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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과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 공개..전설적 김일성 장군의 진실과 정체..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4 2020-01-04 22:53:13
김경천장군연구및topic..

김경천과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문서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김일성 장군의 정체..

이젠 어느정도 역사에서 전설같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진실히 밝혀지고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일제시대에 전국민의 추앙을 받은 김일성장군이 해방후에 이데올로기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


1990년대에 그 속에서 빠져나왔는데 반세기 동안 파묻혔던 관계로 국민한테 관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김일성장군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장군이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본 군경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한국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런 인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장군은 전설 인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전국민의 추앙을 받은 인물을 100% 허구의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별호를 사용했고 국경에서 활약했다. 그러므로 김성주가 김일성장군 전설 형성에 한몫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것은 오늘날 학계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김성주가 백여 명 빨치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울 때. 일제는 수백만 군대를 이끌고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성주로서는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김일성장군이 결코 될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설 인물이든 실존 인물이든 간에 한반도 방방곡곡에 알려지고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라면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945년 직후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해방직후 기록을 조사해보면 ‘김성주는 가짜이고 김광서가 진짜 김일성’이라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이데올로기 문제가 이미 불거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 외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해방후 정부도, 언론도, 학계도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 말인들 안 나올 수 있겠습니까.


김일성장군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이 모두 작고해버린 오늘날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가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1945년 해방후 한국이 미국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 미국은 최고 선진국입니다. 그 정부 문서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기밀문서의 경우, 이데올로기 문제도 없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의 정확함은 유명합니다. 1945년 직후 그들은 김일성장군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기밀문서도 시한이 차면 공개합니다. 지난해부터 김일성장군에 대한 기밀문서를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미국 기밀문서에서,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본 군경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한국 국민한테 추앙을 받은 김일성장군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이다”고 했습니다.


우파에게는 다행하게 좌파에게는 불행하게, “김성주가 본래는 김일성장군과 이렇다 할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했습니다.


*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는 특종 중 특종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서가 한국에서 정부, 언론,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에서 특종임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짧게 보도했을 따름입니다.


해방직후 평양에 온 소련군 대위 김성주가 일제시대 ‘장백산의 호랑이’로 명성을 떨친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배경을 상세히 기술한 미국 군사정보국 기밀해제문서가 발견됐다.


미 극동사령부 군사정보국(G-2)이 1952년 7월31일 작성한 기밀 보고서 ‘인민군의 역사’(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는 북한 ‘주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개요’ 부분에서, 김일성에 대해 “북한 수상이자 북한군총사령관인 김일성은 북한의 최고 공산당이자 ‘가짜’(Imposter)이다”며


“모든 ‘코리안들’(Koreans)이 숭배하는 진짜 김일성은 1885년 태생으로 만일 그가 현재(1952년 7월31일)까지 살아 있었다면 오늘 나이 67세가 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진짜 김일성 장군은 “경상남도에 살았던 ‘김춘한’(Kim Chun Han)의 차남이었고 매우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후에 (일본)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졸업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게릴라’(Guerrilla) 대장이 됐다”며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할 당시 모두 (일본군) 대령 또는 장군이었던 그의 군사학교 동기들에 따르면 그는 전술가로서 탁월한 능력

을 발휘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코리아’에 있던 일본군들에 대한 그의 습격들은 전설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결국 만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곳에서도 (습격에) 계속 성공을 거둬 일본군에게 ‘장백산의 호랑이’(The Tiger of Chang Pek San)로 알려지게 됐다”며 “1935년 봄 만주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한국 역사에 전설적 인물로 알려지고 있는 김일성 장군이 그와 함께 일본군 사관학교를 다녔고 2차 세계 대전후 미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실제 인물로 확인됐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 당시 김경천(김광서)의 일본육사 동창들이 장군, 대령으로 있었다. 이 문서는 그들의 증언에 의거해 작성한 것이다. 미국정보국 관계자가 통역을 통해 들은 것이라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줄거리는 김경천의 경력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가짜 김일성


보고서는 이어 “현재(1952년 7월31일) 김일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성주는.. 1912년 4월 ‘김형직’(Kim Hung Jig)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그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서울에서 1918년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잡혀 투옥된 후 결국 옥사했고 김성주와 2명 동생들은 만주로 도피했다”고 기술했다.


