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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수기- 멈출 수 없다.
Korea, Republic of 북한군 1 950 2015-11-01 06:25:57

-멈출 수 없다-

  2004년2월, 꿈결에도 그리운 대한민국의 품에 이 몸은 안겼다. 이 땅에 안겨서야 비로써 나는 지난 30여 년을 북한의 더러운 시궁창에서 헤매던 그 삶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좋은 황금시절만 맛볼 수 있었다.

 

 사실, 보탬은 고사하고 잘못된 세뇌에 의해 한때는 이 땅을 적으로 간주했던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운 대한민국정부는 병든 자식 더 귀해하는 친어머니심정으로 상처 많고 파란곡절 많던 나를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평양에서만 볼 수 있을 세 칸짜리 화려한 아파트집은 물론 정착에 필요한 생계비까지 지원해주었다.

 

 따라서 그 사랑이 깊어질 때마다 나의 심장은 언제나 이 땅에 단단히 발을 붙여야 한다는 결심으로 굳어지군 하였다. 하지만 무엇으로 이 땅을 받든단 말인가? 나에게 천 만 량의 돈이 있어 돈으로 받들겠는가? 아니면 산을 떠 옮길 힘이 있어 힘으로 받들겠는가? 가진 것은 오직 양심뿐이었다.

 

 고마운 대한민국정부 앞에 지닌 깨끗한 양심,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진 밑천이었고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만은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듯이 생활은 언제나 결심보다 실천을 더 요구했다.

 

 내가 30여 년을 살던 북한과는 달리 이 사회는 하루를 놀던, 백날을 놀던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대를 간섭하는 그 어떤 외부적 요인의 상실은 이런 나로 하여금 오히려 호랑이 없는 심산에 토끼가 왕이라는 착각을 불러왔다.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정착을 위해선 어떤 뾰족한 수든, 네모난 수든 내야 했다.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도 돈부터 벌어야 한다는 의욕이 앞섰다. 그래서 하나원의 정착교육과정을 무시하고 기술 따윈 배우려하지 않았다. 지방거주와 함께 일상생활에 절실한 운전면허만 따고 전라도의 낙농가들을 돌며 젖소의 발톱다듬기에 나섰다.

 

 그 나날에 펼쳐진 일당 6만원벌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8시간 이상을 젖소의 배설물과 땀으로 사투를 벌리는 것을 떠나서 몸에 밴 악취는 상대가 역겨울 정도였다. 거기에 하루인건비의 불규칙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었고 스피드와 힘을 동반한 육체, 그리고 계속되는 홀아비의 생활패턴은 나를 점점 미궁으로 몰아갔다. 제멋대로 해석하고, 모대기고, 허세를 부리며 거침없이 동분서주하던 욕심은 결국 8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북한에서 받았던 고문후유증의 여파가 밀려들면서 허리디스크로 오른 쪽 다리가 마비되었던 것이다.

 

 119 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된 나는 결국 수술대위에 올라섰다. 실망으로 가득 찬 병원생활, 거기에 면회 한 번 없는 혼자의 고독, 그리고 옆 사람들의 지나친 동정은 가득이나 의기소침해진 이 가슴을 허볐다. 물위에 뜬 부평초의 신세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조기퇴원을 하고 말았다. 잘못된 시행착오 앞에서 이처럼 내가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했을 때는 벌써 몸은 망가졌고 모든 일은 그릇 친 뒤끝이었다.

 

 탄식과 절망으로 독수공방의 나날을 보내던 그때, 나의 탈피를 도와준 은인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정부였다. 입원비를 절반 넘게 부담했으며 비관에 빠지지 말라고 생계비까지 상승해주었다. 이는 부러진 날개를 추켜세우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북한 같으면 쓰러져도 몇 번은 더 쓰러졌을 정신이었고 육체였다. 비약의 무지개와도 같은 그 사랑에 비록 늦은 감은 들어 소 잃고 외양 칸 고치는 격이었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용접이었다.

 

 2007년3월, 인천에 있는 한국폴릭텍대학으로 입학할 기회가 왔다. 교정의 꽃대 문은 이런 나를 어서 오라 반겨주었다. 사실, 내 인생에서 직업학교는 처음이다. 성분의 기준에 따라 대학은 물론 전문기술도 배우기가 힘든 북한에서 언제나 꿈으로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직업학교였다. 때문에 학교 내의 구석구석은 참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가 기술을 익혀야 할 이곳은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천당이었다. 북한과는 그 차원부터 달랐다. 배우는 학생에게 국가가 달마다 20만원씩 지원해주는 사실을 그곳에선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이런 곳에서도 제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생길을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15년 만에 책상을 마주한 나에게 모든 것은 어설펐다. 나이도 제일 많았고 우선 머리가 굳어 공부를 하려해도 한 번 본 내용은 계속 잊어버릴 정도였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기시험부터 쳐야하는데 도무지 그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도 서지 않았다.

