법으로 지급하기로 하였는가요.
답(정몽헌) : 2000523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부두기공식이 있어서
저와 김윤규 사장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때 아태(亞太)위원회 재정담당이라고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와
부위원장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봉투 안에
‘돈자리(계좌번호)’라고 적힌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습니다.
5월 중순에 제가 박지원 장관을 만나서 정부가 부담하여야 할 1억 불을
현대가 대신 부담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아태 재정담당에게
우리가 45000만 불을 전부 송금하겠다는 말을
부위원장에게 전해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북측으로부터 받아 온 서류 봉투를 보관하고 있다가
61일 해외 출국을 하면서 김윤규 사장을 불러 각사(各社) 사장들에게 전해 줘서
송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여러 관련자들을 조사해 많이 알고 있는 이 검사는,
정몽헌씨에게 이렇게 정리해 준다.
<대북송금 과정을 보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는 해외에서 자금을
북한측 계좌로 송금한 것으로 확인되고,
현대상선만이 국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아 송금하였습니다.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불의 송금과정을 보면 국정원이 송금의 주체인 것으로 하면서
국정원 직원의 개인 실명(實名)을 이용하였으며,
미국 등 북한과 적대(敵對)관계에 있는 국가에 자금이동이 노출될 것을 염려하여
자금 흐름이 파악되지 않도록 하면서 69일 중으로 송금되도록
국정원과 관계은행인 외환은행의 긴밀한 협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현대상선은 67일 이미4000억원을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음으로써
송금 준비가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9일 오후2시가 되어서야 국정원에 돈을 건네주어
송금 절차를 밟도록 하여 결국 은행 마감시간이 임박하여 어렵게
송금이 완료되는 등 상당히 급하게 돌아갔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측과의 합의는 612일 남북정상회담 전까지 45000만 불을 지급하기로 하는
내용이었으며,
200069일은 금요일로서 해외은행은
토요일 휴무인 관계로 당일 중으로 송금이 완료가 되어야 하고
그 기간 내에 송금이 잘못 처리되었을 경우 정상회담 개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송금이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몰랐는가요?>
회장은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서
저도 송금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해서 3개사 사장들에게 확인을 하니까,
모두 차질 없이 보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네 개 중 마지막 한 개를 받았다”

한국 시각2000612일 오후 6시,
마카오 현지 시각 오후5시.
우리 정부의 대북 감청기관은 마카오 주재 북한 조광무역 상사에서
평양 중앙당에 긴급 보고하는 국제 전화 내용을 포착했다.
보고자는 조광무역 상사 총지배인 박자병(朴紫炳).
그의 보고 내용은 간단했다. <네 개 중 마지막 한 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송금 차질을 빚었던4500만 달러가 입금되었다는 표현이었다.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 감청 내용은 대북송금 사건이 폭로된
2002년 가을 한나라당에 유출되었고 《월간조선》이 입수, 보도했다.

김대중 측에 김일성 屍身 참배를 강요

200048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누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송금 차질뿐 아니라
김일성 시신(屍身) 참배 문제로 북측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성사시킨 남측의 주역(主役)인
박지원 당시 문광부 장관은 20086월 서울대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전에 마침내 문제가 터졌습니다.
북측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 屍身 전시) 참배를 요구했고,
임동원 원장께서 특사로 평양을 다녀오는 등 노력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평양에서는 KBS 등 사전준비팀을 추방하느니 야단이 났습니다.

평양 방문 일자도 하루가 연기되었습니다.
특검에서도 밝혀졌지만 일자가 연기된 것은 송금 지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언론이 항공사진을 이용해 순안공항에서
평양까지의 이동경로를 예측 보도한 것 등의
보안문제와 순안공항의 수리 미비가 이유였습니다.

평양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할 수 없고,
올 필요도 없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가 오면 더욱 강해지십니다.
저에게 꾸중 한마디 않으시고613일 우리의 평양 착륙을 거부하겠다는
북측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출발하자’고 결정하셨습니다.

