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김일성에게 충성맹세 편지..평양 박물관에 전시되어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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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연구소 >에서 이경식 대표가 발표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1959년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전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재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당시 법원의 법률적용이 잘못됐고 유일한 증거인 관련자의 자백 또한 감금과 약물투여 등으로 인한 것으로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무죄판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과거사위원회’의 권고결정에 따른 정치적 판결일 뿐 형사소송법이 정한 재심사유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경식 자유언론수호포럼 대표는 7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4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과 조봉암’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조봉암 사건은 북한이 해방 후 남한 정국을 혼란에 빠트리려는 공작에 의한 명백한 간첩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조봉암의 해방전 행적부터 건국이후 활동 전반을 설명하면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은 물론 중국공산당과도 관계하면서 코민테른의 인준을 받은 골수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대표는 당시 재판이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연루된 간첩사건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공개 재판으로 열렸으며, 사건의 비중에 걸 맞는 쟁쟁한 변호인들과 검찰사이의 치열한 법리논쟁 속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봉암이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된 경위도 밝혔다.
이 대표는 “명백한 증거와 진술을 통해 밝혀진 간첩사건을 장기독재를 위한 정적 제거나 사법살인으로 보는 시각은 국가적 비극”이라며 “이제라도 조봉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iframe width="100%" height="100%" class="ip-engine" src="http://ds.interworksmedia.co.kr/RealMedia/ads/adstream_sx.ads/newdaily_www.newdaily.co.kr_NEWS_BA_300X250_CMTF/page@x04?_4231&_5701&_5702&_5843&_5865&_5866&_5868&_5869&_5877&_G28200"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 vspace="0" hspace="0"></iframe> 이 대표는 “조봉암 사건(양명산 간첩사건)은 휴전후에도 이어진 북한의 집요한 대남 공작중 하나로,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간첩사건”이라고 정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대통령후보에 대한 정치탄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실체적 진실규명에 커다란 장벽이 드리워져 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서 그는 대법원의 재심판결은 형사소송법 제422조가 정하고 있는 재심사유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 “공산당을 합법화해야 참다운 민주국가”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과거사위원회’ 권고결정에 따른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조봉암, 코민테른 인준 받은 골수 공산주의자…평양 애국열사릉에 묘 조성돼 있어
조봉암은 일본유학 시절 ‘흑도회’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1922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화해를 위한 ‘베르크후네우딘스크’회의에 국내 대의원으로 참석했으며, ‘동방근로자 대학’을 나와 코민테른에 관계했고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는 등 코민테른 인준을 받은 사람이다. 1~3차 조선공산당 결성 및 와해 과정에서 상해지도그룹을 이끌며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에도 관계한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해방 후 박헌영의 종파주의 극좌 노선을 비판하며 이극노와 ‘민족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했고,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좌익과 중간파들이 1948년 5?10총선거를 거부할 때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 대한민국 건국에 일조를 한 것이 사실이고,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그를 초대 내각의 농림부장관에 기용하고 여당인 대한국민당에 참여케 했다.
제2대 국회에서는 국회부의장에 올라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발췌개헌에 일조, 국가적 정치안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양명산에 연루돼 붉은 자금을 받아 쓴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당시 공안검사 조인구에게 “이 박사님께 죄송하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는 비화도 있다. 조봉암의 간첩행위는 항소심 재판 당시 그가 교도소 간수를 매수해 간첩 양명산에 보내려 했던 비밀통신문(사진)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봉암은 양명산에게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나와 우리 진보당 동지들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한다”며 혐의내용을 “결사적으로 부인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한편 조봉암 사후 북한은 그를 추모하면서 여운형 등 좌파 공산주의자를 기려 만든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를 조성해 놓았다. 당시 경제규모로 볼때 거금인 2만5천불 받아…명백한 간첩사건 당시 조봉암과 양명산 사이에 주고받은 2만5천불에 달하는 정치자금 수수에 대해서도, 이는 조봉암도 인정한 사실이라고 강조하며 이 사건의 핵심은 조봉암 씨가 양명산의 정체(북한 공작원)를 알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느냐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2만5천불은 당시 경제규모로 볼 때 엄청난 거액인데 조봉암이 김동호로 이름을 바꾼 양명산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서 거액의 정치헌금을 받아 썼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아니냐고 덧붙였다.
