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진실을 말한다!
떠돌이 4 385 2006-01-20 11:47:55
5 .18 을 기억하는 모든사람들에게,

광주 민중항쟁!

이북에서 바라본 당시의 이사태를 수십년이 흐른 뒤 바로 사태가 벌어졌던 이나라땅에서 많은 의혹과 황당함,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바라본다.

먼저 여기에 북한에서 온 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북한에 이런 영화가 잇다.



이영화는 당시 광주폭동을 내용으로 하여 만든 영화라는 것은 북에서 오신 분들은 잘알것이다.

특히 80년대.90년대 군대에서 복무하여온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당시는 본인도 북한군에서 보내던 시기이다.

그러면 당시 우리는 광주사태를 어떤 개념으로 바라보았던가.

일명 북한식으로 광주봉기라고 하는 이사태에대하여 군에서는 여러 영화자료들과 강연으로써 남조선 괴뢰도당의 선량한 학생들과 민중폭력에 대하여 철저히 대비하여 일단 명령만 내리면 단숨에 달려내려가 남조선을 해방하여야 한다고 교육시키였다.

실지 많은 영상물을 보면 당시의 사태를 실제로 찍은 것은 사실이라고 볼수 있다.

단한사람도 빠져나가지못하게 봉쇄하고 방송과 언론을 막아버렸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영상물들은 어떻게 찍혀졌을가?

지금은 별로 북한군에서 면전 심리전이라는 교육물 영화를 잘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복무하던시기는 한주일에 보통 4번-5번에 걸쳐 면전 심리전이라던가 남조선에 관한 내용물의 영화나 러시아,중국,쿠바.등 여러나라의 군관련 영상물들을 돌리였다.

80-90년대 복무자들은 기억할것이다.

간단한 실례로 면전심리전 하나만 보아도 거기에 광주사태 당시 무등산에서 자식이나 형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는 시민들의 모습속에서 특이하게 한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볼수 있다.

이름은 정자으로 기억되지만 . 일반 부대들에서도 그인물에 대한 교육울 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우리부대에서의 교육 은 바로 이러하다.

바로 저여자가 남쪽 여색군단 군단장이며 40세이며 저여자가 봉기자로 위장하여 북에서 내려간 우리측 인원들을 색출하여 고발하는 바람에 우리의 작전이 실패하였다고 말이다.

그러면 광주봉기에 북한측 특수부대요원들이 참가하였다는 말인데 어느누구에게도 말할수 있는 것은 북한군 61저격에서 1대대.62저격에서 1대대 두개대대의 병력이 당시 투하되였던 것은 사실이다,이것은 부정할수 없는것이다.

이 특공대의 총책임자가 당시의 61저격 1대대장 이00 이다 .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남쪽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인물이고 광주사태이후 특채되여 태천군관학교 교장 대좌로 승급되였던 것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태천군관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는 북한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은 잘알것이다.

내가 그학교에 입학할때는 교장이 소장이였다.

이 인물이 감옥행을 간내용을 먼저 말하자.

90년대초 리인모가 북한으로 송환된후 사회적으로 쉬쉬하며 많은 말들이 돌았던 것은 어느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중앙당의 어느누가 전쟁때 귀순하고 군부의 어느 간부가 자수하고 등등 리인모가 감옥에서 자수하던 사람들을 기억하여 모두 붙잡게 되였다는 등 간단하게는 이봉원 대장까지도 자수했던사람이고 강건대학 학장도 자수한 사람이고 등등 어느누구 하면서 말들이 많았던 당시의 일들이 기억난다. 그바람에 공화국 영웅도 되고 조국의 안전이 어쩌고 하던 소리들이 많이 돌았던 것을 모두 기억들 할것이다.

80년중반 군부내의 엄청난 혼란으로 정신이 없던 그나날이 기억된다.

7군단 216사태(러시아 군사류학 군사쿠테타조직 일망타진),6군단 외화벌이 부장 차병준 사건,(김책제철 강판을 한국에 팔아 한국측에서 그것으로 탱크를 만들어 전연에 배치하였다던사건)다시이어진 6군단사건 (정치위원 리동석의 지휘하에 거의 100여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반당 조직을 결성하고 군사쿠테타를 일으키려다가 군단장으로 내려온 지금의 김일철 차수에 으하여 적발된 사건) 64해상저격 려단장사건.4군단 정치위원사건.2군단사건 등등 별의별 일들이 많았던 일들을 우리의 어제날의 군인들은 생생히 기억할것이다.

앞에 말한 태천학교교장역시 바로 이런사태에 휘말린사람이다.

내용인즉 어찌되여 광주시내종심으로 침투된 62저격 1개대대 1천여명은 전멸 몰살되고 광주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61저격 1개대대전체가 김일성의 급보로 철수하게 되였는데 이사람은 특수임무수행으로 부대와 떨어져 다음날 귀대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귀대하게된 시간보다 하루 늦게 돌아왔다고 한다.