서울공항에서 환송식이 열리고
공식 수행원들은 전용기 앞에서 대통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원장께서 황급히 서울공항 청사로 들어갔습니다.
대통령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원장의 미소가 보였습니다.
대통령께 뭐라고 귓속보고를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원장께서 저에게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문제는 평양에 와서 논의하자는
북측의 통보를 받았다’고 알려줬습니다.
우선은 안심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모두들 흥분했지만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저는 북한 상공에 있었지만 북한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박지원 의원의 설명은 그 2년 뒤에 나온 김대중 회고록의 기술과 다르다.
회고록은 북측이 방북을 하루만 연기한다고 통보했다고 썼지,
송금 차질이나 김일성 시신 참배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박지원씨 주장대로 북측이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면
이는 공갈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 갈 때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국민들을 속이고 현대그룹을 앞세워
45000만 달러(물건까지 포함하면5억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냈다는 부담감,
김일성 시신 참배 요구에 따른 부담감을 안고 갔던 것이다.
김정일613일 오전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안내한 후
다시 이곳을 찾아 남측 대표단과 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인민들한테는 그저께(11) 밤에 대통령의 코스를 대줬습니다.
대통령이 오시면 어떤 코스를 거쳐 백화원 초대소까지 (가는지를) 알려줬습니다.
준비관계를 금방 알려줬기 때문에,
외신들은 미처 우리가 준비를 못해서 ( 대통령을 하루 동안) 못 오게 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인민들은 대단히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와서 보고 알겠지만 부족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이틀 전 김대중 정부가 북측이 기술적 문제를 들어
방북 연기를 요청했다고 발표한 것을 뒤집는 발언이었다.
김정일은 이 발언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하루가 늦었는지 알지?
하는 심리적 압박을 넣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외국 수반도 환영하는 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고파서 인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대통령의 용감한 방북에 대해서 인민들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 민족입니다.”

두려운 길을 왔지만 안심하라고
?
마피아 두목이 상대를 불러 놓고 을러대고,
갖고 놓는 듯한 말투이다.

김정일의 협박
다음 날인 14일 오후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대중-김정일 회담이 열렸다.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니
‘갑자기 위원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김대중 회고록》).
김대중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런 취지로 말했다.
“국정원이 대통령의 평양방문 사업을 주도하면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그룹과 아태위(亞太委)가 민간경제 차원에서 잘하고 있어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국정원이 개입하고 임동원 원장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이 달라졌고 사람이 달라졌으니 한번 해 보자고 한 것이다.”
선심을 써서 만나 주는 것이란 투의 이야기를 한 뒤
김정일은 ‘어젯밤 텔레비전을 보고 기분이 상한 게 있다’고 했다.
그는 ‘흥분한 빛이 역력하였다’(《김대중 회고록》).
“남조선 대학가에 인공기가 나부낀 데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
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대단히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공항에서 봤는데 남측 비행기가 태극기를 달고 왔고,
남측 수행원들이 모두 태극기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우리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생각해 봤어요.
어제 김영남 위원장과 회담하고 만찬 대접도 했으니 헤어지면 되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주위에서 만류해서 오늘 제가 나온 것입니다.”

한 배석자에 따르면 김정일의 말은 김대중 회고록의 전언(傳言)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선 회담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시고 푹 쉬신 뒤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노골적인 협박은 마피아 세계에선 상례(常例)이겠으나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폭언이다.
한국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김일성대학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올려도 이를 벌주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엄포조로 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45000만 달러의 뇌물을 먹은 자가 연장자(年長者)에게 그런 말을 했다.
김정일은 협박조의 이야기를 30분간 늘어놓았다.
이런 오만방자한 자세는 김대중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심리전(心理戰)이었을 것이다.

김정일 페이스로 진행된 회담
이 회담에 배석했던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그해 630일 재향군인회 주최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측에서 “모든 문제는 두 분 정상(頂上) 간에 만나서 결정하도록 하자”고 해서
사전에 그런 문제들(세부적인 의제)에 대하여는 전혀 논의가 안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두 분이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보따리를 꺼내 놓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또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쪽(김정일 )에서 처음 이야기가
“우리 정상이55년 만에 처음 만났는데,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7000만 민족의 염원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 7000만 민족에게 뭔가 선물을 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선물을 큼직하게 내놓아야 되는데,
그 선물은 우리 7000만 민족이 원하는 염원이라는 것, 통일 아닙니까?
통일에 대한 방안을 내놓읍시다.
그 통일방안은 역시 고려연방제입니다” 하고 나왔습니다.>

김정일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김대중을 압박하였는데 그런 전술의 목적은
중대 문제를 두 사람 사이의 담판으로 몰고 가 결정적 양보를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북한이 수십 년간 되풀이해 온 이런 방식의 정치적,
총론적 대화를 가장 위험하게 본 것이 역대 한국 정부였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실천 가능한 것부터 논의한다는 실무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김대중-김정일 회담은 북한식으로 전개되었다.
김정일이 여러모로 김대중을 심리적으로 압박한 것도
이 목적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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