또 김성주가 만주 지린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을 하지는 않았고 1929년 학교를 중퇴하고 공산당에 가입해 동만주 청년동맹위원회의 지린 지역 서기가 됐으며 바로 그 시기에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그 시기 김성주의 둘째 동생 김철주는 형 김성주의 영향에 의해 일본군과의 전투중에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사했다고 기록되 있다.



보고서는 특히 “김성주는 1930년대 초에 잠시 ‘우이쳉’(Wu I-Cheng)의 (중공군) 부대에 소속됐었고 당시 동만주에는 코리안 ‘게릴라’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김(성주)는 매우 능력 있는 ‘게릴라’였음이 분명하며, 그로 인해 진짜 김일성의 주목을 받게 됐다”고 밝혀, 김성주와 김일성 장군이 장소는 틀리지만 한때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보고서는 김성주의 구체적인 ‘게릴라’ 활동에 대해 “젊은 김(김성주)는 북만주군과 동맹을 맺는 일에 관계했으며 1936년에 항일연합군이 설립됐다.


이 ‘게릴라’ 군대의 3군단과 6군단이 ‘코리안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김성주)는 1938년 6군단의 사령관이 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 지역으로 도주한 1939년까지 매우 활발한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그러나 김성주가 소련으로 도피한 뒤 “소련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며 “그가 소련 군사학교에 들어가 대위가 됐고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에 실제 참가해 훈장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성주의 둔갑


보고서는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내역에 대해 “김성주는 1945년 8월 러시아인들과 함께 소련군 육군대위로 북한에 돌아왔다.”며


“그는 북한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던 '비공산당'(Non-Communist) 지도자이자 능력 있는 민족주의자 ‘조만식’(Cho Man Sik)에게 교제를 구해.


비밀리에 자신이 열렬한 민족주의자이고 ‘코리아’에 대한 공산당의 계획 일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꾸며댔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또 “이에 속아 넘어간 조(만식)은 1945년 10월3일 평양에서 열린 해방 축전에서 김성주를 열렬한 ‘코리안’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자로 평하고 김일성으로 소개했다”며 “조(만식)의 명성은 진짜 김일성이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두루 생각하지 않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김성주가 열성적인 환영을 받는 것을 보장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까지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1945년 10월14일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성주를 처음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고, 그 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행세를 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보고서는 이어 “김(성주)는 곧바로 높은 인기를 얻었고 같은 달 소련의 전격적 후원을 업어 지역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당의 대표직과 ‘코리안 공산당’의 대표직을, 이름뿐만의 대표인 박헌영으로부터 획득했다”며.


“박헌영은 남한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로 ‘코리안’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찬밥신세가 된 것과 (가짜 김일성)에게 마음대로 이용된 후 내버려져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고서에는 김성주가 장악한 ‘코리안 공산당’이 1946년 ‘혐의들을 꾸며내’(trumped up charges) 조만식을 체포했다는 첩보가 담겨있다.


한편 보고서는 김성주를 개인적으로 잘알고 있는 비공산당들은, 그를(김성주)를 행정능력이 매우 뛰어나고 외국어 능력도 있지만, 교육이 부족한 그러므로 지식인은 아닌 반면, 또 이상하게 능력과 수완이 매우 뛰어났고 영리했던 ‘무자비한’(ruthless) '게릴라‘ 대장으로 평했다고 기록했다.



김경천에 관한 국회와 보훈처의 견해..



민원인이 OOO의원실에 보낸 이메일(9월) /


김경천장군 공적관련 검토보고(보훈처에서 5월에 OOO의원실에 발송) /

보훈처의 검토보고에 대한 민원인 소견(OOO의원실에서 6월에 보훈처에 발송) /


OOO의원실에서 보훈처에 자문을 요청한 사항(김의원실에서 4월에 보훈처에 발송) /

① OOO의원 정부요청사항(대필) /

② 김경천의 일기 <경천아일록> 학술토론회 /


민원인이 추가로 제출한 자료 /

① 김경천 관련 자료 /

② 민원인이 언론계에 보낸 이메일(예정) /



민원인이 OOO의원실에 보낸 이메일 ― 9월


1. 4월에 OOO의원실에서 민원인의 요청 사항을 보훈처로 보냈습니다.

2. 5월에 보훈처에서 그 사항의 문제점을 지적한 공문을 OOO의원실에 보냈습니다.

3. 6월에 OOO의원실에서 보훈처에 ‘그 공문에 옳지 않은 내용이 있음’을 지적해주었습니다.

