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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이어서 괴물공화국으로 제2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9 2019-11-10 17:19:41

북한 괴물 독재공화국 제 22편..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신탁통치 소용돌이/분국협의회때 “총비서”아닌 “동지”/김일성과 회동후 주도권 빼앗겨



신탁통치문제는 김일성과 박현영의 권력레이스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신탁통치가 김일성을 살리고 박헌영을 죽였다』는 말이 나온것도 그 때문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의 지침을 얻기 위해 박헌영이 평양을 갔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가장 분명한 설명이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 역시 당시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지침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한반도에 관한 소련의 정책은 북조선에 진주해 있는 소련군정당국의 통치전략이 우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김일성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반도의 남쪽에서는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민족주의 세력들과 미군정당국의 견제속에서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때에 그는 소련군정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속에서 공산당의 분국과 함께 행정조직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반도에 있어서 미소 두 강대국의 대립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서 공산당의 정통성은 소련군정의 지배하에 있는 북조선으로 옮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신탁통치는 그것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이런 미묘한 권력의 변화가 박헌영의 2차 평양비밀방문속에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또 조선공산당중앙과 북조선 분국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전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45년 12월29일 평양에 도착하는 박헌영을 맞이하러 김일성이 주영하,김용범,박정애,허가이,김렬 등과 같이 교외까지 나갔습니다. 당총비서에 대한 예의였지요.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박헌영이 자신들을 부르는 호칭을 두고 소련파들이 상당히 아니꼬왔던 모양입니다.


박헌영은 이들에게 「동무」라고 불렀습니다. 동무는 아랫사람에 대한 호칭이지요. 그러자 허가이,김렬등 소련에서 나온 사람들이 뒤에서 투덜댔습니다. 「동무가 뭐냐. 동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입북한지 얼마안돼 소련파의 콧대가 대단할 때였다.


그런 자신들을 아랫사람 부르듯 『동무』라고 한 것이 언짢다는 것이었다. 당중앙 박헌영에 대한 소련파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총비서를 맞는 의전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예우가 이게뭐냐”


서용규씨의 증언.


『승용차문제였습니다. 박헌영은 38도선을 넘어 소련군이 제공한 지프를 타고 평양에 와서 영접을 받고 시내로 들어가게 됐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소하지만 신경쓰일만한 일이 벌어졌어요. 인사를 마친 김일성은 자기가 타고온 승용차를 도로 타고 그냥 가버린거죠. 박헌영에게 타라는 권유도 없고요. 박헌영은 38선에서부터 타고 온 소련군 지프를 타고 가야 했지요.


나중에 박헌영계인 최용달이 나서 「총비서에 대한 예우가 이게 뭐냐」고 따지니까 주영하와 허가이가 「아무 차나 타고 왔으면 됐지. 무슨 소리냐」고 되받았답니다.』(최는 이 문제 때문에 나중에 2차당대회에서 종파분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서울중앙과 북조선 분국과의 미묘한 갈등은 북조선 분국협의회때 가장 두드러졌다.


서용규씨의 증언이다.


『31일의 분국협의회때 박헌영의 자리는 방청석에 마련돼 있었어요. 분국회의라는 이유였습니다. 진행자도 이렇게 소개를 했어요. 「당중앙의 총비서가 참석했다」고 한게 아니라 「박헌영 동지를 비롯하여 몇몇 동지가 방청하고 있다」라고 한거지요.


그러나 사실 박헌영은 총비서니까 지구당격인 분국회의를 지도할 자격이 있었거든요.


이날은 아무런 말썽없이 넘어갔지만 다음날인 46년 1월1일 신년연회에서 박헌영 일행 가운데 조선공산당 서기국원인 김태준이 술한잔 마신기분에 주영하에게 「도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주영하는 「나한테 얘기하지 말라. 직접 얘기하라」고 내뱉었다는 겁니다.』


좌석문제를 둘러싼 신경전은 신년연회때 또 있었다.


○좌석 배치 신경전


역시 서용규씨의 증언.


『신년연회장에서 좌석을 배치하는데 라운드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렇지만 라운드테이블이라 해도 위 아래는 있는거 거든요.


상석에는 치스차코프,오른편으로 박헌영,왼편에는 김일성,레베데프,로마넨코가 앉도록 의자를 놨습니다.

박헌영이 총비서이니만치 상좌석에 앉을 것으로 생각했던 박헌영 일행은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역시 최용달이 문제삼았지만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소한 신경전들이 나중에는 박헌영파에게 불리한 비판거리들이 되었다. 뒷날 김­.박의 권력암투와 숙청의 씨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엔 이같은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김­박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금이간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에 대한 예우를 나름대로 깍듯이 했다. 우선 숙소문제만 해도 다른 대표들은 모두 고려호텔인데도 김일성은 박헌영을 자기 집에 직접 모셨다.


