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길목에서 생각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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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들과 함께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월남전 초기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황해도 곡산 태생의 실향민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옥해서 병사한 부친이 남긴 칼 막스,헤겔 등의 사회주의 고전을 독학했기에 진남포 행사장에서 조우한 김책의 눈에 들었고, 김책의 추천으로 만났던 김일성으로 부터 평양에서 같이 일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는군요. 채명신 장군이 평양이 아니라 남행을 결행한 이유는, 진남포 교외에서 국민학교(후에 인민학교로 개편) 교사를 할 무렵에 교류했던 쏘련군 문화담당 장교가 가르쳐 준 공산주의 실상에 대한 깨우침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단신 월남해서 군문으로 들어가, 1949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월남전까지 창군 이래 최장기간 전투경험과 모든 전투에서 전승한 기록을 남겼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에 반대하다가 중장으로 예편했고, 명예욕,권력욕과 거리를 둔 여생을 보내다가 2013년 87세로 영면했습니다. 국립 현충원 역사상 유일하게 장군묘역을 거부하고 1평 넓이의 부하들 곁에 안장된,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사랑,부하사랑의 참모습을 보여준 채명신 장군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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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팔이 부양하던 전쟁고아를 본인의 호적에 동생으로 입적시켰고
그 전쟁고아가 장성하여 서울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직한 일화를
채장군이 타계했을때, 어느분이 동지회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평생 비밀로 간직했던 채장군 동생과의 인연도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지요.
호수가 큰 게 있지요.
그 곡산에 채장군 고향이라니-
일제시기 서대문 감옥에서 징역살이 하던 부친 때문에,
평양 경찰서의 일본인 고등계 형사가 채 장군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집에서 가까운 진남포 교외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고 회고록에 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