4. 9월 현재, 보훈처에서 OOO의원실의 지적(6월의 것)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공문을 김의원실에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문관례상) 4월에 OOO의원실에서 요청한 사항이 옳음을 보훈처에서 인정해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 만약 보훈처의 공무원이 얼토당토않은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 다음 민원인의 요청을 묵살시키면 그 민원인이 감사원 및 국회와 청와대의 감사팀에게 진정을 할 것이고 이에 그 공무원이 문책을 받게 됩니다.


보훈처에서 인정해준 우리의 요청사항


1. 김경천장군의 공적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났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에 관련된 자료로 보이므로 정부에서 일부 학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 평가 검증해야 한다.

2. 김경천장군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의 평가와 검증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3. 러시아 당국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김경천 장군의 유물 반환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김경천 장군 공적 관련 검토보고-보훈처에서 5월에 OOO의원실에 발송



성 명

김 경 천

(金 擎 天)

1888. 6. 5.

서울 종로..

독립군


김지희

(1942)



???? 인적 사항

???? 공적 개요


? 일본 육사 졸업 후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

1920년 노령 연해주로 망명, 니항(니꼴라예프스크)전투에서 러시아 백군과 교전,

수청(스찬)에서 마적을 몰살하여 동포들의 생활안정에 기여

1921년 수청에서 창해청년단을 결성하여 마적 퇴치 활동

1921년 수청고려의병대 총책임자로 사관 속성과를 설치, 군사교육 실시 및 수청지역 마적 퇴치활동

1922년 수청고려의병대를 지휘하여 러시아 적군과 함께 백군과 교전, 이만市 점령

1922. 10월 수청에서 고려혁명군의 동부사령관으로 활동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로 새로운 임시정부 결성을 주장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윤해 등과 민족당주비회를 조직


???? 서훈 내역


?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에 추서

???? 민원인 주장


? 김경천 장군의 공적에 비해 훈격이 낮으므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상향 조정해야 하며,

? 김경천 장군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의 평가와 검증에 정부가 나서야 함

? 러시아 당국이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경천 장군 유물 반환에 정부가 나서야 함.


???? 검토 의견


? 재심사를 통한 훈격 상향 조정 문제


- 독립군으로 러시아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공적으로 2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 주요 공적이 일본군과 전투보다 마적 소탕을 통한 동포 보호와 러시아 백군과의 전투이며, 주요 활동 기간도 1919년부터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는 1922년에 집중되어 단기간임.

김경천 장군의 공적은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인 지청천(대통령장)과 비교해도 활동 내용이나 활동기간으로 보아 결코 훈격이 낮다고 할 수 없음.

따라서 김경천 장군의 훈격은 적정한 것으로 판단됨.

* 지청천 :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1920년 대한독립군단 부사령관,

1921년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

1925년 만주에서 정의부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활동,

1928년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 통합운동 전개,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한국독립군 총사령으로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 전개,

1932년 아성현 전투, 쌍성보전투, 대전자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대승,

1934년 민족혁명당 창당, 군사국위원장,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지금의 장관) 및 군무장, 1940~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대일항전


????경천아일록????의 평가와 검증 요구


- ????擎天兒日錄?은 김경천 장군의 친필 회고록(A4 용지 77쪽 분량)으로 1925년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임.

한글 필사본이므로 번역 해독에는 어려움이 없으며 내용에 대한 검토는 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접근할 사안으로 판단됨.


* 손자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홍범도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에서 입수


? 러시아 당국이 보관하고 있을 유물 반환 문제


- 유물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 반환은 유족이 러시아 당국에 요구해야 할 사안으로 판단됨.


보훈처의 검토보고에 대한 민원인 소견 ―  6월, OOO의원실에서 보훈처에 발송


김경천 장군 공적 관련 검토 보고 - 보훈처



**민원인 소견 : 《경천아일록》은 2005년도에 발굴되었습니다. 홍범도사업회 관계자에 의하면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복사해갔습니다.《경천아일록》이 <백여년전 독립운동가의 친필 수기>이므로 설혹 무식한 야인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판 내용이겠지만) 학자들의 그것에 대한 의견이 있어야만 합니다.


김경천은 이청천, 홍범도와 나란히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이고 또한 원조 김일성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친필 회고록(A4 용지 77쪽 분량)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므로 비판적인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학자들의 의견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경천아일록》을 복사해간 학자들은 많은 데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간에 지금까지 한 사람 이외에는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모두 해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천아일록》은 한글필사본임으로 누구나 (의미 파악을 제쳐놓는다면)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에 <번역 해독> 문제는 없습니다. <본 의미 해독>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 《경천아일록》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한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만주,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 연구가인 장모박사입니다.