그이유는 후날 밝혀진 것이 체포되였다가 한국측 정보기관에서 자수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이것도 이인모가 감금된감옥에서 본 얼굴인데 이민모가 그를 알아보고 당에 알렸다는 것이고 두번째이유는 정상적으로 그사람집에 딸라가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무슨 돈이냐 물으면 남편은 그냥쓰기나 하라고 하면서 돈을 받앗다는 것이다.

한달에 5천딸라이면 북한에서는 작은 돈이 아니다. 일본제 중고차 한대값인데 ,,

어찌어찌되여 이사람은 결국 숙청되였다.

내가 이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는 당시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서 당시 학교내에 무려 13명이나 되는 ,전술,유격,격술,공병,등 특수교관들이 전부 당시의 광주봉기참가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사람들은 실지 자신들의 침투와 경험을 우리에게 교육시키였다.

보통 한달에 한두번 정도는 학교장이 직접 광주사태당시를 떠올리면서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경험에 대하여 교육을 주었다.

강원도 지구에서 특히 5군단내에서 복무하던분들은 잘기억하리라 본다.

강원도 김화군에가면 61저격 부대뒤산에 1천명 추모비가 있다,

집체묘라 일컸는 이묘지에는 당시 광주사테에 참가하였다가 희생된 전우들을 조국은 영원히 기억한다는 글들이 쒸여있다.

내가 이부대를 가게 된 것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퇴학당하기 넉달전에 (그때가 대학에 들어간지 1년조금지났으니까 92년이라 기억된다) 전방 실습을 나갔는데 이부대에 편입되였다.

이부대에서는 입대하는 신병들에게 부대에 도착하는 걸음으로 먼저 여기에 모여놓고 숭엄한 충성모임을 가지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그인원으로도 얼마든지 남조선을 해방할수 잇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다음은 당시 광주사태 참가자를 또 보기로 하자.

김일성 사망후 나라는 정말 말할수 없는 기근에 허덕일때이다.

그때당시 복무하던분들은 잘기억할것이다.

이일에 대하여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리라 본다.

육해공군 정치강습소가 9군단산하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재직반이라 할수있다. 현재근무중인 군관들로 대학이나 군관학교 교재로 재교육을 시키는 곳인데 나도 6개월 교육을 마친후 실습을 총참모부산하 31공병사단으로 가게 되였다.

북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공병 31사라고 하면 잘알것이다.

북한군에서 유명한 특수공병사단으로써 그들의 대우또한 녹녹치않다.

그런사단도 공급이 잘안되여 1대대가 전멸하다싶이 영양실조로 근무세울놈이 없을 정도로 벅벅대고 거기에 류마티스인가 하는 전염병까지 돌아 결국 나중에는 그사단이 1개대대 병력만 남고 전부 몰살되다싶이하였는데 그후 이사단은 해체되였다.

그사단에 도착하고보니 사단 공병과장과 반땅크포대대장, 그리고 군사부사단장이 광주봉기때 직접 내려갔던 사람들인것이다.

또 보기로 하자.

함남 함흥에서 내려 영광군에 가면 108훈련소가 있다.

장진호반이 멀지않은 곳에서 우리는 그들과 종종 반특공대 훈련이나 특수부대연합훈련,쌍방 교방훈련을 자주 가지였는데 장진호는 우리부대의 락하지점 6호이다.

그러다보니 그일대에 자주 나가게 됨으로써 그부대 지휘관들과 접촉이 많았다.

내가 만난 그부대의 훈련군관3명과 지휘부의 2명도 광주봉기때 내려갔던 사람들이라고 본인스스로들 자랑삼아 이야기하였다.

북에서 영화(명령-027호)를 보지않은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이영화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북한군 15연구소(격술연구소)대원들이다,

우리부대에 이 연구소 연구원들이 붙어살다싶이 하는데 내가 만난 연구원4명도 당시 광주에 내려왓던 사람들이다.

영화 명령 -027호를 보면 조우재가 특무상사로 나오는데 실지 이인물은 90년대초 대좌 였다.

이사람은 김일성에게서 처음으로 칭호를 받은 공화국 영웅이다.

그사람이 군모를 벗을때면 머리의 20센치가 넘는 꿰맨 흔적이 보이는데 김일성앞에서 시범동작을 보이다가 머리받기로 내화벽돌을 깨던중 부서지지않아 머리가 터진것인데 터진 머리통으로 내화벽돌 3장을 부스러뜨림으로써 김일성이 매우 만족하여 직접 그자리에서 일당백칭호를 선사하고 그후에 또 공화국 영웅까지 된사람이다.

