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Oh~~my~god 예수님 말씀.. 05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308 2020-06-21 22:39:32

잠깐 설명..!!



<도마 복음>은 콥트어(1세기경부터 사용되어 7세기경 이슬람이 정복할 때까지 이집트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용된 공식언어)로 쓰여졌다, 이보다 이른 시기인 19세기 말, 나일강 하류의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뭉치에도<도마 복음>의 일부가 담겨 있었으며 이것은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이다, 학자들은 콥트어 본이 그리스어 본의 번역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첫구절 ;

                  "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속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다,"



그렇다면 저자와 시기 ;  유다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도마가 직접 쓰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에 쓰여진 것이라고 본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그랬듯 도마는 시리아 지역의 믿음의 대표격이었다, 따라서 도마 복음은  시리아에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 복음서의 저작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어록 복음서의 특성상 4 복음서보다 먼저 씌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영지주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영지주의가 유행했던 1세기 후반 이후의 저작, 또는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누가복음 17: 20- 25 (공관복음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마태, 24, 23, 28, 37, 4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들 인도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공중에 새들이 너희보다 앞설 것이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바다 속에 있다` 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앞 설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바깥에 있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고

       너희는 너희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가난 속에 머물게 되고

       너희 자신이 가난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래 글은 도마복음서 26절과 공관복음서(마태복음서, 누가복음서) 모두 다 있다.



" 다른 사람의 티는 잘 보면서, 자기안의 들보는 못본다" 는 예수의 말씀이 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마태복음서 7:3~5


 

        마태복음서에서는 `위선자`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너희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너희가 먼저 너희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낼 때 너희는 비로소 밝게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도마 복음 26절)


 

                 나는 모든 것을 위에서 비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무토막을 쪼개 보라,

                 내가 그곳에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그곳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예수는 내면세계의 혁명가였다, 그는 인간 내면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의 씨앗이다, 그대 역시 그 씨앗을 가지고 있다,

               씨앗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씨앗 자체가 감옥이 되어 버린다,

               씨앗이 나무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죽을 때 나무로 자랄 수 있다,

               예수는 깨달음의 나무이다, 그대가 곧 씨앗이고 하늘나라의 가능성이다,

               죽을 준비를 하라, 삶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서서히 퍼지는 독이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러면 이어서 진도를 나가겠다.)



40.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버지 밖에 심어졌다.

그 나무는 견고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뿌리째 뽑힐 것이며, 멸망할 것이다."


해석 - 50절에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를 인용하여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해석하면...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심어진 포도나무가 생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는 당시 잘못된 사상을 가르치던 많은 선각자들을 주의해야 올바르게 깨달음을 구할 수 있음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라 해석된다.


 

41.예수께서 가라사대,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해석 - 첫 줄에서 예수가 말하는 가지다라는 것의 의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줄에서 조금 가지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관직이나 물질적 의미 재산을 의미한다.

예수는 깨달음이 아무리 적더라도 일단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그것의 가치는 큰 물질이나 관직을 가진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신에게서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얻은 이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러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재산이나 관직마저 잃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재산이나 관직은 자신이 영원히 가질 수 없으나, 깨달음은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자신이 소유할 수 있게 된다.


 

42.예수께서 가라사대,   "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해석 - 42절을 이해하려면 도마복음은 전체적으로 당시 예수를 따르던 도반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살아 있는 예수는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도반들에게 도반 자신들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나라, 빛)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한결 같이 말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로 42절을 본다면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방랑자가 되라는 말씀은 물질 우선주의 삶보다는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이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영혼의 방랑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도올선생은 이 때의 깨달음을 70강에서 동양사상의 "유여 열반" 즉, 불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구하는 이미다 얻을 것이요"

이 구절을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을 빌어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탐구와 정신 수양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면 누구나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4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당신이 도대체 뉘시길래 이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도다.

차라리 너희는 유대 사람들처럼 되어버렸구나.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면서 그 열매를 증오하기도 하고, 열매를 사랑하면서 그 나무를 증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석 - 도반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통합적 사고의 반증.