 

 한 달을 우왕좌왕 하던 끝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북한에서 더럽게 길들어진 자기 자신을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배움에서 체면 따위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래서 모르는 문제나 단어가 있으면 나보다 10년, 지어 자치동갑이 되는 학급동생들에게 물어보며 허심하게 배웠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용접의 기초적인 문제들은 이러한 과정에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허나 자만도 잠시, 이제 막 젖먹이에 불과한 나에게 용접필기시험문제집이 복병처럼 달려들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던 끝에 굳어진 머리의 상심으로부터 일단 2050문제나 되는 문제집을 5번 이상 풀어보기로 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2번 풀었을 때 전체적인 윤곽은 드러났고 3번 풀었을 때엔 벌써 50%의 문제를 맞힐 수가 있었다.

 

 그 과정에 틀린 문제의 원인은 교과서에서 찾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이론들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통달했다. 공부를 하는데 낮과 밤이 따로 없었고 환경과 자리가 따로 없었다. 기차와 전철, 그리고 버스와 길거리, 기숙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앉으면 책을 들여다보고 걸으면 수첩을 펼쳤고 누우면 허공에다 외래어를 써갔다. 연속적인 반복으로 5번까지 풀었을 때 60문제는 두 문제로 좁혀졌다.

 

 드디어 기다리던 필기시험이 치러지던 날, 허벅지를 꼬집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만큼의 긴장이 솟구쳐 머리가 하얘지고 글줄이 모호해졌지만 역시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60문제 중에 52문제를 맞혔던 것이다. 35문제만 맞혀도 합격일 때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우의 성적에 기숙사로 향하는 이날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기능사자격증의 마지막 관문인 용접실기시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방학을 무시하고 연습의 나날을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특히 2학기에 들어가서는 실습모재의 제한으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직업훈련수당을 쪼개 모재를 사면서 연습했다. 스스로 늘어난 일감은 이런 나를 제대로 된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족구로 점심시간을 보낼 때 연삭 실에서 그라인더로 구해 온 모재들을 가공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오후수업에서 남들보다 두 배나 되는 포인트를 용접해야겠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정열의 힘일까? 아니면 꾸준한 노력의 대가일까? 전기용접과 가스용접, 특수용접 자격증이 8개월 만에 획득되었고 60여명의 학과 생들과 겨룬 용접실기경연에서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최우수상까지 받았다.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학교와 현장은 또 다른 전투장이었다. 특히 기초가 없는 나에게 회사의 모든 공구들과 재료들은 그 이름부터 낯설었다. 이는 자격증들의 취득에 못지않은 또 다른 장벽이었다. 회사 상사들은 그러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무시까지 하였다. 심지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손에 쥐고 있던 망치까지 막 날렸다. 용접사로 취직을 했으나 용접기는 고사하고 1년 동안을 그라인더만 쥐어주었다.

 

 비록 생업에 걸린 산업현장이어도 다시 한 번 직업학교에서 체질화된 학생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래서 각종 공구와 재료의 외래어들을 익히면서 남들이 다 쉬는 점심시간에는 용접연습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자나 깨나 꿈결에도 그리던 북한에서 아내와 7살 된 딸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에게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브로커비용이 어느 정도 모여진 상황이라 내심 기다리던 처자였다. 그래서 중국에 도착한 아내와 딸을 향해 일사천리로 줄달음을 쳤다. 3년만에 만난 딸애는 그 사이에 많이도 컸다. 한글을 익혔고 구구단도 거침이 없었다.

 

 극적인 상봉을 필두로 처와 딸과 함께 지닌 중국에서의 보름은 정말 내 인생에서 함부로 회고할 수 없는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새 사회의 행복을 찾아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특히 생과 사,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탈북 길에 누구에게나 웃음만이 차려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가슴마다에 환희와 의욕이 넘쳐 개인이 들끓고 가정이 들끓고 북한사회전체가 들끓으며 새 사회에로 질풍같이 달리던 변혁의 길, 창조의 길인 우리들의 탈북 길을 막으려고 배수의 진을 치며 정치, 외교적 공세를 악랄하게 펼치고 있는 북한정권의 그물망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다니는 심정으로 고심하고 진척시켰던 나의 탈북 계획이 끝내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다. 브로커들의 방향대로 내몽고를 향해 보낸 아내와 딸이 국경지대에서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북송되었던 것이다.

