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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에 대학 입학
United States 드루스 0 267 2014-04-14 00:27:44
    

클래식 음악은 북한사람이 더 즐겨 듣습니다"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1/11]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박인규 기자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 가난을 못 이겨서, 혹은 반역자로 몰려 더 이상 북한 체제 속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주로 이런 이유들로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말, 한국에 온, 탈북자 김철웅씨는 좀 색다른 이유와 색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북한의 상류층이라도 대단히 입학하기 힘들다는 〈 평양음악무용대학 〉을 졸업하고 러시아로 유학까지 다녀온 전도 양양한 청년이 왜, 떠나야 했던 것인가.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한국에 와서 새로운 음악인생을 열어가고 있는,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와 함께 합니다.

지금 흐르고 있는 음악은,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라는 곡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귀에 익은 멜로디이지만, 김철웅씨가 북한을 떠나게 만든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김철웅씨(33세)는, 북한을 탈출한지 1년 만에 중국을 거쳐, 2002년 12월에 한국에 왔습니다.〈평양음악무용대학〉을 무용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 유학을 한 경험도 있으며, 탈북한 이후 한국에 와서, 현재 한세대 음대에 출강하면서, 개인연주회 연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박인규 : 김철웅씨, 안녕하십니까?

김철웅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탈북자 분들이 몇 분 저희 프로그램에 나오셨지만 김철웅씨는 예술을 하셔서 그런지 북한출신이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세련되셨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드네요.

김철웅 : 감사합니다.(웃음)

박 인규 : 지금 '가을의 속삭임'이라는 곡을 저희가 들려 드렸는데요. 리차드 클래이더만의 음악은 한국에서는 굉장히 보편적인 음악이고, 왠만한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도 배경 음악으로 많이 깔리는 곡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음악이 김철웅씨를 북한을 떠나게 만들었다..라는 사실에 한국에 있는 분들은 약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 왜 이 곡이 북한을 떠나도록 만들었는지 설명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김철웅 : 제가 리차드 클래이더만을 처음 들었을 때가 러시아에서 유학 당시였는데요. 그곳에서도 시내를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습니다.

박인규 : 유학을 하시게 되면 대부분 기숙사에 있으셔서 그런가요?

김 철웅 : 저희들은 대사관에 있었습니다. 그 대사관에서 어쩌다가 여가시간이 있어서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갔어요. 그 때 처음 리차드클래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을 들었어요. 그때 제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북한에서는 1899년까지 나온 클래식 낭만파와 19세기 말까지의 음악을 배워주고, 그 이후에 현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은, 사상 경력에 따라 구분해서 배워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로 인해서 저는 그 때까지 클래식은 1899년 이후로 모두 끝난 줄로만..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모르고 있었는데요. 재즈라고 하면 북한에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서방의 가장 사악한, 퇴폐적인, 인간의 정신세계를 흐려 놓는, 또 사악한 음악의 한 종류로..' 북한 말로 재즈를 자즈라고 합니다. '자즈'라는 그 음악 장르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불법이 되는, 듣기만 해도 잡혀가는 금지곡이죠. 그런데 그 금지곡을 제가 처음 커피숍에서 들었는데 그 곡이 재즈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 곡이 왜 금지 곡일까?

박인규 : 굉장히 감미롭고 달콤한 멜로디이고..

김철웅 : 지금까지 북한에서 쳤던..저는 의외인 것이 물론 피아노 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반면에, 한국에서는 여자분들이 피아노를 많이 치잖아요.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북한에서는 남자들이 피아노를 많이 쳐요. 피아노를 보게 되면 한국에서는 잘못된 편향이 있는 것이 여자들의 악기라고 자꾸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은 피아노는 남자들의 악기 이거든요.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을 보면 모두 남자잖아요. 그것이 그와 같이 우리는 서구적인 음악 이념보다도 동구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박인규 : 우리라는 말씀은 북한을 말씀하시는 거죠?

김 철웅 : 네. 북한이죠. 그 사람들의 음악 세계를 많이 전수 받아서 어떤 잔잔한 음악보다도 스케일이 많이 웅장하고 폭풍과 같은 음악..이런 음악을 치다보니까 거의 차이코프스키의 곡들을 즐겨 쳤어요. 그렇게 치던 저에게 리차드 클레이더만이라는 재즈라는 음악은 저에게 너무 충격적인..음악은..뭐라고 할까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그 느낌이라고 할까요?

