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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이 세사람의 각자의 독립의 길..
Korea, Republic of 돌통 0 310 2019-09-03 19:25:32
하와이 대학교 최영호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하와이 이민 초기 한인들의 사진 (출처: 연합뉴스)

한국인들의 간도와 연해주 이주는 자발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지만, 미국 하와이로의 이주는 대한제국 궁내부에 소속된 수민원에 의해 계획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에 시작해 3년간 지속되었으며, 총 65척의 배로 7000여 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 중에는
20대 미혼 남자가 많았는데 하와이 현지에서는 혼인할 독신 여성이 없어서 ‘사진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사진결혼은 하와이에 있는 한국 남성이 고국에 사진을 보내면 결혼을 원하는 여성이 사진의 대상자를 찾아 미국에 와서 혼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사진 신부들의 하와이행으로 미국의 한국인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후 하와이에서 벗어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미국 본토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본토로 건너왔던
한국인 교포들을 결집시킨 사람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습니다.


그는 늘 허름한 노동복을 입고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미국 본토에서 산발적으로 형성되었던 친목회를 확대 개편해 1905년 ‘공립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안창호는 로스앤젤레스·새크라멘토·리버사이드 등지에 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국내와 연해주·만주까지 조직을 확대했습니다.

 

1907년 안창호와 공립협회 회원들은 국권 회복 단체로서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를 대표로 선정해 국내에 파견했습니다. 안창호는
신민회 활동을 주도하며 청년 조직인 ‘청년학우회’를 창립해서 정치·경제·교육 각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해체와 함께 사라졌지만, 안창호는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들어서 청년운동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안창호 (왼쪽 사진), 이승만과 박용만 (오른쪽 사진)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 청년운동에 앞장섰던 안창호와 달리, 1904년 미국 유학생 1기로 네브래스카 군관학교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공부했던 박용만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무장 투쟁에 힘을 쏟았습니다.


1910년 2월 미국의 한국인 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었을 때, 박용만은 국민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박용만은 국민회 회원들로부터 9만 달러(요즘 가치로 약 900만 달러)를 모아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과 대조선국민군단 편성을 추진했습니다.

 

1914년 하와이 아후이마누 농장에 국민군단이 설립되었고, 200여 명의 사관생도들이 국민군단에서 기숙하며 조를 편성해 농장에 나가 작업하는 가운데 훈련과 학습을 받았습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이해해주었고 사관생도들은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할 만큼 나름의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활발히 전개되던 국민군단의 군사훈련과 기지 건설은 3년이 지난 1917년경에는 국민군단을 해체할 만큼 약화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게 되자,

미국 당국이 자국의 동맹에 대항하려는
한국인의 군사훈련을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용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한 파인애플 농장의 흉작이 이어지면서 불경기로 인한 재정 악화도 문제였고,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박용만과 극한 대립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여섯 살 차이로 서대문 감옥에서 만나 함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1904년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리를 잡지 못했던 이승만을 박용만이 1913년에 하와이로 초청하면서부터 둘의 관계는 의형제에서 정적政敵으로 변해갔습니다.

 

박용만은 무장 투쟁을 위해 국민군단 창설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반면,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문제를 제기하며 박용만과 주도권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승만의 국민회 장악은 한동안 실현되지 않았지만, 1918년 박용만 계열의 인물들이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이승만은 결국 국민회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 재판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국민군단에 불리한 증언을 했는데, 이것이 이승만과 박용만을 완전히 갈라서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강화회의 모습 (출처: Wikimedia)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의 교포사회는 안창호가 주동이 되어 이승만·정한경·민찬호를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대표로 정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정한경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지명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승만 지지 세력은 파리강화회의 대표에 이승만이 제외된 것을 문제 삼았고, 안창호는 이승만도 대표로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두 대표의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서 파리행이 어려워지자, 이승만은 정한경이 작성한 청원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해서 윌슨 대통령에게 직접 청원하고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서
조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고

현재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해방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저희들의 자유, 소망을 평화회의의 탁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던 ‘위임통치안’입니다. 이승만의 주장은 안창호가 주장한 실력 양성의 길, 박용만이 주장한 무장 항쟁의 길과 달리, 이승만은 외세의 도움에 의존하는 외교로 독립을 이루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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