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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도 다시 평가해야할 고구려의 왕.
Korea, Republic of 위선주의척결 0 592 2017-03-15 12:48:06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성(成)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陽王異母弟也 ?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2년(서기 619) 봄 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5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4년(서기 621)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5년(서기 62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당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나라에 붙잡힌 것을 염두에 두고,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ㆍ지ㆍ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므로,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제후국의 자격으로 중국의 역법을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거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거듭 펴 보이니, 나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여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의 말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난이 얽혀서, 서로 싸우던 곳에서는 각각 자국의 백성들이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부모와 형제들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었으니 의(義)에 어긋난 바가 없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보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넓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의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輯睦 永敦聘好 各保疆?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撫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6년(서기 623)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7년(서기 624) 봄 2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임금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국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天尊)의 화상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임금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8년(서기 625),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므로,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八年 王遣人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9년(서기 626),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
당나라 황제가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사(朱子奢)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임금이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와 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朱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11년(서기 628)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封域圖, 지도)를 올렸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利可汗 兼上封域圖

12년(서기 629) 가을 8월,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娘臂城)을 빼앗았다.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14년(서기 631), 당나라에서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를 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1)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임금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쪽은 부여성(扶餘城)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21년(서기 638)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였다.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맞받아 칠중성의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의 군사가 패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

23년(서기 640) 봄 2월, 당나라에 세자 환권(桓權)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임금이 당나라에 자제들을 보내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햇빛이 없어졌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 入唐朝貢 太宗勞慰 賜賚之特厚 王遣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고창(高昌, 중국 신강 지방에 있던 나라)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에서 접대하는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 명의 병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東萊)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여러 고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未復 吾不欲勞之耳

25년(서기 64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다.
11월, 당 태종은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의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東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어찌보면 당나라랑 싸우겠다고 설레발레레발레 하기보단 차라리 저게 나을지도 모르지. 노자의 교리를 배우려했던 고구려라....연개소문의 기상은 높으나 그 기상이 너무 높아 왕까지 죽이니 참 한심하다 못해 답이 안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

 

"송(宋)의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옛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개보가 대답하길 “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했으니, 그런즉 개소문도 역시 재주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곧은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春秋)』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온전히 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황실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반역자임을 면할 수 없다."

 

이건 한마디로 이런거네 6.25전쟁때 중공군 개입 승인한 김일성을 누가 쳐죽인거랑 짱개눈치때문에 핵도 포기한 북한인데, 뭐 나는 후자가 더 나을 것이라고 보여지나 전자도 과연 나쁠지는 두고볼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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