박인규 : 그러면 그 음악을 그 때 들으셨기 때문에 나오시게 된 것은 아니죠?

김 철웅 : 그 곡을 들으면서 저 곡을 꼭 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치고 싶어도 그곳에서는 악보를 구할 수가 없어요. 들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러시아에서 들었던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서 북한의 평양에 와서 한 번 쳐봤어요. 연습방에서 혼자..

박인규 : 딱 한 번 들은 기억으로..?

김 철웅 : 한 번은 아니었죠. 러시아에 있을 때는 종종 들었죠. 그 곡을 쳤는데 북한에는 보위부 일꾼이라고 해서 여기서는 국정원 사람들과 같은..국내의 반탐기관으로 항상 정치적으로 문제성이 있는지..상주하고 있는 보위부 특파원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서 제가 그 곡을 쳤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사람들의 방에 들어가서 거의 시말서를 10장 가량 썼던 적이 있었어요. 그것을 쓰면서 저의 생각이 와, 내가 음악을 8살 때부터 음악대학을 다니면서 유학까지 거의 배우기만 한 18년을 배웠거든요. 그 18년 동안은 정말..어떤 때는 피아노를 17시간을 치면서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피아노를 열심히 쳤는데요. 그 이유가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을 가지고 싶고, 내가 원하는 곡을 모두 치고 싶고, 음악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하기 위해서 이 음악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시말서를 써야 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 내 자신이 아이러니한 느낌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박인규 : 그때는 말하자면 처벌이라고 할까요? 그것이 그냥 시말서를 쓰는 것으로 끝난 겁니까?

김철웅 : 그 정도로 끝났어요. 왜냐하면 배경도 그랬었구요. 그 사람들도 이해는 하죠. 이해는 하지만 이것은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시말서를 쓰게 한 거예요.

박인규 : 그것을 쓰실 때가 몇 년쯤 되나요?

김철웅 : 2000년 입니다.

박인규 : 그럼 한 일년 후에 떠나시게 된 건데 그 때부터 북한에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김 철웅 : 이미 러시아에서... 저는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던 북한의 한 사람이었거든요. 북한에서는..제가 원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고, 내가 원하면 모두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내가 러시아에 가면서 깨졌어요. 아..내가 생각하고 있던 자유로움보다 더 많이..내가 생각했던 자유로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음악가의 자유..그것이 가장 크면서도 원래 음악가들이란 가장 구속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워낙 그런 끼가 풍부한 데다가 그것을 느끼게 된 이후로는 정말 그 사회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할까요? 우리에 갇혀지는 짐승 같은 그런..살아가면서 빨리 탈출해야 겠다..그런 생각을 했어요.

박인규 : 김철웅씨 같은 경우는 본인도 말씀하셨지만 상당히 북한에서는 상류층이시고 편안한 생활을하셨는데 탈북하시게 되면 가족에 대한 피해라든가 이런 걱정들도 있었을 텐데요. 그래도 용감하게 나오셨어요?

김 철웅 : 제가 솔직히 나온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못 견디는 사람들이 음악하는 사람들어서 그것이 음악가의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 무엇과도 음악은 바꿀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한국을 목표로 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음악만 자유로운 나라는 어디든지 좋다고 생각하고 떠났어요.

박인규 : 그런데 한국에 오시게 된 것은..?

김철웅 :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중국에서 한국 선교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그 분들이 안내를 해 주셔서 한국에 오게 됐어요.

박인규 : 올해 나이가 33세이신데 8살부터 음악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음악을 하시게 된 것은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부모님께서 음악을 권해서 하시게 된 겁니까?

김 철웅 : 어렸을 때 생각은, 부모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제가 3살 때부터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면 손뼉을 치고 즐거워했대요. 그래서 부모님들께서 '저 아이가 음악에 끼가 있구나..' 저희 집안은 4대에 걸쳐서 음악가로는 한 명도 없으세요. 그 때 제가 음악대학에 입학 할 당시 북한에서는 김정일위원장이 선동부장을 하시면서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이나 그 사람들에 대한 특혜를 많이 줬어요. 그래서 저의 부모님들의 계산으로 놓고 볼 때는 예술분야에 들어가면 일생 먹고 사는데에는 걱정이 없겠다..재능과 끼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셨어요. 거의 강요라는 말은 할 수 없겠지만 부모님들의 속 계산 때문에 하지 않았나..