 

 그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버렸다. 그렇게도 사랑하던 처자였기에 그 충격은 너무도 컸다. 전위를 상실한 나에게 딸이 한글과 구구단을 외우며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꽁다리연필만 전해져 가득이나 쓰린 가슴에 송곳질을 했다. 지금까지 든든한 버팀목으로 버텨주던 처자식의 기로에 선 운명은 이제 막 출발선에서 꿈틀거리는 내 앞길에 가장 큰 치명타였다.

 

 허우대만 멀쩡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고 그 처지가 너무도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 가장 가혹한 독재정권에서 피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선 아내와 딸은 결국 못난 남편과 아빠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감금되었다.

 

 인생길엔 바를 정자도 있고 우물정자도 있다는 격언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내와 딸을 구원해야 하는 한 줌의 작은 희망마저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일어났다. 어깨는 몇 천배로 무거워지고 쌓인 울분과 분노를 용접연습으로 하나하나 풀어가지 시작했다.  

 

 그 나날에 무더운 8월의 정오가 가장 힘든 고비였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자연이나 선풍기의 힘으로 제거해야하는데 티그용접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아르곤가스가 공기로부터 산화, 질화의 유입을 막고 용접부위를 보호해야만 했다. 1500도의 쇳물이 숨을 쉬는 고열 앞에서 사실 웬만한 인내가 없으면 용접은 할 수가 없다.

 

 너무도 힘이 들어 몇 번이고 때려치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보위부요원들의 손에 의해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이 시각도 고문으로 매 맞고 있을 아내와 딸의 모습에 어디서 나오는지 힘이 났고 기운이 솟았다. 결국 처자식의 모습은 내가 흐트러진 삶을 살려고 할 때마다 매서운 채찍처럼 나를 질타하는 수호물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사려 물고 무너지는 육신을 도모하며 자리를 털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동안을 부지런히 숙련했다. 얼굴과 손은 화상을 입어 피부가 3번, 4번도 더 벗겨졌고 눈에 아달이 걸려 물수건으로 아픔을 감수한 날은 셀 수조차 없다.

 

 ‘무슨 일이나 마라톤선수처럼 가장 힘든 극한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결승선에 오를 수 없다.’

 

 그렇다. 오직 부단한 반복과 숙련으로 자기만의 노하우를 키워야 했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흉물스러운 용접토치를 다시 잡아나갔다.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그 나날에 용접실력은 질적 면에서 하루가 다르게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점점 더 완성작으로 다가오던 파이프 RT용접이 회사입사1년8개월 만에 드디어 막을 내렸다.

 

 노력은 엄청난 대가를 주었다. 페어플레이정신으로 기술을 하나하나 높이는 나를 회사가 인정했다. 용접기를 쥐어주고 은근히 바라던 월급을 상승시켰다. 높아진 월급의 첫 봉투를 받던 날, 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할 길이 없어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서울의 아스팔트길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200미터나마 달렸다.

 

 지난 날 돈만 따르며 정처 없이 떠돌던 허무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내 몸에 맞는 기술의 확보가 돈의 가치를 향상하는 결정적 요인임을 터득한 순간이기에 전혀 숨차지 않았다.

 

 그날 밤은 도저히 맑은 정신으로 잠들 수가 없었다. 이 돈이 없어 아내와 딸을 사지로 보낸 것만 같았기에, 비행기로 데려왔으면 이런 참담한 비극은 피했을 것만 같았기에 더 괴로웠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던 어린 살붙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더 이상의 실망은 금물, 바위가 흙이 되도록 간절한 그리움과 무사함만 학수고대하며 다시 일어서야했다. 아직 나에게는 젊음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젊어도 무리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기 마련이었다.

 

 안 좋은 수술결과로 허리가 말썽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이 늘어도 체력이 감소되었다. 하늘이 빙 도는 어질한 현기증으로 달팽이관이 멍하고 어떤 때는 눈앞마저 노랗게 보였다. 그래도 나는 영양제를 맞으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평일 병원운영시간이 저녁 7시까지여 영양제링거를 팔에 달고 기숙사로 향할 때면 버스승객들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군 했다. 작업시간을 맞추고 돈을 아끼려는 마음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심한 열패감에 고개도 들기 힘들었다. 허나 그것도 일과처럼 되어가는 것이 나로서도 신비로웠다. 그 나날에 바삐 설치다가 링거바늘이 빠져 5만원이나 되는 영양제를 하늘로 날린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날아가는 돈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말했던가?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구태여 남의 것이 아무리 값져도 절대로 부럽지 않다고 했다. 자기 자신의 노력과 땀, 그리고 몸으로 떼 운 대가가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이다. 이렇게 좌절과 병마와의 싸움, 처자식을 잃은 아픈 상처도 정신을 차리고 달려드는 인간의 도전을 막지 못했다.