예수는 도반들에게 이르기를 예수 자신의 말의 의미, 진위, 가치를 보려 해야지,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어떠한지 등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44.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거룩한 영혼(정신)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해석 - 훗날 학습에 보탬이 되고자 도마복음 전체를 나름대로 해석함에 있어 도올 선생님의 강의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44절의 번역(원 번역분 수정 - 괄호부분)은 본인의 생각이 약간 반영되어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는 44절에서 도마복음 영문을 참고하여 약간 다르게 해석을 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도마복음 한글 해석본 전체를 통틀어 이 구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때문에 44절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최소한 콥트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구를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마복음 44절 마지막 줄에 등장하는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라는 부분은 영어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http://gnosis.org/naghamm/gthlamb.html)

위 영문을 있는 구글 번역기에서 돌리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라 번역이 되며 또한 구글 번역 역시 문장 전체의 번역에 있어 "holy spirit"가 성령이란 문구로 번역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holy spirit" 만을 떼어서 두 개의 단어를 각각 별도로 번역을 하면 매우 다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정신"이다.

여기에서 더 들어가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성령"이라는 단어가 '성스러운 영혼'의 줄임말이며, 여기에서 "영혼"은 곧 정신과 같은 의미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시체와 다름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은 종교와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과 동급인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룩한 정신"(성스러운 영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의 감동' '성령의 은혜'라는 것이 실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껏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영혼의 교감 혹은 내면의 감동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들이 "영혼의 교감"을 "성령의 감동"이라 부르고, 마치 예수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마냥 포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교인들의 교회 충성을 유도하고, 재물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holy spirit"로 돌아와 다시 보면 holy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spirit에는 정신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holy spirit"를 해석함에 있어 "성령"이라 해석하기보다는 "거룩한 정신" 또는 "거룩한 영혼"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매우 잘 맞지 않나 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왜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분의 강의에 담긴 숨은 뜻을 완전하게 이 글에서 재현할 수는 없으나 도올 선생은 도마복음 강의 중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신 바 있다.


"석가모니나 예수는 당시 포교활동을 하거나, 도반이나 대중을 상대로 예수운동을 하는 등의 말씀을 전할 때에 두 분 다 공통적으로 종교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천국운동을 하던 당시,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두지 않았던 예수가 성령이라는 의미를 입에 올렸을 리가 없거니와, 표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운동은 유대인들의 율법(현재의 구약성경)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예수가 유대인들의 유대교 경전(현재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을 추종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다.

또한 예수는 도반들에게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인 탐구와 노력을 통하여 정신적인 수양을 통한 해탈과 같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44절을 내가 도올 선생과 다르게 해석하게 된 이유다.

 

최종적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44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볼 수 있다.


44절의 아버지나 아들은 말 그대로 가족의 개념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도마복음은 살아 있는 예수가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령. 아버지, 아들이란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여 성경의 아버지, 아들, 성령과 연결시키려 드는 순간 그 해석은 안드로메다로 가 버릴 우려가 발생하게 된다.)


가족 간에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부정하거나, 더럽혀 욕되게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임을 도반들에게 예수가 말씀하시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추가로, 말씀을 거룩한 정신의 표현이라 한다면,

만일 예수의 말씀을 들은 도반들이 43절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면 예수로서는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법한 경우일 것이다.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포도는 가시나무에서 수확되지 않고, 무화과는 엉겅퀴에서 수확되지 않나니, 이것들은 열매를 맺지 않음이라.

선한 사람은 창고로부터 선한 것을 내온다.

나쁜 사람은 가슴속에 있는 나쁜 창고로부터 나쁜 것들을 내오고 또 나쁜 것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은 가슴에 쌓여 넘치는 것으로부터 나쁜 것들을 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석 - 선한 행동과 선한 마음을 쌓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는 도마복음 내내 예수가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이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계속해서 추구할 때 비로소 내면에 선한 기운이 가득 차고 비로소 그것에 의한 선한 표현이 가능해짐을 의미한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 아담으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이는 없도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눈길은 돌려져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이미 나는 말했노라,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아기가 되는 자는 나라를 알 것이요, 요한보다 더 위대하게 되리라.