박인규 : 그럼 8세부터..제가 재작년인가에 만경대소년궁전에 가니까 피아노를 놓고 많이 가르치더라고요? 그러면 그런 곳에서 배우신 겁니까? 아니면 개인 교습으로?

김 철웅 : 만경대..평양에 가장 학생들의 레벨을 놓고 보면 음악하는 학생들의 레벨을 놓고 보면, 만경대 소년학생단도 물론 전문과정이 있어서 학부과정이 꽤 높지만..그 과정은 어릴 적에 끝나는 거에요. 전문가로 키우는 것이 아니고 속성적으로 어릴 적에 어떤 강압적인 빨리 속성적인 방법으로 그런 아이들은 기초가 약한 거예요. 당장 무대에 내세워야 하니까..그러나 우리는 절대 어릴적에는 무대에 서는 일이 없어요. 모두 졸업한 후에 진짜 예술인으로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프로교육은 평양음악무용대학..

박인규 : 여기는 대학생 과정이죠.

김철웅 : 우리는 8살 때부터 대학생이 되는 거예요.

박인규 : 평양음악대학에 들어가신 것이..?

김철웅 : 8살이예요.

박인규 : 신동이시네요? 어릴 때부터..

김철웅 : 신동은 아니고요. 그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박인규 : 그러면 몇 년을 다니시는 거예요?

김철웅 : 14년 동안 다녔어요.

박인규 : 대학을..?

김철웅 : 네.

박인규 : 굉장히 힘들다면서요?

김철웅 : 힘들죠.

박인규 : 한 해에 몇 명이나 들어갑니까?

김철웅 : 한 해에 제가 8살 때 입학 당시에는 9명이었어요. 수험생이 6천명이었는데 9명이었어요. 그러니까 계산을 해 보니, 669대 1..그 정도인데요.

박인규 : 14년 동안 계속 피아노 연습만 하는 겁니까?

김철웅 : 그렇죠. 그런데 8살때부터 초등학교 과정이잖아요. 들어가면 그 학교에 800명의 학생이 있는데 교직원이 1700명이예요. 선생님이 더 많은데요. 들어가면 1대 4예요.

박인규 : 학생 한 명에 선생님이 네 분..? 굉장하군요.

김 철웅 : 한 명이 전공교수하고, 두 번째가 음악이론교수, 세 번째가 일반 과목들 있잖아요? 네 번째가 생활담당 선생까지..이렇게 4명의 선생님이 붙고요. 음악대학에 들어가면 일단은 북한에서는 군대를 못 가요.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왜냐하면 전부 국가의 재정으로 무료 교육이기 때문에 음악을 그렇게 투자를 많이 해서 시켜서 군대를 보내면 손해잖아요.

박인규 : 여기서 말하면 국보급 예술인이군요?

김철웅 :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북한은 국가가 모두 투자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밑지는 일은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선택 자체가 매우 어려운 시험과 정말 고도의 엄선된 사람들만 뽑으려고 해요.

박 인규 : 저는 대학이라고 하면, 스무 살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덟살에도 대학을 간다는 것이 신기하고요. 남한에서는 사실 북한의 일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른바 가극..이른바 피바다라든지, 아리랑과 같은 것이 굉장히 강하다라고 하면서 이른바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 같지는 않아요. 북한의 클래식 음악의 수준이 어떻습니까? 남한이라든지, 세계랑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철웅 : 클래식 쪽은 아무래도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19세기에서 끝나고요. 그런 부분들도 있지만,클래식 수준을 높고 본다면 제가 생각하기에는..한국사람들보다 오히려 클래식은 북한 사람들이 더 즐겨 듣지 않나..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왜냐하면 한국사람들은 워낙 듣는 음악이 다양하잖아요. 취미도 각양각색이고, 취향도 각양각색이고요. 북한 사람들은 북한가요 전체가 전부 클래식한 부분 밖에 몰라요. 그것이 너무 숙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서..예전에 한국가수가 북한에 갔었잖아요? 가서 북한에서 썰렁한 반응을 받았잖아요?

