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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제 5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7 2019-10-07 23:46:34

레닌이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때 스탈린의 억압적인 정치성향이 드러나게 되어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아마도 당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이 유일하게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보고 스탈린 지휘하의 당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인 것 같다.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 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으로 보이는 성격 때문에 '제2의 나폴레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당내 유력주자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여기서 '제2의 나폴레옹이 될지도' 이뜻은: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슈바 우리도 군인들 가만 내비두면 좆되겠구나.' 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관련 인물이 한 둘이 아닌데, 투하쳅스키도 그 중 한명이었고, 스탈린에게 처형당했다.)


이어서~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 스탈린이 사임하면 그에게(트로츠키)에게  총서기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30년이나 지나서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이 후에 스탈린의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는데, 이땐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본질을 깨달았으나 그에게,즉 스탈린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레닌의 유언장의 내용을 보면..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 12. 24. 작성된 부분이다.




이 유언장에서 트로츠키의 순 관리적인 작업에 몰두 라는 글의 뜻은 잘 이해 해야 한다..  이 속뜻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 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이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대로 하게끔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 이런 뜻으로 해석이 올맞다.


또 ..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에서..  내용의 글을 보면..!!


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여기서 해석하자면??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소비에트 밑으로 안 들어오면 쳐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럽고 폭압적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이어서 레닌의 글..  심지어 그루지야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는데도.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니깐..  레닌의 말은?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 가며 타협을 해가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 12. 31일. 에서..



여기서..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레닌의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


스탈린에게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이 아니고서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 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 여기서 만만함이라는 자는 스탈린을 뜻하는것 같다.  후일의 이미지에선 전혀 틀린 말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은데 말 없고 존재감도 그닥인 사람이었다.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란 인상을 주었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 독재국가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절대 스탈린을 후계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자신이 난타당하는 중앙위원회에 불출석하고 문필활동에 전념하면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연합을 더러 '정치국 안의 정치국', '중앙위원회 안의 중앙위원회' 운운하며 비난하는 데 열중했으나 당의 절대적 단합을 호소하던 스탈린 때문에 분파주의자로 몰릴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어떤 사상을 갖고있다고 보는것 보다  그냥 존나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때려죽여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 부르지 못 하는 놈'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배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 교활한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세계 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과 협력한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하나,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사이가 삐걱거렸다. 이들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와 스탈린을 비난했고 '부자 되시오' 발언으로 충격을 안긴 부하린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안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나가리된 트로츠키까지 끌어들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연합은 스탈린과 부하린의 연합에게 다시 분파주의자로 몰려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나란히 당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최종적으로는 부하린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당내의 유일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투쟁과정에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잘못 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치르게 되었다.



       이어서 ~~ 제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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