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 역사의 빛 청년. 기억하려면.. 1919년 4월 11일은 임시 정부 수립일이다. 최근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가 이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올해 어느 때보다도 임시 정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리고자 하는 임시 정부의 내용에 관해서는 제대로 조명되고 있을까? 혹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로서의 임시 정부가 몇 사람의 단편적인 역사인 것은 아닐까?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의원이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과거 임시 정부를 거쳐간 사람들은 어림잡아도 20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몇 사람에 의해 운영된 임시 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저 2000여 명 중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선열들은 몇 분이나 될까? 바로 이 '기억되지 않은, 하지만 기억해야 할 독립 운동사-독립운동가'에 대해 EBS <다큐프라임>에서 다루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리즈로 방영되고 있는 <다큐 프라임> 중 <역사의 빛 청년> 기획은 잊혀진 독립운동가에 관해 간절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 시작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지 않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던 '하와이 독립운동'부터다. 지난 9일 방영된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에서는 조명하 의사를 잊혀진 기억에서 다시 떠올리게 한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일본 육군 대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의거
1928년 5월 14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대만에서는 구미노미야 구미요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의 환송식이 있었다. 무개차를 타고 환송 인파들 사이를 서서히 지나가던 구미노미야. 그때 인파 가운데에서 뛰쳐나온 청년 조명하가 단도로 그를 찔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은 해임되었고, 결국 구미노미야는 8개월 뒤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명하 의사는 군청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26년 좀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야간 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하던 중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하려 했던 금호문 사건, 나석주의 동양 척식회사 폭파 사건 등을 겪으며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자 마음먹었다.
임시정부로 가고자 했던 조 의사는 상해로 가기 위해 대만에 들러 찻집에서 일하던 중 일본 육군 대장이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척살을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며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라는 유언을 남긴 채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배우 이순재가 조명하 의사를 기리기 위해 <역사의 빛 청년> 제작진들과 함께 대만을 다시 찾았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먹는다는 이곳의 맛집 거리는 한국에서 대만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빠짐없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그 거리 맞은편에 조명하 의사의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만 여행기를 다뤘던 <꽃보다 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맛집 거리의 맞은 편에는 타이페이 형무소의 벽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죽은 미군 병사의 기념비가 있어 길 가던 외국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명하 의사의 기록은 없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기억되기 위한 조건
이에 관해 다큐 제작진은 그 이유를 찾아간다. 조명하 의사에 대한 기록은 단 두 장의 사진뿐이다. 도대체 왜일까. 의사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마다 끝머리에 늘 '불태워라'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가족들을 염려해 태우라고 한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래서 기록이 많이 남지 못한 것이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기록으로 남겨져야 기억되는 역사에서 자신을 지워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결의는 역사의 행간 저편으로 흩어지기 십상이었다. '이대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윤봉길 의사의 편지를 받고 윤봉길 의사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안방 천장 위에 숨기고, 피란 길에도 품에서 놓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의 동생 윤남의씨가 있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윤봉길 의사가 있었다. 그렇듯이 '기록의 소실'이 많은 독립 운동가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이다.
거기에 더해 왜곡된 기억이 독립 운동가들을 역사 저편에 묻는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뒤 무려 한 달 만에 대만 '일일신보'는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다뤘다. 하지만 내용은 딴판이었다. 모르핀 중독자가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충동적으로 사건을 벌였다는 식이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를 취업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폄하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이러한 '의도를 가진 역사의 왜곡'의 여파는 길다. 대만 타이중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명하 의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김상호 교수는 오늘날 대만 만 역사 사전에 여전히 일본의 왜곡된 기사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통해 대만에 대한 안정적 통치와 자국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일본의 저열한 정책을 복기한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재조명에 성공한 독립 운동가의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남겨진 사진은 겨우 두 장, 기록도 없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이회영 선생. 그런 이회영 선생에 대한 기록을 부인 이은숙 여사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가 되살려 냈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을 받들었던 후배 독립 운동가들의 증언도 더해졌다.
그렇다면 조명하 의사에게는 후손이 없었을까? 아니, 물론 후손이 있다. 단지 저 멀리 호주 시드니에 있을 뿐이다. 그는 얼굴도 몰랐던 아버지를 '이게 네 아버지의 유골이란다'는 어머님이 보여주신 유골로 만났다고 한다.
아버지를 우리 사회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아들 조혁래씨는 선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8년 10월 10일 서울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하게 시달렸다고 한다. 아들이 못나서 아버지를 큰 사람을 못 만들어 드렸다는 죄책감만을 짊어진 채 조혁래씨는 눈을 감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은 가족들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건가'라는 자괴감을 안고 손자는 조국을 떠났다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왜 똑같이 독립 운동을 했는데 기억되는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실까? 여기엔 '시대적 변화'라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다. 윤봉길 의사의 후손은 수교 이전에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홍커우 공원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했다. 중국 정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국교가 정상화되자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세워지고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수교 이후 이회영 선생에게는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유공자 증서인 '혁명 열사 증서'가 수여됐다. 가족들도 몰랐는데 중국 정부가 나서서 이회영 선생이 돌아가신 여순 감옥에 안중근,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을 만들어 줬다.
반면 동시에 그간 수교 상태에 있었던 대만과 단교 상태가 되어 버렸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대만을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조명하 의사는 마치 배신자의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외교적 문제로 대만에서도, 한국에서도 조명하 의사는 주목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외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이승만과 가까운 사람들만 독립 운동가로 인정받아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때로 정권의 입맛에 따라 독립 유공자들의 인정과 등급이 달라져 왔다.
그런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다. 조명하 의사는 그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명하 의사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가려져 있을까?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조명하 의사를 대만에 있는 한국 교포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기린다. 타이페이 한국 학교에는 조명하 의사 흉상이 있다. 매년 추도식을 하고, 조명하 의사를 기리며 글짓기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이제서야 조명하 의사 연구회가 한국에서도 만들어졌다. 손자 조경환씨도 참여했다. 고국에 돌아온 조경환씨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뒤늦게라도 받들어 할아버지의 의거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드리라 다짐했다.
기록이 없어서, 아니면 기록이 왜곡돼서, 기억해줄 후손이 없어서, 혹은 있어도 기억하고 기록하는 과정에 좌절해서, 그리고 시대와 정권의 변덕스러운 흐름이 있어서... 이런 여러 이유로 우리의 수많은 조명하 의사들이 제대로 된 독립 운동가로 조명받지 못한 상태다.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임시 공휴일을 제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당당한 우리의 독립 운동사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BS <다큐 프라임> - <역사의 빛 청년> 기획이 개척하는 길은 반갑고 소중하다.
큰사진보기 ▲ 지난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기획 중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편. ⓒ EB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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