 

해석 - 46절에서의 "나라"는 계속적인 탐구를 통하여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아이와 같은 매우 순수한 정신의 세계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신적으로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정신적인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신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정신적인 세계라는 개념으로 나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kingdom을 한글로 번역을 하면 세계라는 의미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7. 예수께서 가라사대, "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말 위에 올라탈 수 없고, 한 사람이 동시에 두 활을 당길 수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은 한 주인은 영예롭게 할 것이나 또 한 주인은 거스르게 되리라.

그 어느 누구도 오래 묵은 (양질의)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부어 넣지 않는다.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묵은(양질의)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쏟아붓지도 않는다.

그(양질의 포도주의) 맛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가 기워 붙이지 않는다. 그것은 새 천에 안 맞아 다시 터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두 말, 두 활, 두 주인, 오래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낡은 가죽부대와 새 가죽부대, 낡은 천조각과 새 천조각...

여러 가지의 예를 들고 있으나 결국 한 가지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 한 가지의 뜻이라 함은, 자신의 설교를 유대인의 율법에 맞추려 하거나, 율법의 기준에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의미로써, 예수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판하고 있었던 점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있어 유대인들의 율법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 여기서 움직여라!'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해석 - 48절의 "집안"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구조물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영혼, 정신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이라는 의미는 29절에 등장하는 세속적인 탐욕에 대한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영혼이 육신의 모습으로 존재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과 유사한 표현을 6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평화"라는 단어는 61절의 "분열되지 않는 전체"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48절의 후미 부분은 실제로 산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게 됨으로써 그 정도로

놀라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복이 있을지어다! 홀로 되고 선택된 자여!

왜냐하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너희는 나라에서 왔고, 또다시 나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다스리고,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세속적인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상태, 분열되지 않은 상태, 하나 된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순수한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자신의 안(내면)과 밖에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자신의 정신적인 세계(나라)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의 시작과 끝을 통틀어 최고의 가치, 가장 우선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은 애초부터 자신과 항상 함께하고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면, 49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그 순수한 자아를 다시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구절로 해석이 된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는 어디서 왔느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 빛이 스스로 생겨나는 곳에서 왔노라. 빛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립하며,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도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그 빛이 너희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이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속에 계시다는 증표가 무엇이뇨?'라고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운동이요, 안식이로다.'"

 

해석 - 도마복음 3절에서 예수는 안식 또는 나라는 살아 있는 자신의 밖과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추가로 설명드리면 도올선생은 강의를 통하여 예수가 말한 "안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여 열반, 해탈, 불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와 같다."

빛은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물체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외면의 빛은 그 자체로 인간은 물론 인간이 접촉 가능한 모든 공간에서, 모든 물체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인간의 내면에서 항상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살아 있기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러므로 이것을 내면의 빛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빛은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그의 내면에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빛은 스스로 존재하고, 자립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에게 있어 빛은 곧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50절의 마지막줄에서 "아버지께서 너희 속에 계시다는 증표를 예수가 "운동과 안식""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운동=생명=내면의 빛=깨달음=안식(유여열반)

빛=아버지=하나님.



이상..       06편에서 계속~~

 


































좋아하는 회원 : 0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아스피린 ip1 2020-07-01 21:46:41
    아스피린이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혹은 바퀴벌레색퀴라 부르는 것은 돌통이가 대한민국과 북한에 특대형 재앙을 가져다주고 어마어마한 특대형 경력위조, 현대사 위조를 자행한 김일성과 그의 자손들을 칭송하고 빨아대면서 그놈들의 범죄에찬 역사와 경력들을 슬쩍 슬쩍 은근히 선전선동, 찬양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시각도 나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나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군복무시절에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이 돌통이 색퀴가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김일성과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기는 고사하고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돌통이의 행위는 그러지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이러한 연고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나의 댓글 내용 중에 네놈이 한 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정정당당히반박을 해봐라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미국판 안익태 ) 미국 애국가 작사자 동상, 시위대에 의해 끌려 내려 오다
다음글
북한 통일전선부 &ldquo;대남전단 계획대로 살포&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