이승만 하야후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인보길 뉴데일리 사장은 인사말에서 "61년전 김일성이 일으킨 6.25 무력남침전쟁은 3년만에 끝났지만 남한전복 사상전쟁은 58년째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인사장은 "더구나 지난 10년간 친북정권 아래 '합법 투쟁을 통한 국가탈취 전쟁'은 최고조에 달했고, 특히 노무현이 '공산당이 합법화 되어야 진짜 민주국가'라고 말했던 기만 위장전술이 아무런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확산되어 각계의 공산화투쟁이 포퓰리즘 쓰나미라는 외투를 쓰고 우리를 덮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국민교육을 탈취한 전교조의 좌익 교과서를 방치하고 있고, 고엽제를 들고 나온 반미 쓰나미, 대학가를 휩쓰는 반값 등록금 쓰나미, 국가 공권력의 중추인 검찰 중수부를 무력화하기 위한 국회의 정치 쿠데타에 속수무책인 상태"라는 진단인 것이다. 인사장은 "이승만연구소의 6월 주제로 조봉암을 선택한 것은 조봉암이야말로 '합법투쟁을 통한 국가탈취범의 원조'이고, 인천광역시가 강화도 출생 조봉암을 '인천의 상징인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1959년 조봉암이 무죄로 풀려나고 이승만이 하야 후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조봉암의 진보당보다 더 조직적이고 막강한 '짝퉁 진보당'과 조봉암보다 더 막강한 '짝퉁 조봉암'들이 2012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 다음은 이날 포럼에서 이경식 대표가 밝힌 조봉암 사건의 전말을 요약한 것이다. 조봉암에 거액 준 양명산, 조선공산당 후보당원 출신…HID 군속으로 간첩활동 양명산의 본명은 양이섭으로 1906년 평안북도 강계출생으로 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다 3만5천원이라는 거액의 우편환을 훔쳐 중국으로 달아났다. 상해에서 조봉암, 남만춘, 조동우, 여운형 등 공산주의 진영의 주변을 맴돌며 조선공산당 후보당원이 됐다. 1931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신의주로 왔는데 1년 뒤 조봉암도 일본경찰에 체포돼 이곳으로 와 수감중이던 양명산과 만났다. 1년 남짓 함께 수감생활을 한 후 양명산이 먼저 출소하면서 헤어진다. 조봉암은 그 이후 전향해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여당 국회부의장 등 고위직을 지내며 입지가 달라지는데 조봉암이 김동호로 이름을 바꾼 양명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양명산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건국무역’이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했으며 1955년 HID 군속으로 북을 오고갈 때 북한측 접선 인물들이 위 회사의 직원들이었다. 이들이 또 다른 HID 군속 김동혁을 통해 양명산을 재접선하는 과정은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다.
