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운동사). 05편.. 중공당 동만특별위와 한인당원 |
---|
05편.. 중공당 동만특별위와 한인당원 연변당부(延邊黨部)는 주로 간도지방의 한인당원을 관리하는 중공당 만주성위의 지방당 기관이었는데, 1930년 5월 30일 간도폭동이 발생했던 당년 8월 동만특별위원회(東滿特別委員會)로 개칭되었다. 중공당의 영도하에서만 한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주장의 등장과 더불어 중공당의 한인당원 조직과 훈련은 동만특별위원회의 결성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동만특별위는 만주에서의 한족밀집지대인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汪淸)·혼춘(琿春)·돈화(敦化)·액목(額穆)·화전(樺甸)·안도(安圖)·장백(長白)·무송(撫松)의 10개현을 소할(所轄)구역으로 했는데, 연길·화룡의 양현을 합하여 연화중심현위원회(延和中心縣委員會)를 조직하는 한편, 다른 각현에는 구역위(區域委)를 설치하고 이를 총괄하는 동시에 농민협회(5·30폭동 전의 농민회 개칭)·반제동맹·호제회(互濟會)·부녀회(婦女會)·구매회(購買會) 등의 대중단체를 영도했으며, 다시 무장단체로서 적위대(赤衛隊)와 유격대를 조직해 폭력투쟁 특히 무장투쟁을 맡게 했다. 당원조직에 병행하여 공청(共靑)조직과 혁명학생회 등도 조직했는데, 1930년 12월말 현재 당원 331명, 공청원 484명이며 농민협회를 비롯한 외곽조직원을 합하면 1만 6천여 명에 달했다. 이것을 인구비례로 보면 17대 1이 된다. 참고: 日帝間島總領事館局子街分館警察署(일제간도총령사관국자가분관경찰서, 『延和縣內ニ於ケル共?運動ノ實情及黨秘密文書譯文』(1931. 5),(연화현내어 공 운 동) (실정급당비밀문서역문) 번역 : ( 일제간도총영사관국자거리분관경찰서에서 《연화현내ニ于공산운동ノ실태 및 당비문서역문》) 중공당이 동만특위를 결성하고 간도지방의 한인당원을 종래의 조공당원이 아니라 중국혁명에 충성을 다하는 중공당원으로서의 성격개조를 하는 사업은 간도주민의 약 76%가 한족이고 이들 가운데 약 87%를 차지하는 농민사회의 구조가, 정치사상적으로 중공당의 좋은 공작대상이라는데 있다. 곧 간도의 한족농민은 거의 전부가 모국에서 더는 살 수가 없어서 남부여대하여 월경 이주한 적빈(赤貧)의 영세농민이며 그들의 생업은 중국인 지주의 봉건적 착취와 고리대 자본의 기생 및 관헌의 주구대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도지방의 한족농민은 민족적 계급적으로 중공당의 좋은 공작대상이었다. 중공당은 간도를 반제·반봉건투쟁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중심 지로 만들기 위해 한인당원을 중국혁명전선에 동원하는 본격적 준비에 착수했다. 이것은 1927년에 중공당만주성위원회가 수립되고, 1928년에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의 조공당 재건지령에 따른, 만주에서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해 구체화된 노선이다. 만주에서의 종래의 조공당원은 이제부터는 중국혁명에 충성을 다하는 중국당원으로 조선혁명을 지원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중공당의 공식적 문건이 무엇보다도 이 점을 확인해 준다. 곧 중공만주성위에서는 1930년 4월 9일 「재만농민투쟁강령」과 「재만조선족노동군중운동에 관한 결의초안」을 발표하였으며, 7월에 또 「재만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고하는 편지」를 발표하여 조선족 노동군중들은 오직 중국공산당의 영도밑에서 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여러민족노동군중들과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정부를 타도하며 지주·자본가들을 타도하고 지주의 토지를 빼앗고 소비에트정권을 세워야만 출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조선족 선진분자들에게 파벌투쟁 관념을 청산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각지의 당조직에서는 성위(省委)의 지시에 따라 투쟁을 통하여 조선족 선진분자들을 당에 받아들이어 농촌의 당조직을 발전시켰다. …… 1930년 봄부터 시작하여 조선족 인민들은 당 영도밑에 농민협회·반제동맹·반일회(反日會)·반일청년회·부녀회·호조회(互助會) 등 혁명적 군중 조직들을 재정돈하고, 여러 민족 인민들을 압박 착취하는 지주·고리대주·반동군벌·반동군경과 결탁하여 혁명적 군중을 체포하는 한족연합회를 반대하여 투쟁을 벌렸다. …… 조선족 선진분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농촌에서 당의 기층조직을 확대시킴으로써 동북당(東北黨;중공당 만주성위를 말하는 것임)의 사업 중심을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돌리기 위한 조직적 토대를 닦아 놓았다. 이 때로부터 조선족 인민들의 혁명투쟁은 당의 영도밑에 전국인민들과 함께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하며 우리나라의 민족민주혁명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참조.. 朝鮮族簡史編寫組編(조선족간사편사조편), 『朝鮮族簡史』(조선족간사)(延邊人民出版社(연변인민출판사), 1986年(년) 6月(월), 第(제)1版(판)), pp. 108~109. 번역 : 조선족간사편찬팀편(조선족간사연변인민출판사(연인민판사), 1986년(년) 6월(월), 제(제) 1판(판), pp. 108~109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공당은 조선족 선진분자(실질적으로 종래의 조공당원을 지칭하는 것임)들이 중공당에 가입하여, 중공당의 영도밑에서 중국혁명을 위해 노력할 것을 호소했고, 조선족 선진분자들이 중공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통해 충성을 보여주는 담보가 있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이 곧 중공당의 영도에 의해서만 조선의 민족적 해방이 가능하다는 시대의 등장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공당은 간도를 한족의 반일해방투쟁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우수한 한족출신의 유력 공작원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1930년 봄 소련 유학 중인 양림(楊林)을 소환하여, 중공당만주성위로 파견하였다. 그는 1901년에 평북에서 출생하여 중국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군관학교의 교도주임(敎導主任)과 광주(廣州)에서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 교관 및 동교 제3기 학생대장에 임명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해방과 중국혁명의 성공은 불가분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현단계에 있어서는 오로지 중국대혁명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역량을 축적할 수가 있으며 자기 자신을 더욱 잘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 中共黨黑龍江省社會科學院(중공당흑룡강성사회과학원) 地方黨史硏究所(지방당사연구소) 東北烈士紀念館編,(동북렬사기념관편) 『東北抗日烈士傳』(동북항일렬사전) (哈爾濱:(합이비:黑龍江人民出版社(흑룡강인민출판사),1980), p. 21. 번역 : 중국공산당 흑룡강성사회과학원(중공당 흑룡강성사회 과정학원) 지방당사연구소(지방당 사연구소) 동북열사기념관편(동북렬사기념관편) 『동북항일열사전』(동북항일렬사전) (하얼빈: 허베이: 헤이룽장인민출판사(흑룡강민판사), p. 21. ?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