박인규 : 전혀 들어보지 못한 가요니까 생소한 것이군요?

김 철웅 : 너무 생소한 거죠. 전혀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생각에는..그런데 오히려 여기에 있는 오케스트라가 가서 클래식을 연주하면 오히려 박수가 나왔을 거예요. 이런 속에서 여기 사람들은 흔히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흔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아..북한은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 자체도 거의 야만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화적 수준차이도..너무 무지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오히려 그와 반대로 문화적 수준차이는 좀 더 건전하고 높지 않나..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오히려 고전 음악이나 미술이나 성향은 이곳보다 높다? 남한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김철웅 : 잘 모르기 때문에..

박 인규 : 북한 분들이 어떤 고전음악이나 고전미술에 대해서는 성향이 더 깊을 수도 있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 말씀하신 중에 19세기까지만 가르쳐 주고 이른바 20세기 현대에 있어서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이유로 말하자면 금지곡도 있고 제한을 두는 곡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 기준이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그런 것입니까?

김철웅 : 네. 작곡가의 창작자의 사상 경향에 따라서 구분이 되는데, 북한에서의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과 다른 것이, 북한은 철저하게 그 예술 자체를 자신들의 체제유지의 선동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거죠. 자신들이 추구하는 색깔 외에 다른 색깔이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미술의 경우에도 추상파 미술을.. 피카소라든지..그런 작품들을 보고 느끼잖아요? 그러나 느낄 수가 없어요. 그곳에서는 보여지는 것이 확실해야 해요. 그것도 구체적으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나 어떤 사회주의 생활 범위 내에서..그 사회주의 생활을 보여주는 그런 것이 너무 확실해야 하고 예술도 똑같아요.

박인규 : 체제의 목표에 봉사해야 하는..

김철웅 :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음악 대학의 교재 같은 경우에도 북한 자체 내의..연습곡 같은 것을 보면 외국 곡들..체르니 100번부터 시작했다면 30번, 40번..이렇게 넘어가잖아요? 그러나 그곳은 체르니 100번도 물론 치지만 자국 북한연습곡들이 따로 많이 있어요. 교수님들이 만들어 놓은 것..그리고 곡 자체도 북한의 자체 피아노 곡들이 많아요.

박인규 : 그런 식으로 어떤 음악이 됐든, 미술이 됐든 그런 것들이 체제의 목표에 부합이 되지 않으면 인정될 수 없다고 하면 그곳에 계시는 예술가 분들로서 상당히 답답해 하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김철웅 : 8세부터 그런 것으로 음악과 배워주는 것이 그런 충실성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세대는 유학만 가지 않았으면..아마 그곳에서 빨간색을 유지하면서 살았을 겁니다.(웃음)

박인규 : 러시아만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북한에서 최고다. 괜찮은 예술가다라는 만족으로 살 수 있었다?

김철웅 : 그렇죠. 나름대로 자화자찬이 크기 때문에 저도 최고인 줄 알고 살았겠죠.

박 인규 : 그렇게 해서 2002년 말에 남한에 오셨습니다. 이제 2년 남짓 생활을 하신 건데 대게들 탈북하신 분들이 남한에 오시면 문화 충격이라고 할까요? 너무 달라서 그런 것들을 느끼신다고 하는데요. 한국의 음악계를 보시면서 어떻게 이런 점이 다르다고 느끼신 것이 많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김철웅 : 음악계를 제가 아직은 다 봤다고는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음악교육인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거든요. 전문 프로교육 쪽이 아니면 음악 교육이 아닌 줄 알았거든요.

박인규 : 그러면 북한에서는 재능이 있는 사람만 가르치는 군요?

김철웅 : 그렇죠.

박인규 : 남한에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데..

김 철웅 : 네. 그런 것이 충격이었고 그리고 학원이라는 개념을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피아노학원을 정말 높은 수준으로 생각을 해서 학원 강사를 2개월 정도 한 적도 있었어요. 그 2개월을 하면서 그만두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새벽에 출근을 했는데 원장님께서 피아노를 치시는 거예요. 저는 원장님쯤 되면 피아니스트인 줄 알았거든요.(웃음) 깜짝 놀랐어요.

