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도전의 기록 -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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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샘이 깊은 물> 옛날에 어떤 임금이 궁정 뜰에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가 아랫사람들이 그날 지낼 제사의 제물로 쓰게 될 소 한 마리를 끌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소라는 짐승은 영물이어서 본능적으로 코 앞에 닥친 죽음을 감지하고 끌려들어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있었으며 그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였고 그 울음은 구슬펐다. 이에 측은한 마음이 움직인 임금은 아랫사람들에게 그 소를 당장 살려 주라고 우악스러운 명령을 내렸다. 아랫사람들은 임금에게 물었다. "이 소를 살려 주는 것은 좋으나 그러면 제사에 쓸 희생이 없는데 어찌 하옵니까?" 임금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무 데서나 양을 한 마리 잡아 와서 제수로 쓰면 되지 않는가!" 맹자는 이 딱한 임금의 마음을 이렇게 위로한다. 곧 이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고 오히려 당신에게 어?마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당신이 소는 살리라고 하rh 양은 죽이라고 한 것은 소와 양을 차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어진 마음이란 이렇듯이 눈앞에 보이는 사물에서부터 촉발되는 것이고 눈에 뜨이는 생명의 가련함에 대한 측은한 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이 눈 앞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측은한 정을 점차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에까지도 확장해 나아가면 마침내 천하의 어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천하의 어진 임금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라고 했다. 이 역설적인 진실은,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그다지 편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확장해 나아간다는 일처럼 어려운 것은 彭?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의 저자인 조갑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끔찍한 살인의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 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사형 존치론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주로 대중 매체를 통해 범행현장이나 범인의 악독성을 생생하게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에서 증오심이 우러나온다. 오죽했으면 강도, 강간범에 대한 '공개 처형'까지 거론됐을까. 한편 사형 집행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돼 있다. 교도소 담 안의 어느 밀실에서 이뤄지는 이 '합법적인 살인'은 국가 기밀도 아니고, 그 상황의 공개를 어느 누가 법으로 금한 적도 없지만, 좀처럼 사실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집행에 참여한 사람을 꺼림칙해서 입을 다물고, 언론도 사형집행을 현대의 신화로 남겨 놓고 싶어한다. 사형 비밀주의는 결국 사형 제도의 존재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세계 형사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모른다'는 것은 가끔 무관심이나 증오로 이어愎?…사형 집행을 목격한 판사는 그 뒤로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한번쯤은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끔찍한 사형 집행 장면을 일반인이게 공개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양에서 흔히 사용되는 육시처참이라거나 거열형이라거나 하는 것도 흔히 저자 거리에서 공개리에 집행되었다. 미셸 푸꼬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십륙 세기에 프랑스에 국왕 살해범으로 체포된 어떤 죄수에 대한 공개 처형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처형 방식은 예컨대 칼로 살갗의 일부를 얇게 떠낸 뒤에 그 자리에다 양초를 바르고 그 양초를 불에 태우는 식이었으니, 실로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인간 고통의 극치를 보여 주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눈 앞에 보이는 야만"의 시대는 가고 오늘날에 와서는 사형 집행도 "문명화"되어 있도록 고통이 적은 교수형이나 전기 의자형 따위가 채택되에 되었으며 처형 장면을 일반에 공개하는 일도 없어졌다. 