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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중. 8월종파 사건이란.?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2 2019-12-02 17:11:02

내가 북한학을 전공해서 (물론,지금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지만) 예전에 공부한 내용중에 문득 생각이 나는게 있는데..

 

아마 북한분들이나 탈북자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우리 국민들은 잘 모르시는것 같기도 하고 또, 북한 역사에서 이 정도 1가지는 알아두어도 좋을 것 같아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이때 김일성이 만약 제거 됐으면 역사가 바꼈을 텐데..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박헌영이 미.간첩 의혹과, 6.25전쟁의 책임의 누명을 다 뒤집어 쓰고 사형 선고를 받으며 숙청되자, 중국과 소련에서는 북한 당국에게 그를 자국으로 망명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합니다.

 

중국과 소련은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었다는 북한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해방공간(1945.8.15~1948.8.15)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인과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며, 북한 정부 수립 이후 박헌영의 간첩 활동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또한 박헌영은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도 친분이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북한 대사 이바노프를 통해 박헌영을 소련으로 망명시키라고 요구했고, 또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박헌영을 중국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북한 정국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김일성 단독권력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연안파, 소련파를 중심으로 '이대로 김일성에게 당하기만 해선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에 불을 지핀 것이 1956년 2월 소련에서 일어났던 "스탈린 격하" 사건입니다.

 

소련 초대 지도자인 레닌이 사망한 1924년 이후, 가장 명망있었던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지도자였던 트로츠키와의 정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명실상부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비교적 민주적 지도체제를 추구했던 레닌과 달리, 스탈린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스탈린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했습니다. 이는 '맑스-레닌주의'와 비교되는 '스탈린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스탈린에 대한 충성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언제나 '소련의 아버지', '러시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 독재 체제 하에서 자행된 수많은 숙청과 이로 인한 고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죽은지 3년째 되던 1956년 2월,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20차 전원회의에서 비밀 연설을 기획하고 실행합니다. 바로, 아버지 스탈린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연설의 영상, 사진도 없고 신문에도 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권 지도자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 연설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번져 헝가리, 폴란드 등 수많은 공산권 국가로 퍼졌고, 북한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북한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단일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라는 문제를 겪고 있었으므로, 김일성 유일권력에 몸을 사리고 있던 북한의 정치인들에게 스탈린 격하 소식은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박헌영 숙청으로 김일성에 대한 깊은 불만을 품고 있던 연안파, 소련파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박헌영이 숙청된지 5개월 후이자 스탈린 격하 사건이 벌어진지 1개월 후인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소련파 및 연안파는 김일성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김일성은 개인숭배가 박헌영 탓이라고 둘러대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더불어 김일성은 강경하게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했는데, 연안파와 소련파는 경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해 갈등을 빚기도 했었습니다.


소련파와 연안파는 보다 직접적으로 김일성을 공격하기로 계획했습니다.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등은 김일성의 잘잘못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로 했습니다.

 

박헌영 숙청 후 북한 정국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소련의 스탈린 격하 사건처럼 김일성의 지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1956년 8월에는 김일성이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로 해외 순방을 떠나있었습니다. 바로 이때를 노렸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제3차 당대회를 한지 4개월 후인 1956년 8월 평양예술극장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반-김일성 세력은 김일성 해외 순방을 할때, 이 곳에서 김일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8월 전원회의가 시작되었고, 상업상(장관)이었던 연안파 윤공흠이 연설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하자, 수많은 친-김일성 세력들은 윤공흠에게 "종파*분자는 내려오라"고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종파宗派: 사회주의, 지도자 등 북한에서 주된 가치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북한에서 비난조로 일컫는 말)

 

당시 전원회의에 참석했던 전 북한 내무성 정치국장이었던 강상호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윤공흠이 연설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에게 개인숭배가 있고 탄압정책이고 숱한 간부들을 청산했고... 우리 당에 이런 것이 있다'라고 얘기할 참이었습니다.

 

나도 내무성 정치국장으로서 중앙당 준비회의에 참가해서 내 눈으로 보고 들었는데, 어떻게 준비했느냐 하면, '만일에 연안파가 나와서 토론하게 되면 막 발을 구르고 손뼉 쳐서 말을 못하게 하라, 내려오라 내려오라 하자'라고 준비를 했어요.

 

실제로 윤공흠이 연설할 때 막 일어서고 '반당종파분자를 몰아내라' 하니까 윤공흠이 말을 못하고 내려왔지."


반-김일성 세력이 기획했던 김일성 비판은 이미 친-김일성 세력에게 파악된 뒤였고, 친-김일성 세력은 이에 대해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반-김일성 세력은, 최용건 등 조선노동당 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들도 비판했었는데, 이에 대해 핵심 간부들의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8월 전원회의에서의 사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크게 분노하여 급히 귀국했습니다.

 

박창옥, 최창익, 서휘, 윤공흠 등 반-김일성 세력은 모두 직책을 박탈당하고 당에서 쫓겨나는 등의 방법으로 숙청되었습니다. 


한편 8월 전원회의가 끝난 날 밤 서휘, 윤공흠 등 반-김일성 세력을 형성했던 소련파와 연안파의 핵심 인물 4명은 급히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들은 중국 당국에게 북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중국 뿐만 아니라 소련도 김일성의 북한 내에서의 권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으며, 8월 전원회의에서의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국과 소련은 급히 국방부장 팽덕회와 부수상 미코얀을 북한에 파견하여 8월 전원회의 이후 있었던 정치적 숙청을 번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미코얀은 소련의 부수상일 뿐만 아니라 단일지배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했으며, 한국전쟁에 중공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팽덕회는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일성은 바로 다음 달인 9월에 전원회의를 개최해 8월달에 있었던 결정이 성급했다고 말하며, 숙청되었던 인물들 전원의 지위를 원상복귀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코얀과 팽덕회가 북한을 떠나자마자 김일성은 다시 8월 전원회의에서의 일을 '8월 종파사건'이라 명명하고, 관련자를 색출하여 숙청하는 이른바 '반종파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스탈린 격하 이후 강하게 갈등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스탈린식 단일지배체제를 거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선택하자 중국이 이를 '수정주의'라 비난하고, 소련은 중국의 단일지배체제(개인숭배)를 '교조주의'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공산권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소련과 갈등하던 중국은 구태여 북한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소련은 스탈린 격하 이후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데 집중하여 북한에 더 관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이러한 중소 갈등 상황을 이용하여 '반종파투쟁'을 1956년 12월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북한은 김일성 중심 유일지도체계의 기반을 완성합니다.


"수령", "유일자", "독재자", "반신(半神)"... 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에게 연상되는 단어들은 북한의 유일무이한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8월 종파 사건이 있었으므로 확립될 수 있었습니다.

 

8월 종파 사건은 김일성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북한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일성은 8월 종파 사건을 마무리하여 북한 내에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8월 종파 사건이 조금 다른 모양으로 진행됐다면 오늘날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보게 됩니다.

 

 이상..  이 일이 흔히 8월종파사건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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