홍범도 기념사업회에서 《경천아일록》을 발굴한 다음, 장박사에게 감수를 의뢰했습니다. 그의 감수 내용이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본 의미)해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장박사가 해독한 것은 앞에서 말씀 드린 것, 곧 <《경천아일록》은 한글필사본임으로 누구나 (의미 파악을 제쳐놓는다면)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 그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 예를 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장박사가 해독한《경천아일록》한 페이지 내용이 KBS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는데 그 내용이 본래 의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논문(저서)에 그 한 페이지를 해독한 것을 게재했는데 그 내용도 본래 의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박사도《경천아일록》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한 오직 한 사람 학자였습니다.)


*** 보훈처의 관계자가 ‘내용에 대한 검토는 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접근할 사안으로 판단됨’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한글 필사본이므로 번역 해독에는 어려움이 없으며’라는 전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보훈처 검토보고 계속)


? 러시아 당국이 보관하고 있을 유물 반환 문제


- 유물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 반환은 유족이 러시아 당국에 요구해야 할 사안으로 판단됨.


민원인 소견 :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 들어간 것은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가족은 그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삼대가 고생을 했습니다.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그 유족들을 보호해주고 또 그들을 대신해 그 유물을 찾아서 보존했습니다. 이 업무를 위하여 보훈처를 세웠습니다.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물의 반환 문제의 경우에는 외무부, 문체부도 나서고 있습니다.


김경천 가족은 그가 독립운동을 한 탓으로 스탈린의 영향력으로 고국 땅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끌려갔습니다. 삼대가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웠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물 반환을 거부하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유물을 찾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 <유물 반환은 유족이 러시아 당국에 요구해야 할 사안으로 판단됨.>라는 것은 <유물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며,>라는 전제에 의한 것이라고 선의(善意)로 해석하겠습니다.



* 아래 것은 민원인이 국회 관계자에게 보낸 이메일입니다.


안녕하세요.

보훈처 관계자의 말씀이 문맥상으로는 옳은 것인데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군요.

‘김경천의 일기는 어렵지 않아 누구나 읽어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교수들이 해독할 길이 없다며 제 책을 구하려고 저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소련당국이 보관하고 있는 김경천의 유물은 그 가족이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정부에서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물을 찾으려고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정부에서 해외에 있는 안중근, 이준의 유물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유물을 발굴, 진열하려고 수천 억 원을 들여 독립기념관을 세웠습니다.

박비서관님 질의, 공무원 답변 과정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아래 것은 민원인이 앞서 국회(보훈처)에 제출한 <김경천 일기 학술토론회>에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여러 학자들이 <경천아일록> 해독에 나섰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경천아일록>이 난해한 이유를 밝힌다면 아래와 같다.


① 한글맞춤법이 제정된 것이 1930년대였다. 김경천은 19세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경천아일록>은 이조시대 언문체 글과 대차 없는 것이다.


<난중일기>는 순전히 한문체인데 반하여 <경천아일록>은 순전히 언문체이다. <백범일지>도 처음에는 언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김구 자신이 해방 후 맞춤법에 따라 교정한 다음 발표했다.


② <백범일지>는 김구가 후방의 자기 방 책상에서 착실히 기록한 것인 반면에 <경천아일록>은 김경천이 전쟁터에서 낙서하듯이 기록한 것이다.

<난중일기>도 이순신이 후방의 책상에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경천아일록>은 <백범일지>나 <난중일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할 수밖에 없다.

③ 김경천은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십수 년간 하루 24시간 일본인 가운데에서 산 관계로 한국어를 태반 잊어버리게 되었다. ― 김경천의 일기에 있는 내용이다.


만약 그가 일본어로 일기를 썼다면 그처럼 난해한 것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한다는 사람이 일본어로 일기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째든 그의 일기가 아주 난해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④ <경천아일록>은 한자를 많이 섞어 썼는데 한자라기보다 중국어이다.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난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 블로그 김경천장군연구및topic.. 


김경천 장군 최신 연구 (수정)


** 비운의 혁명가 김경천의 최후장면


독립운동 무장독립운동사 김좌진 홍범도 김경천 이홍광 허형식 김성주


유길만의 김경천 장군 연구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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