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제 1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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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한편 이런 전통주의적 시각의 틀 안에서 공부를 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소련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연구하던 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스탈린 체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대숙청도 이런 새로운 분석을 피해갈 수 없었다.
2차대전 시기에 독일군이 노획하였던 스몰렌스크 문서고와 같이 서방권에서 가용할 수 있던 소련 내부 자료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수많은 사회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대숙청에서 대규모 대중참여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에서는 대숙청은 본질적으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소비에트 연방과 스탈린이, 중앙당 및 지역당의 기율 와해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수행한 몇가지 노력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대폭발을 한 것에 가깝고, 흔히 생각하는 키로프 암살에서 예조프시나까지 이어지는 스탈린의 거대 계획이라는 것이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특권을 보장해주는 당원증부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당 사무실에서 이름이 비어있는 당원증을 뭉텅이로 빼돌려서 폴란드에 팔아 넘긴다던지, 당원이 죽었는데 가족들은 당원증을 계속 갖고 있어 배급 특전을 계속 받아먹는다던지, 비리나 횡령으로 출당되었는데 당원증만 갖고 다른 동네로 가서 당원 행세를 하고 그 지역 요직에 다시 올라있다던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전반적인 당원의 질도 굉장히 안 좋았다.
1929년 숙청 때 출당 대상자들의 37%가 과음이 사유였다. 역시 보드카국답다. 특히 5개년 계획을 거치며 엄청나게 팽창한 소련 관료제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어중이떠중이를 받아서 일을 시켰는데 이들 상당수가 경제 문제에 천착하느라 다른 조직적인 일, 정치적인 일에서는 아예 개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제 문제를 처리하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심지어는 대놓고 중앙정부에 거짓 보고서를 올리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우랄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제철소 수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질조사국을 갈아버리면서까지 없는 탄광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보고서 조작에 생산 장부 조작 등 온갖 막장스러운 일들을 하기도 했다.
한편 지방을 통제할 당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몇몇 집단농장에는 맡아서 관리하는 당원들이 하나도 없거나 한 명 있으면 많은 정도의 개판. 러시아에 붙어있다는 스몰렌스크가 이 정도면 저기 극동의 시골구석은 뭐...
1934년, 이 당원 관리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드러났다. 출당 당해서 이제 당원도 아닌 자가 레닌그라드 당 사무소의 경비를 반납하지 않은 당원증으로 속여먹고 세르게이 키로프를 암살해버린 것. 안 그래도 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조치에 들어가려 했던 공산당은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면 수정주의 입장에서 키로프 암살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숙청을 연구해온 학자 게티에 따르면 우선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전제해온 "온건한 키로프" 모델이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실제로 트로츠키를 비롯한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온건하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키로프 본인은 집단화와 산업화를 최전선에서 이끈 스탈린의 충복이었고, 실제로 키로프가 레닌그라드 지역당을 맡았을 때 그가 파괴한 정교회 성당은 전임자인 카메네프와 후임자인 즈다노프보다도 많다.
키로프가 온건파라고 알려진 근거로 인용되곤 하는 1934년의 당대회 연설에서도, 키로프는 좌익 및 우익 반대파에 대해 조소로 일관했고 비밀경찰의 강제노동 활용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온건파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중앙위 선거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설은 당시 투표 집계를 진행했던 사람 중 하나인 베르호비흐가 1960년에 증언한 것을 그 시초로 한다.
베르호비흐는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123표였나 125표 정도 나왔다고 말했고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한 투표함은 폐기된 뒤 조작된 공식 통계가 발표되었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당시 1,059표 중에서 3표의 반대표를 받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고 후에 소련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1934년 투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베르호비흐의 증언을 확인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166표 가량이 비기는 했는데 이것이 단순히 투표에 불참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 중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몇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로프의 인기에 대해서, 몰로토프는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키로프요? 단순한 선동가일 뿐입니다."라고 경멸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암살범인 니콜라예프의 일기도 나왔는데, 그 일기를 들여다보면 그가 정신적 질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위대한 혁명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등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써져 있다.
또한 키로프 암살이 탄압의 전기라고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점은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지노비예프는 키로프가 암살되기 이전부터 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로프 암살을 분명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암살 자체를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의심해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심을 표할 만한 근거도 충분히 많다. 판단은 알아서.
하여튼 공산당은 1935년 프로베르카(Проверка)라고 불리는 작업을 시행한다.(이 작업은 사실 뭐 엄청 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검사, 점검 정도의 뜻이다.) 바로 신규 당원의 입당을 막아버리고 각 지역에서 당원 명단을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근무태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지연되었다. 사실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5개년 계획으로 다들 맡아야 했던 업무의 양이 엄청 무거웠던 건 분명한 사실. 게다가 이때 중앙당에서는 생산량을 맞추라고 맨날 닦달하고 있었으니...
사실 그래서 사라토프와 같은 지역에서는 아예 제대로 하지도 않고 금방 끝내고 치워버렸으며 후에 즈다노프가 이를 보고 매우 어이없어한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더 가관인 모습들이 나타났다. 당원 목록에 명단은 올라가 있는데 지역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막 들어가 있었고, 기존 문서의 한심한 관리 상태가 또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이와 동시에 당원을 확인하면서 출신 계급을 속인 자, 비리, 횡령, 과음, 근무태만 등의 사유를 보이는 자들을 또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당의 상급 당원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서 내부의 잘못은 쉬쉬하고 하급 당원을 제물로 보내버리는 정황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역의 NKVD도 같은 패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일반 하급 당원이 지역의 상급 당원들과 간부급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1936년 구 당원증을 신규 당원증으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수행한다.
이상. 끝. 제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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