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이 중국 5대 명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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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되면 백두산 전체를 찾을수 있을까요? 아니면 절반만 찾을까요? 백두산이 중국 5대 명산? [중앙일보 2006-04-27 05:50] [중앙일보 장세정] 중국 네티즌들이 중국의 5대 명산인 오악(五嶽)을 새로 정하자는 문제를 놓고 찬반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새 5대 명산에 장백산(한국명 백두산)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해 한국 네티즌 사이에서도 논란이 예상된다. 26일 중국의 신식시보(信息時報)에 따르면 이런 논란은 '홀로 가는 악어'란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이 이달 초 토론사이트인 '천애잡담(天涯雜談.www.tiany.cn)'에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그는 "기존의 5대 명산은 한나라 시절 음양오행설에 따라 당시 영토 안에서 선정됐다"며 "그러나 지금은 영토가 크게 넓어져 5대 명산을 새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 선제(宣帝)는 서기 61년 조서를 내려 동쪽의 태산(泰山), 중부의 숭산(嵩山), 남부의 천주산(天柱山), 서부의 화산(華山), 북쪽의 항산(恒山)을 오악으로 지정했다. 그 뒤 수나라 때 문제(文帝)가 남부의 천주산을 형산(衡山)으로 바꿨다. 이 네티즌은 새 5대 명산으로 동부의 장백산(長白山), 서부의 주무랑마봉(에베레스트산), 중부의 아미산(峨眉山) 또는 황산(黃山), 북부의 천산(天山), 남부의 아리산(阿里山)을 제안했다. 이 가운데 장백산의 절반가량은 북한에 속하고, 아리산은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대만에 있다. 천산도 분리독립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신장(新疆)자치구에 있다. 이 제안을 놓고 중국 네티즌들은 '타당하다''기발하다'는 찬성론과 '문화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는 반대론으로 맞서고 있다. 백두산을 중국의 새 5대 명산에 넣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경우 국내에서도 큰 반발이 일 것으로 보인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 세상과 당신사이- 중앙일보 구독신청 (http://subscribe.joins.com) ⓒ 중앙일보 & Join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북․중 국경조약의 체결 백두산 천지를 비롯한 북․중간의 국경선 확정 문제와 관련해 ‘북한 할양설’이라는 통설과 소수의 이설이 제기되어왔다. 북․중 국경문제 해결의 윤곽을 보여주는 첫 번째 자료는 1997년 중국에서 발간된 ‘주은래연보’이다. 1962년 10월 12일에 주은래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국경선 문제를 논의했음도 시사하고 있다. 북․중 간의 국경 관련 협정은 ‘국경조약’과 '의정서‘, ’회담기요‘ 등 세 종류이다. 이와 별도로 홍위병들의 문건과 중국 공산당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원회의 공식문건이 잇다. 홍위병들이 만든 문건에는 주덕해가 조․중 국경확정을 위한 실측탐사 당시 북한에 유리하게 국경선을 획정토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중공당 문건은 국경선 획정의 경위가 서술되어 있다. 북․중 국경조약 및 북․중 국경의정서 체결 과정 중국이 주변 국가와의 국경선 획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인 국경 분쟁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반이 중․소 분쟁으로 인해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시되고, 북․중 관계도 긴밀한 상태였기 때문에 국경선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획정은 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쉬웠다. 다만, 하천 중간에 위치한 섬과 하천 경계가 없는 백두산 천지 부근이 문제 였다. 1962년 10월 12일 북․중 간의 ‘국경조약’을 체결 1963년 3월부터 약 6개월 정도의 현지 탐측조사를 거쳐 전 국경지역의 경계선을 확정했다. 그리고 1964년 3월 20일에 중․조변계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국경선 획정문제를 종결지었다. 북한과 중국은 왜 국경조약 체결 사실을 비공개로 했는가? 북한측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조약체결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통일될 때까지 비공개로 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 [뉴스메이커 2005-03-31 20:45 백두산(白頭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는 우리 국토의 중심지였으나 고려 때는 의주와 도련포를 잇는 천리장성이 주요 국경선이었다. 조선 때 숙종 38년(1712)전에는 국경선이 불분명하였으나 그 이후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됨에 따라, 1962년 ‘조중변계조약’이 채결되기 전까지는 백두산 전체는 우리 국토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2년 이후 현재까지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한국 2,744m, 북한 2,750m, 중국 2,749.2m)은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분명히 우리 국토로 편입되었고 백두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중국의 주은래와 김일성이 서명한 극비자료인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내용을 정재왈기자가 연길에서 특종으로 취재, 발표(2000. 10. 16)함에 따라 본인 이형석(백두문화역구소장, 교육학박사)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 되었다. 