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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유총연맹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라!' 청와대 청원. (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9 2019-09-03 18:42:21

독재자 이승만은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친일민족반역자이자 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자 이승만이란 자를 사대수구들은 건국의 아버지라 하며 대한민국의 국부로 받들어 모시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3일 한국자유총연맹 입구 서 있는 이승만 동상을 철거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이미 이승만은 국적을 일본이라 한 일본인이며, 임시정부 때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지만 워낙 더러운 자이라서 탄핵을 당해 쫓겨난 자이고, 6.25 때는 자신이 보살펴야 할 보도연맹원 수십만 명을 공산당이라 하여 무참히 죽이고,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대전으로 되돌아 와서는 녹음된 방송으로 수도 서울을 국군이 사수하고 있다고 사기를 쳐 무고한 생명 수천 명이 죄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독재를 하다가 4.19 혁명에 의하여 쫓겨난 자인데 이런 자가 한 일이 뭐 있다고, 본 받을 게 뭐 있다고, 한국자유총연맹 본부 입구에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이 친일 독재자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여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다시금 고취시킬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원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 이승만의 동상을 철거해야 아는지 간단하게 나마 살펴 보도록 하자.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모친이 용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하여 아버지인 이경선이 승룡이라 이름을 지었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급제를 못하게 되자 숙부가 천천히 되라며 승만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설이 있다.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가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1904년 11월 도미하여 1905년 2월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압학하고 1905년 8월에 태프트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친일파인 일진회 대표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는 망언을 하고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히로부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다.”라는 극언을 한 친일파 스티븐스(Stevens, D.W.)에 화가 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이 각각 암살을 시도하였고 먼저 간 전명운의 총탄은 불발되었으나 스티븐스를 죽이겠다고 육탄전을 벌리는 도중 장인환이 쏜 총탄에 의해 전명운도 총상을 입었고 장인환이 다시 두발을 더 스티븐스에게 쏴 가슴과 복부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틀 뒤 스티븐스는 사망하였다.

 

 

이승만은 이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표면적인 거절 이유는 학생이라 시간이 없고 기독교인이라서 살인자의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명운은 1908년 6월 28일 무죄로 풀려 났고 장인환은 25년의 금고형을 받았으나 10년 만에 출감하였다. 두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이어서 ~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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