박인규 : 말하자면 원장님 실력이 생각보다는 아니었다?(웃음)

김철웅 : 전공자도 아니었어요. 비전공하신 분들도 원장을 많이들 하시잖아요. 그런 현실도 몰랐고, 또 처음에 와서는 카페에서 피아노 치시는 분들 있으시잖아요? 라이브..저는 그것을 영화에서 볼 때는 멋지게 보이더라고요.

박인규 : 그럼 그 때 처음 보신 겁니까?

김 철웅 : 네. 화곡동에 있는 카페였어요. 한 보름 정도 일을 했는데 제 육체가 따라주지 않았어요.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낮에만 자야 하고..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한 보름 정도를 하면서 느낀 것은 '아, 이곳에서 음악가는..나는 공부만 하면 음악예술단에 보내주고 그랬었는데..'

박인규 : 모든 생활에 보장이 되니까..

김철웅 : 네. 가장 힘든 것은 내 손으로 내가 먹을 것을 찾아 먹어야 하고..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찾아 해야 하고 무엇이든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철저한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을 느꼈어요.

박인규 : 그런 말씀을 하셔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대부분의 탈북하신 분들이 한국에 오셔서 생활기반을 못 잡으신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김철웅씨 같은 경우는 그런 생활의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김 철웅 : 생활 기반을 놓고 볼 때, 저는 이곳에 오게 되면 통일에 관한 교육이 있는데요. 그 교육과정이 중요한 것이, 다른 교육과정의 참관은 나와서도 실컷 할 것이고.. 그런 교육보다도 저는 자본주의 원리를 똑바로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인규 :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김 철웅 : 그렇죠. 자본주의 기본원리를..탈북해서 오신 분들은 정말 고등학교도 못 들어 가신 분들, 중학교도 못 들어 가신 분들, 초등학교도 못 들어 가신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그것을 확실하게 이론적으로 말고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그런 교육을 강화했으면 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해도 먹고 살고 안 해도 먹고 살았어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을 안 하면 못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야 하는데 이곳에 흔히 오시는 탈북자 분들을 보면 기대가 이곳에서는 거리에 낙엽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돈이 줄 아는 기대를..편하게 생활은 보장되어 있다는..그런 기대를 너무 크게 가지고 오다 보니까..그 좌절감 때문에 일어 설 엄두를 못 내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냉혹한 현실인 곳이 이 사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을 많이 시켰으면 합니다.

박인규 : 본인은 어떻게 2년 남짓이 지나셨는데 남한사회에 적응이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철웅 : 적응이 됐다기 보다도 돈 만원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웃음) 처음에는 뭘 모르고 흔히 처음 보는 사람도 밥을 같이 먹자..밥도 너무 자주 사 주시고..처음에는 제가 학교에 교수로 출강을 처음 할 때 밥을 제일 많이 사주는 제일 좋은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1위로 꼽혔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별 볼일 없는..(웃음)

박인규 : 올해 3월부터 대학원에서 북한 문화에 대해서 공부하신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김 철웅 : 네. 제 나름대로의 거창하다면 거창한 이유인데요. 처음에 넘어 올 당시에는 피아노 한가지만을 보고 넘어왔는데 넘어 오고 나니까..내가 피아노만 쳐서 될 수 있는 음악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단을 안고 있는 이 한반도에서 이 시대의 음악인으로서 북에서도 살아 봤고, 남에서도 살아 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공통점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인데..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북한을 남한 사람들이 너무 몰라요. 그래서 제가 자꾸 말을 해주는데요. 저는 북한 식으로 생각하고 북한을 말 하잖아요. 왜냐하면 북한에서 살아봤기 때문에..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남한 사람들이 보는 북한을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북한대학원을 지원하게 됐어요. 제가 남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북한을 알아서, 남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생각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북한의 그 경험들을 알려 준다면, 좀 더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박인규 : 한국 땅에 오셔서 하시고 싶은 재즈라든지, 모든 음악들 잘 해 주시고 또 남북한의 예술교류, 문화이해에 많이 기여해 주시기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김철웅 : 네. 감사합니다.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8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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