간도문제는 백두산 정계비와 ‘조중변계조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간도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 그리고 위의 제목과 같이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이라는 제목은 단지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우리 국민의 희망사항이며 사실과는 다른 허상이며 일종의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이형석(지리전공, 한국하천문화연구소장) 019-225-4845/ 02-365-4844. “백두산 대부분을 중국땅으로 표시한 중국 지도는 한국과 미국, 일본 그리고 대부분의 외국 지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중국 지도가 다른 나라 지도와는 달리 무리하게 백두산을 자기네 땅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꼬집은 내용이다. 이런 사실을 담은 미국 국무부의 자료가 새로 확인됐다. 한․중 국경선 문제를 다룬 이 자료는 국무부 지리실(The Office of the Geographer)이 1962년 6월 29일 발행한 것이다. 북한과 중국이 그해 10월에 국경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합의한 사실은 2000년에 뒤늦게 국내에 알려졌다. 간도연구가인 박선영교수(포항공대 중국근현대사)는 “국경조약 체결을 앞두고 양국간 민감한 신경전이 벌어지던 당시에 미국 국무부에서 이를 감지, 정리한 자료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이 자료의 표지에는 ‘국제 국경선 연구(International Boundary Study)’ 시리즈의 17번째라고 씌어 있다. 지리실에서는 최근까지 175곳에 이르는 세계의 영토분쟁지역을 조사해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국경선 분쟁지역 조사 정리 미국 국무부의 한․중 경계선 자료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은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20마일(32㎞) 지역. 두 강 상류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백두산이 있다. 이 자료는 “한․중간 국경선 문제로 종종 일어난 논쟁은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에 위치한 백두산 근처의 경계와 관련돼 있다”고 기술했다. 자료는 또 “1909년 간도협약에서 국경선의 밑바탕이 형성됐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여러 물줄기 중 어느 것이 진짜 중심 물줄기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다. 최근 지도가 그것의 정확한 위치가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하는데도 표기는 가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1962년 10월 12일 북한과 중국이 비밀리에 맺은 ‘조․중 국경조약’에 따라 백두산 천지는 55%는 북한이, 45%는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천지를 남북으로 가른 국경선은 백두산 인근의 두만강 지류 중 가장 상류인 홍토수와 직선으로 연결된다. 이 국경조약은 어렴풋이 ‘천지 양분설’로만 전해지다 2000년 확인됐다. 백두산 천지를 절반씩 나눴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국내에서는 1983년과 1993년 김영광 전 의원을 중심으로 의원들이 백두산영유권 확인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북한 책자에도 명백한 한국 영토 이 자료는 북한의 두 책이 천지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도에서도 백두산 서북쪽이 경계선 안에 들어가 있으며 백두산 자체도 명백하게 경계선 안에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실제로 책 안의 모든 지도는 백두산과 정상에 있는 호수가 북한 안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밝혔다. 1961년 북한과 중국의 미묘한 신경전을 보고한 이 자료는 결론에서 약 600평방마일에 달하는 백두산 지역이 북한과 중국 간 국경분쟁 상태에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민감한 사안임을 감안한 탓인지 미국의 이러한 인식이 영토분쟁에 책임성 있는 자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이 자료는 북한과 중국간 영토 분쟁의 역사적인 원인을, 사람이 살지 않아 이 지역이 개발되지 않았고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지적하고 있다. 박선영 교수는 “조선 후기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지역이 무인지대였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다는 이 자료의 해석은 의미가 깊다”면서 “실제로 당시 만주 지역은 조선과 청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텅 빈 지역이었으며 조선인들이 먼저 이곳에 땅을 개척했다는 것이 간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백두산 영유권 분쟁 백두산 영유권은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돼왔다. 청나라 대표인 목극등이 조선 대표가 백두산 지역에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천지 동남쪽에 정계비를 세웠다. 이 곳을 경계선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선이 그어졌다고 중국측은 주장하고 있다. 한국측 학자들은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이 중국측이 주장하는 두만강과는 다른 송화강 줄기임을 들어 두만강 건너인 간도지역을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비석이 세워진 곳에서 발원하는 강줄기는 송화강으로 흘러들고 있음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여러 차례 확인됐다. 또한 이곳에 경계로 삼기 위해 쌓은 목책과 돌무더기 띠가 바로 토문강으로 이어지며 이 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최근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본지 611호, 2005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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