 

 지금은 그 힘든 나날들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되었고 그 귀중함에서 오늘의 자신을 다시금 가다듬는다. 내가 발등에 불이 달려 용접으로 보낸 나날도 벌써 7년을 넘었다. 결과적으로 오늘은 하루인건비가 20만원에 육박하는 고임금에 도면해독과 취부, 용접까지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고급기능공으로 성장했다. 거기에 자본, 기술, 인맥의 결정체인 개인 사업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진행할 수 있는 초석까지 반석으로 다져놓았다. 앞으로의 목표라면 용접과 관련된 금속, 야금분야에서만큼은 산업기사가 되고 기능장으로 도전하련다.

 

 기능직으로 살아 온 8년과 무의미했던 첫 걸음마의 3년까지 내가 이 땅에 정착한지도 이제는 11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기간 동안 산천도 변했고 사람들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 탈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정착지원프로그램일 것이다. 시종일관한 시스템이 이럴 진데 굳이 이 땅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정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성공은 사실 내가 어려서부터 꿈속에서나마 그리던 이상향이었다. 물론 그 나날에 섣부른 불찰로 아내와 딸을 잃은 가장 뼈아픈 불행도 있었지만 전체적 안목에서 볼 때 알고 모르게 받아 안은 정부의 뜨거운 사랑이 있어 북한에서는 한갓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던 인간이 오늘은 이 자유대한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결과들을 이끌어냈다.

 

 물은 그릇의 모양을 닮고 사람은 좋은 환경과 친구를 닮는다고 태극기가 가는 길이 민족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길이었고 사람들을 가장 참된 길로 이끌어주는 길이기에 그 어떤 동요나 두려움도 없이 오직 한 우물만 파며 열심히 달릴 수 있었던 벅차고 장엄한 나날들이었다.

 

 또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양심의 거울로 들여다보는 순수한 나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의 심장을 바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찬 나는 오늘도 작업현장을 향하고 있다. 그 길이 내 나라 대한민국정부의 은혜를 조금이라고 값는 길이고 우리민족최대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기며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처자식을 만나는 길이기에 순간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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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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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하축하 ip1 2015-11-01 06:42:04
    국가는 국민을 보듬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대한민국과 국민의 관계입니다. 초심을 잊지말고 열심히 사시는게 국가에 충성하는 길입니다. 하루 빨리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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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사랑 ip2 2015-11-01 11:06:16
    잘 읽었읍니다.
    고생 많으셨읍니다.
    북에 남은 가족분들 부디 무탈하여 재회할 날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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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림일작가 ip3 2015-11-02 08:13:06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탈북민이지만 대한민국 앞에 떳떳이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깨끗한 양심이다, 목숨과도 같은 양심을 더럽혀지고 싶지 않다는 발제자님의 글이 마음이 짠하도록 들렸습니다.
    좋은 분에게서 좋은 것을 배운 이 하루 좋은 기분으로 보내겠습니다.
    긍정의 당신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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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림일작가 ip3 2015-11-02 08:45:12
    좋은분에게 좋은 음악 한곡 드리고 싶어 다시 들어왔습니다.
    (모 행사장에 취재를 나가야 하는데...)

    멋진 남자 당신에게 드립니다.- - - - - - - https://youtu.be/YoC3mq-rAzE

    북한군님! 오늘도 좋은 분들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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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철호 ip4 2015-11-02 09:30:44
    북한군님의 끝없는 도전정신에 경의를 드립니다 북송 된 가족의 안위와 생사여부로 많이 힘들었을 지난시간들을 묵묵히 이겨내야하는 인고의 시간들은 우리북한이탈주민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같은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용접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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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라인다 ip5 2015-11-02 13:19:17
    남 헐뜯기 좋아하는 종간나새끼들은 이 수기를 열번 읽고 써라. 그래야 대가리 정리된다. 얼마나 마인드가 긍정적이고 열심히 살고 노력했는지 배우란 말이다. 따라배울 건 배우지 않고 만날 남의 흉이나 보고 있는 새끼들을 몽땅 구라인다로 갈아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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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명 ip6 2016-12-22 12:36:25
    한 가족사의 아픔이자 우리민족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제2의 고향인 남한정착도 성공적이고 긍정적인 삶에 찬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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