이때 박헌영은 고려호텔에 연금상태에 있던 조만식 선생을 만나보았다고 한다. 고당은 공산당책임자가 만나자고 한다니까 만나긴 했으나 거의 말을 안해 인사만 하고 나왔다고 서용규씨는 전하고 있다.


새해가 되어 신년연회 때인가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박헌영에게 한국식으로 큰 절을 올려 박헌영이 당황해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박헌영이 간첩으로 몰려 사상재검토를 받을때도 이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회령식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서울중앙」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문제였다. 서울 중앙의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데 비해 북조선분국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서용규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김­박의 2차 회동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신탁통치문제외에 서울중앙과 분국간의 연락문제와 재정지원문제였지요.』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당시의 38선이 점차 굳어가는 무렵이었어요. 남북간에 긴밀한 연락이 필요한 시점이었죠. 김일성은 박헌영으로 하여금 개성·연천·양양등 38선 인근에 비밀연락거점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사람이나 문서가 안전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를 위해 분국내에 조선공산당과의 연락업무를 담당할 연락기구를 만들기로 했지요. 이 기구는 46년 1월20일쯤 연락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습니다.


김일성은 또 박헌영에게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이남과 이북에 각각 상사를 만들어 이들이 직교역하는 형식으로 자금이나 이북의 신문등 문서류를 오갈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논의들은 당중앙과 분국간의 연락활동을 위한 것이지만 북조선 분국이 당중앙을 후원하는 입장에 서게 됐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런 세력의 변화는 공산당내의 다른 파에도 영향을 끼쳤다.


○분국이 중앙지원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김일성과 박헌영은 연안파문제도 의견을 나눴습니다. 김일성은 이들이 공산당에 들어오지 말고 따로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정당단체협의회가 열릴 것을 대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정당·단체를 여러개 가지고 있는게 유리하다는 것이었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헌영은 연안파인 한빈 등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이들은 이미 김일성의 의견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북쪽의 공산조직에 대해 박헌영의 영향은 제한돼 있었다.


김­,박의 첫 회동에서 논의된것중 흥미있는 대목중의 하나는 남쪽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다.


서용규씨는 두 사람이 홍명희에 대해서는 애착을 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의 대상에 올랐던 사람은 주로
여운형·백남운·김구·김규식·홍명희 등이었지요. 이 시점에서만도 벌써 김구와 김규식은 반동으로 치부되고 있었어요.


여운형은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므로 이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고 또 인민당과 통일전선을 꾸려야 한다는 점도 지적이 되었지요. 두 사람은 홍명희를 「쟁취」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홍명희 진영에 사람을 들여보내기로 했습니다.』


31일 분국협의에서 이런 문제들을 논의한뒤 이날 오후 김,­박은 단독회담을 가졌다. 주영하의 자술서를 보면 이 두번째 회동에서부터 주도권은 김일성쪽으로 넘어갔다고 술회한 것으로 서용규씨는 전하고 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두번째 회동을 할때는 이미 당중앙이 분국으로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신탁통치문제가 매듭된 46년 2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분국이 사실상 당중앙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소련파나 소련군인들도 김,­박의 평양비밀회동을 증언하고 있다. 다만 그 시점에서는 다소 들쭉날쭉이다.


전 북한 외무성 부상인 박길룡씨(73)는 『46년 1월중순 김일성의 5호주택에서 박헌영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고 당시 소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는 『박의 평양방문은 46년 1월5일 이후』라고 말하고 있다.

또 당시 서울주재 소련부영사 샤브신의 부인 쿨리코아씨(86·모스크바거주·전 소련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수석연구원)는 『박헌영이 남편의 주선으로 46년 1월5일부터 10일전후 급히 평양을 방문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소군정 정치담당관이었던 메크레르씨(86·모스크바 거주)의 증언은 박헌영의 평양방문을 좀더 일찍 있었던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분명히 기억하지만 상부의 지시로 45년 12월하순 박헌영을 비밀리에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아마 20일에서 25일 사이일 거예요. 박은 서울주재 샤브신부영사의 주선으로 평양에 왔습니다.


상부의 지시는 「박을 만나 정치적 식견 등을 들어보고 평가서를 올리라」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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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 부근의 비밀장소에서 그를 만나 장시간 대화를 했습니다. 박은 주로 이남정세에 대한 분석과 사회주의식 조선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 등을 피력했습니다.


듣고 보니 박헌영이 차원높은 이론을 갖춘 공산주의자였으며 투쟁가라는 결론을 얻게 됐습니다. 나는 상부에 「박헌영은 당일꾼정도로 기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어쨌거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북공산당의 주요한 지도자였고 당시 남북공산당의 모든 흐름이 이들의 직접적인 비밀협의로 결정됐다는 것은 새롭고도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상.  끝.  제2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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