이것으로 살인범에 대한 수사, 재판 및 처형에 관여하는 국가 공권력은 적어도 그 살인범이 한 것과 똑같이, 또는 오히려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비난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조용하게 또 고통이 덜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인도적"인 일이 될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일에 그것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한다면, 칼날 아래 목이 잘려 죽거나 총알에 맞아 죽는 대신에 밧줄에 목매달려 죽는다고 하여 더 "인도적"이며 덜 "야만적"인 처우를 받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에 우리가 끔찍한 공개 처형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 죽음에 대하여 갖게 되었던 깊은 관심을, 이제 더는 우리 눈 앞에는 그 같은 끔찍한 장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여 버리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인도주의의 탈 아래 은폐된 국가의 야만은 오히려 더욱더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자들, 특히 사형수들은 흔히 사회의 쓰레기처럼 여겨진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사형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사형수를 본 일도 없기 쉬우며, 이웃이나 친척, 친지 중에도 사형수거 있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자, 사형수들에 대한 무제는 경찰, 검찰, 법원 또는 교도소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억울한 사형수"의 문제에 대하여는 인권의 최후 보루"이 사법부가 있지 않은가, 병은 의사에게 맡기고 교육은 학교에 맡기듯이 재판은 판사에게 맡겨두면 되지 않는가, 검사, 판사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제도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사법제도에 대한 이 같은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드물게 보는 공재 도전장이다. 저자는 참으로 놀라운 집념을 가지고 이 사건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한두번 "정을 통한"일이 있는 유부녀 두이분 씨와 같이 살기 위하여 남편과 두 아이를 목졸라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수가 되었던 오휘웅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나가 돗자리 위에 앉아서 당당한 태도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저는 절대로 죽이기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도록 해 주십시오. 여기 검사, 판사도 나와 있지만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엉터리 재판 집어치우십시오! 죽어서 원혼이 되어서라도 위증하고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들에겐…." 저자는 이 유언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지난 세 해 동안 해묵은 방대한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낱낱이 섭렵하고 관계자 수 십명을 찾아다니며 세월 淡?파묻힌 이 사건의 진상을 캐기 시작했다. 저자가 만나 본 바에 따르면 오휘웅의 변호인이었던 변호사들은 오휘웅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고, 일심 재판장으로서 사형을 선고하였던 전직 법관은 스스로가 선고한 판결에 대하여 끝내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괴로움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밖에도 저자는 합리적인 이유에 입각하여 오휘웅의 결백함을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관계자들의 증언을 확보하였으며 그리하여 법원이 유죄판결의 논리적인 근거로 제시한 여러 가지 설명의 허구성을 낱낱이 통렬하게 드러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물론 이 사건을 직접 담당해 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사건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일도 없는 나로서는, 오휘웅이 결백함을 확신하는 저자의 결론에 선뜻 동조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이 흥미진진한 책을 거의 단숨에 읽어 내려간 나에게 슬프고도 무거운 감동으로 울려 온 것은 우주 전체의 무게와도 바꿀 수 없다는 한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끝내 앗아간 이 엄청난 형사 절차에서, 경찰관, 검사, 판사를 비롯한 어떤 관계자도 최종적인 책임을 떠안을 용기와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고 "제도"라는 괴물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였다. "대한 항공 007편 점보기에 미사일을 쏜 소련 전투기 조종사는 칼로서 269명을 차례로 찔러 죽인 것과 똑같은 결과를 불렀다. 그러나 그 조종사는 …말할 것이다. 내가 한 일이란 발사 단추를 누른 것뿐이었지 않은가라고." 저자의 이 격렬한 항변에 대하여 나는 몇 마디 덧붙이고 싶다. 경찰, 검찰이 그릇된 수사를 하고 판사가 오판을 하여 무고한 생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결백할까? 그 형사 사법 제도를 유지하고 방치한 것은 누구일까? 우리는 눈을 뜨고 지켜 보아야 한다. 그 노력으로 일환으로 쓰여진 이 절절한 기록-「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결코 외면되어서는 안된다. <조영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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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한 개인 으로서 는
분명 맞는 말이나
한 조직의 일원 으로서
혹은 한조직의 양영력있는 위치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는
좀 그래네
요
할말은 아닌것 같은
그냥 윗선에서 시키니까
하라고 하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슬픈일 입니다 요즘 한참 유행하는 제2의 광우병
메 뭐시냐
아~이구 또 까먹었네 메 메 메.....
암튼 메 뭐시기 처럼
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