이사람의 말이 참 흥미롭다. 무엇이냐하면 광주사태이후 자기도 사태수습인원에 망라되여 광주봉기 끝난다음 광주에 내려와 한달정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외 나는 부대의 사정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그들중 여러 사람들이 당시에 남쪽으로 내려왓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엿다.

솔직히 이런말하기는 좀 뭣한 이야기이지만 이제라도 북에 있는 군기관 친구들에게 광주사태와 관련 영상물이나 기록집들을 요구한다면 날라올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당시의 사태를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력사를 그대로 남겨야 될 이나라에 기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

나는 귀순하여 관계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으면서 군기관사람들에게 특별히 조사를 많이 받았다.

솔직히 국정원보다 국방부나 기무사의 조사전체라고 볼수있다.

처음에는 조사관들과 싸움으로 시작되여 나중에는 그들과 한담이라도 가질시간때에는 그들에게 묻군 하였다.

왜 한국은 광주사태에 대하여 숨기려고만 하는가,등등

그리고 사회에 나온후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적이 몇번있다.

그러면 이나라사람들은 전부 한다는 소리가 전두환이 정권잡기 위하여 꾸민 일이고 단순한 민중 항쟁이라는 것이다.

참 기가 막힌다.

진실과 허위의 끝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황당하지 않을 수없다.

물론 남이나 북이나 큰 사태가 일어날때마다 서로가 협조하였다는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 핵무기를 만들려다가 미국에서 못하게 하니 박정희가 밸이나서 당시 기술자료들과 원료전부를 북에 보내버리는 바람에 오늘날 북이 핵무기를 가지게되였다는 것은 북에서도 조금 알게된 내용이다,

북한의 핵무기시작을 이것으로 보면 된다.이것은 진실이라고 장담할수있다.

또 이나라 일부 고위급에 속하는 거물 인사들도 인정한 내용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판문점 도끼사건을 기억하여보자.

이것역시 남에서 요청하여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나는 한국에 온후 정보계통의 한인물로부터 들었다. 우리회사의 이사로 있는 사람이 한동안 삼성그룹에서 컴푸터 박사로 있던 사람이다.

이사람이 몇 년전에 북한에 올라가 컴푸터정보기계를 설치하여주고 돌아와 비밀서약까지 했다고 ,그래서 누구의 방에 설치해주고 왓느냐하니 끝내 대답하지는 않았다.

당시 두명이 올라갔는데 밖에도 못나가게해서 열흘 동안 개고생하다가 왔다면서 여담삼아 내게 말하였다. 남북 두나라가 이제는 사회적면을 벗어나 정보계통과 국방분야까지 서로가 정보를 교환하거나 교류를 가지는 것은 숨길일이 아니다.

정권이 바낄때마다 남과북은 여러가지 일들을 만들어 낸다.

서로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쯤은 아무일도 아니기 때문에…

우에 적은 몇가지 일에 대하여 횡설수설하면서 지나간 력사의 진실에 대하여 비록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여러사람들이 파헤칠 이유가 된다고 본다.

더 이상은 외곡된 역사가 되풀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아래에 현재 한국에서 전해지는 당시의 광주항쟁에 대하여 적어본다.

여기에 관심있는 분들은 북에서 알게된 광주사태와 현재 한국에서의 광주사태를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떠돌이 드림.
좋아하는 회원 : 4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제3의눈 2006-01-20 23:28:12
    이거 정말 좋은 글이군요. 놀랍기까지 합니다.
    탈북자분들의 증언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가능해졌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반신반의 하게되는 부분(판문점도끼사건등)도
    눈에 띄기는 하지만 간첩, 특히 북한군 출신의 장교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은 놀랍군요. 사실 광주사태가 간첩들이 연루된 폭동이었다는 이야기 및
    정황등은 많이 검증되었으나 이런 증언은 사실 처음 보게 되네요.

    광주 한복판에 인공기가 휘날리었고 광주사태 발발시 각지에서 광주로
    집결(?) 하려던 간첩들이 많이 잡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북한은 광주사태
    발발시 군부대를 휴전선 부근에 전진배치했으며 광주에서의 폭동을
    충동질하는 대남방송을 연일 내보냈었죠. 사실 광주폭동이 이런 빨갱이들
    모략질로 확대되고 급기야 현재는 미화까지 됐다는걸 남한 사람들도
    얼추 알고는 있습니다만 위 증언은 새롭군요.

    글 내용을 취합해 보면 광주 폭동 당시 많은 북한 엘리트 군인들이
    광주폭동에 참여하였고 그 뒤 다시 북한으로 갔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북한에서 들으신 북한군 출신이나 민간인 분들이
    더 있는지 궁금하네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북한군 2006-01-21 00:39:55
    많아요!!! 아마 북한군복무를 하시다 온분들은 거의가 증언할것인데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re] 황우석 박사님 사태와 나를 보며... ...
다음글
북한의 실상/ 김정일은 개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