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하려면 이렇게 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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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과 비슷한 기록을 삼성 창업자 이병철도 남겼다. 유학을 위해 탄 연락선에서 1등 선실 근처로 갈 때였다. 일본 형사가 가로막고 막말을 던졌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게." 그는 "후일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한 그 조그마한 사건 때문"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이병철은 패전으로 폐허가 된 전쟁 직후 도쿄의 허름한 이발소 이야기도 함께 기록에 남겼다. 주인에게 "이발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었다. "제가 3대째니까 가업(家業)이 된 지 이럭저럭 한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는 "일본은 절대 망하지 않고 재기(再起)할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고 썼다. 1983년 8월 이병철이 후배 박태준을 일본 휴양지로 불렀다. '부메랑 효과'를 내세운 일본 철강업계가 광양제철소 건설에 협력을 거부할 때였다. 휴양지에는 당시 일본 정·재계의 막후(幕後) 거물 세지마 류조, 그리고 10여년 전 포항제철소 건설을 지원한 일본 철강업계의 대부(代父) 이나야마가 함께 있었다. 이들에게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둔 이병철은 "다른 말은 말고, 고맙단 인사만 드리라"고 박태준에게 말했다. 박태준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병철도 비슷한 고비를 넘겼다. 5개월 전 발표한 삼성의 역사적 반도체 투자는 핵심 기술을 제공한 일본 반도체 업체 샤프의 역할이 컸다. 일본이 처음 해외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사례였다. 이병철은 "샤프의 각별한 호의(好意)였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샤프를 국적(國賊)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고 했다. 한·일의 가교 역할을 한 세지마 류조는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은 통일된다.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한국의 감정(感情)을 포용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통일 한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박태준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자식을 키운 아버지의 임종(臨終)을 지키지 못했다. 일본 총리 후보였던 유력 정치인과의 저녁 약속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던 1980년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했다. 그날 박태준이 국익을 위해 약속을 취소하지 못한 일본 정치인은 아베 신타로, 현(現)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다. 그는 평생 한국과의 우호에 힘을 쏟았다. 다음 날 박태준은 아버지의 이런 유언을 전해 들었다. "울지 마라. 열심히 살고 간다." 거인(巨人)들의 시대였다. 물론 그때도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큰 흐름은 거인들이 가슴에 품은 '대의(大義)'에 따라 움직였다. 풍요를 얻어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 나라가 늙어 포용력이 사라진 탓일까. 그 시대를 읽으면 지금 한·일 관계는 작고 얄팍하다. 유치하고 졸렬하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은 소설가 이대환님의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2005년 개정 12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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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쪽바리넘들이 개기는 꼴 못봐주긋더라.
존엄을 저버리고 실리를 챙기자? 음~~공감이 안가는........
경제는 경제이고 정치는 정치이다.
지금은 일본도 경기가 개꼴이라서 우리만 급한게 아니지.
급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야 ~~ 궂이 우리가서두르지않으면
일본이 스구리고 들어오게 되어있어........
현재의 일본은 정치도덕적으로도 아주 패륜아 수준이야~~
일본의 정치는 정치가아니구 아주 동네 양아치 수준이지.....
너같은 건 일본의 발다박보다 더 더럽다
천하에 상종하지 못할 인간쓰레기
이방도 망할 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