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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독재 괴물 인민공화국.27편.건국과정.역사.
Korea, Republic of 돌통 0 156 2019-11-15 16:07:19
「정판사 위폐사건」집중거론


 
◎박헌영,­김일성 4차회동/“미군정에 탄압빌미 제공” 박헌영에 화살/개성코스 택해 박 입북/김일성 승용차로 영접
 
 
 
 
신탁통치결정의 후유증은 46년 중반기가 되면서 이남에 날로 복잡한 정세를 조성했다.


우선 임시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참가자」의 자격을 놓고 씨름하다, 회의시작(46년 3월20일)한달 반만인 46년5월8일 무기한 휴회로 들어갔다.


좌익에 대한 미군정측의 탄압도 서서히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46년 5월 발생한 조선정판사의 위조지폐 발견사건이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46년 5월6일 미군정수사대는 서울 중심가에 있는 근택빌딩을 수색했다. 그 건물에는 조선공산당 본부뿐 아니라 공산계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종이,잉크,약1천2백만원에 달하는 위폐(당시 환율로 약12만달러)를 비롯한 위조지폐설비가 발견됐다』(이정식·스칼라피노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이 사건이후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막후수사를 강화해 『조선공산당이 임시정부의 다수세력을 차지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발견했다(같은책).


아직 대결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미군정은 「지하에서 꿈틀대는 조선공산당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고 조선공산당 역시 미군정 공격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채택해 나가면서 긴장이 점차 고조돼 나갔다.


거기에다 6월3일에는 이승만이 정읍에서 『이남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같은 발언은 이승만을 내세워 미군정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시켰다.


좌우를 막론하고 논란에 빠져들어갔다.
 
 

더욱이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등을 중심으로하는 좌우 합작모임을 주선하고 나서 미군정이 새로운 정치판도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들이 난무했다.



이북의 김일성이 확고한 기반을 잡아가면서 갈수록 안정되어가는 것과 크게 달랐다.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4차회동을 위해 평양에 모습을 나타낸 때는 이남정세가 이처럼 혼돈상태에 놓여있던 46년 6월말이었다.



박헌영은 46년 6월27일부터 7월12일까지 보름정도 평양을 방문했다.



4차방문의 핵심주제는, 점차 심해져가는 미군정의 좌익탄압에 대한 대응과 좌우합작에 대한 대처문제였다.



이 기간중에 박헌영은 모스크바도 방문했다.



방문후에는 좌익계통 3당인 조선공산당·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통합문제도 논의돼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전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는 박헌영의 4차방북 당시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박헌영은 6월27일부터 7월12일까지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습니다. 46년 6월27일 연락실 소속 연락원들이 개성인근의 금촌까지 박헌영을 마중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헌영의 입북코스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38선의 경비가 강화되고 박헌영도 미군정의 감시대상이었던 만큼 조심을 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도 박헌영을 개성쪽으로 월북시킬 것인가,연천쪽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연락실에서 논의가 많이 됐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과 연계가 잘돼있던 개성이 제일 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서 그쪽을 택했습니다.



이번에는 김일성의 전용 승용차가 박헌영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김일성은 평양교외인 지금의 낙랑구역 밖까지 나와 영접을 했습니다.



김일성뿐만 아니라 김책·허가이·최창익·김두봉등도 함께 영접 나왔습니다.



박헌영의 4차 월북에는 허성택(후에 석탄상이 됐다 59년 숙청)·박치우·이호재가 동행했습니다.



박치우는 이때 평양에 정착했고,이호재는 조선공산당 서기국에 있던 인물인데 나중에 조선노동당 연락부장을 하다가 오대산빨찌산 사령관을 했던 사람입니다.』



박헌영은 2차·3차 평양방문때처럼 도착하자마자 분주하게 공식회의에 참석하거나 의견청취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7월1일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앞서 여러 비공식접촉과 밀담등을 가지면서 매우 중요한 현안들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서씨의 증언.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며칠동안 정식회의가 열리거나 한 일은 없었습니다.



한차례의 협의회와 김일성과의 몇차례에 걸친 밀담이 있었습니다.



협의회에는 조직위 지도부가 거의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미소공위 결렬후의 이남정국,정판사사건,46년 6월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좌우합작문제 등이 전반적으로 토론됐습니다.



그런데 당시까지만해도 좌우합작이 시작됐지만 아직 초보적인 단계였고,좌우합작의 주역이었던 여운형과 김일성의 비밀채널이 있긴했지만 가동이 잘 되지않아 김일성이 여운형의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던 때였지요(여운형과 김일성의 비밀접촉은 후에 다룰게요.)



김일성측은 박헌영의 얘기를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협의회에서는 박헌영이 주로 이남의 정세를 설명하고 나머지는 듣기만 하는 식이었습니다.』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은 정판사사건이었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정판사사건을 놓고 조직위간부들이 박헌영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김책·허가이·주영하등은 「미군정이 정판사사건을 만들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라고 지적했지요.



「일제때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에서 총독부가 지폐를 찍어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계같은 것들은 미리 다 치워버렸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질책에 가까웠습니다.

 


허가이는 「박헌영측이 미군정의 경제를 혼란시키기위해 정말로 위조지폐를 발행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고 있었고 북조선공산당내에서도 그런 의심을 가진 사람이 일부 있어서 사건의 본질을 놓고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서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46년 4월이후 북조선 공산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판사사건에 대해서는 산만한 논의만 있었을뿐 뾰족한 해결책은 찾아내지 못한채 나중에 다시 대책회의를 갖기로 하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협의회 회의에서 논란을 일으킨 또다른 중요한 주제는 좌우 합작문제였다.


 

 

   이상.    끝.   2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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