조봉암, 김일성에 충성 맹세 편지...평양 '혁명박물관'에 전시중
조봉암 사건이 북한이 획책한 간첩사건이라는 사실은 1968년 적발된 통혁당 사건의 주요인물 중 한명인 김질락이 처형 직전 쓴 참회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지도원 : 중간 정당이란 남조선에서 합법적인 정당을 말하며 겉으로 보아서는 다른 어떤 정당과 다름이 없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 당원들에 의해 지도되고 운영되는 정당을 말한다. 이런 정당은 새로 만들 수도 있으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존 정당에 침투하여 이를 장악할 수도 있습니다. 중간 정당을 장악함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핵심 당원 서너 사람만 있으면 족합니다. 이런 핵심 당원은 가장 합법적 인물로 끝까지 위장하고 자신의 신분 노출을 말아야 합니다. “진보당의 조봉암 같은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독일 유학 중 북으로 갔다 탈북한 오길남 박사의 저서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시오’에는 오 박사가 북한 ‘조선 혁명박물관’에서 조봉암이 김일성에 보낸 충성맹세 서신이 진열돼 있는 것을 봤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박물관에는 조봉암을 비롯, 김종태 여운형 및 남로당등 남한 공산화 투쟁의 주역들 유품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봤을 때 북한이 제헌국회 당시 ‘국회 프락치사건’이나 ‘김구의 평양행 공작’을 사실이라고 시인한 것처럼 조봉암 사건에 대해서도 북한이 주도한 간첩사건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정보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참고자료 -『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남쪽 사람들』(원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에 나타는 조봉암의 종북 활동 남조선 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인 <진보당>의 출현과 그 활동
남조선 혁명가들은 진보당을 만들면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에 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방침을 구현해 나가기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쳐 싸워 나갈 굳은 충성의 맹세를 다졌다.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은 당을 만들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충성의 편지를 올렸다. 충성의 맹세를 다지며 적어나간 편지는 첫머리에서 지금 남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가 다 오물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하고, 이 위기를 타개하여 슬기로운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아 나가실 분은 오직 경애하는 장군님뿐이라고 했다. 갈라진 민족, 갈라진 국토를 하나로 이어 세계만방에 이름을 떨칠 민족 강국의 영도자로 조선을 빛내실 분은 남북 조선의 민중이 그처럼 열화 같이 우러르며 따르고 있는 김일성장군님이시라고 그는 목메어 아뢰었다. 그는 계속해서 민족의 운명을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조국통일 위업에 작으나마 이바지하려고 <진보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앞으로 장군님의 자주적 평화통일 방침에 따라 진보당의 투쟁 강령을 튼튼히 틀어쥐고 나갈 것이라는 자기의 굳은 결의를 담아 삼가 맹세를 올리었다. <진보당>은 위대한 수령님께 올린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당을 만들고 남조선 인민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진보당>은 인민들의 반미 반독재 투쟁을 발전시키고 특히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이고 그들을 투쟁으로 이끄는 사업을 줄기차게 벌였으며, 그 한 고리로서 청년학생들의 합법적 서클인 <여명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남조선 사회의 여명을 내다보고 투쟁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진보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밝히시고 우리 당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이 기어코 가 닿아야 할 목표>(진보당 강령)이며 반미 구국의 정당한 길임을 남조선 인민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주고 남조선에서 조국 통일의 기운을 더욱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진보당>의 적극적인 활동시기에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선진분자들에 의해 학생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키려는 비합법 조직들이 출현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안의 선진적 학생들은 1956년 6월 <신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진회>는 대학신문 <우리의 구상> 제6호(1957년 12월 9일)에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자!”고 주장한 글이 나가게 된 것을 계기로 수많은 간부들이 <적색논문 사건>에 몰려 괴뢰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나 비합법적 활동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신진회>는 혁명적인 책들을 돌려 읽으며 미제와 괴뢰정권의 반동적이며 반인민적 정책을 폭로하는 토론회를 수시로 조직하는 등으로 학생들 속에서 새로운 핵심을 키워내고 광범한 학생들에게 혁명적 영향을 주었다. 1957년에는 고려대학교에 <정치경제학회>가 조직되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문리과대학의 일부 학생들은 1957년 1월에 다른 비합법적 조직을 조직했고, 그해 9월에 이 조직을 <반파쇼 청년투쟁동맹>으로 개칭하고 혁명적인 사상과 이론을 탐구했으며, 그 후에는 실천투쟁으로 넘어가 반미 반독재 투쟁을 위한 삐라를 뿌리는 등 과감한 투쟁무대에 나섰다.(<북의 지령 따라 움직이는 남쪽 사람들>, 비봉출판사, 210-216쪽) 참고자료 - 조봉암의 옥중 '쪽지' 사건
“김사장 변소에서 보시오.
출처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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