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편.. 1927년 4월부터는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하여 두계열이 공식적인 회의를 하였고 협의를 진행하였다. 1929년까지는 민족운동의 두 계열이 대립한 측면보다는 서로 협력하고 경쟁한 측면이 더 많았다. 민족유일당 건설이 실패한 것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계열의 이념적 차이에 기인하기 보다는 조선연장주의라는 문제를 두고 민족유일당결성운동 촉성회 계열과 협의회 계열간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있다. 그런데 1929년 4월 1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중심으로 결집해있던 협의파가 국민부를 결성하는데 국민부는 정의부를 기반으로 하고 참의부와 신민부내의 견실한 민족주의자들을 통합하 였다. 국민부는 본부를 흥경현에 두고 주로 통화, 흥경(신빈), 환인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국민부는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계열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1929년 10월 남만참변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으로서 국민부의 군인들이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간부 6명을 죽인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사회주의계열은 1930년 1월 김좌진을 암살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은 완전히 적대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국민부 좌파는 국민부에서 이탈하여 프로레타리아 동맹, 제국주의 타도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계열에 본격 합류하게 된다.
동북지구 민족주의계열은 점차 소멸되었는데, 북만지구에서는 1933년 가을, 남만지구에서는 1937년 가을이면 거의 해산된다. 일부는 동북항일연군 양정우 부대에 합류하고, 일부는 국민부의 참고..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pp. 293~297. 황용국외, 조선족혁명투쟁사, p. 118.
조선혁명군 부대의 깃발을 계속한다.
다. 사회주의계열 한인의 중공당 입당의 배경
1929, 30년 시기는 한인사회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일제하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재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인사회주의자가 중공당에 입당하게 된 배경은 한인사회주의계열의 내적인 요인과 중공당의 정책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적인 요인으로는 조선인 공산주의단체들은 민족주의 계열 단체와의 적대적 관계, 공산주의 단체내의 다양한 분파와 노선이 갈등하여 사분오열의 상태에 빠졌고 유혈사태를 빚기까지 하였다. 1928년 12월 7일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은 ‘조선공산당 당내 정세에 관한 코민테른집행위원회 결의’를 통하여 조선공산당이 극히 치열한 당내 파벌투쟁에 빠졌기 때문에 만주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을 취소하고 재건을 지령하였다(12월 테제). 그리고 1930년 3월 20일,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체 선언하고 중국공산당에 흡수되도록 지시하였다.
‘1국1당’ 원칙을 준수하며,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강력하게 처벌 하는 특별결정을 내렸다.
둘째, 중공당이 한인을 중공당에 가입시킨 중요한 이유가 있다.
1929년 4월 현재 만주성위에는 당원이 254명뿐이고 그들 가운데 57명만이 농민출신이고 나머지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참조.. 최홍빈 연변대 교수 인터뷰, (2004년 2월).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p. 298~299.
노동 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활동의 비중을 옮기려는 만주성위로서는 한인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인사회주의 운동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공당이 한인 농민들을 중공당에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에서 조선공산당을 해산하고 중공당에 가입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중국공산당 만주성위가 한인들을 중공당에 가입 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붉은 5월투쟁’을 조직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황용국 외는 “중공만주성위가 1930년 4월 24일 ‘5·1투쟁행동위원회’를 설립하고 한인농민들을 선동하여 적극적으로 중국인 지주를 공격하여 봉기를 일으킨 ‘붉은 5월투쟁’에 참여시킴으로써 투쟁의 시련을 거쳐 그들을 공산당과 공청단조직에 가입시키고자 하였다”46는 것이다. 이후 1929년~1930년 사이에 한인 사회주의운동의 최대 쟁점은 중국공산당 입당문제였다. 파벌별로 논의와 갈등은 있었지만 결국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화요파, 엠엘파 등은 만주에 있는 조선공산당인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야 하며 중국혁명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만주에서의 조선혁명운동은 반드시 중국혁명운동의 한 부분으로 되어야 하며 재만조선공산당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직접 중국혁명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며 조선혁명운동을 원조해야 한다는 협의를 하게 되었다.
한인사회주의자의 중국공산당 입당은 이전까지의 조선연장주의의 포기?폐기를 의미한다. 조선연장주의란 만주와
참고.. 황용국외, 조선족혁명투쟁사, p. 154. 국내의 차별 적인 조건에 주목하지 않고 만주지역이 국내의 연장에 불과하다 는 관점에서 만주지역을 국내의 특종지대로 간주한 입장을 말한다. 조선연장주의를 포기한 배경의 하나는 이제까지 사회주의운동은 항일운동에만 집중하고 한인이 처한 객관적인 현실을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의 결과였다. 조선 소작농은 한족지주의 착취를 받고 일제의 착취를 받는 이중의 착취하에 있었다. 동북에 조선인이 60만 뿐인데 이것만으로 중국 봉건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없으므로 만주의 4,000만 중국인과 연합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하였다. 중국 봉건주의를 타도하려면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야하며, 중국에 사는 이상 우리는 소수민족으로서, 반봉건 반제 연합을 추진해야 했다.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관계에서 볼 때 만주는 조선이 아니고 중국인데 중국에서 조선혁명만 할 수 있나, 중국혁명에 우선 참가해야 한다, 중국혁명 승리로 조선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중국 공산당은 마땅히 조선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둘째, 싸움의 대상이 달랐다. 즉 국내의 항일운동은 일제와 친일세력만을 대상으로 하면 되었지만, 만주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은 중국의 지주와 봉건관료까지도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조선연장주의는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셋째, 한인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을 취소하고 1국1당 원칙을 준수하며 조선공산당을 새롭게 재건하라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의 지시를 실천하였다. 넷째, 재만 한인 사회주의자는 중국혁명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참조..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20~1945, p. 19.
1930년 ‘붉은 5월투쟁’은 한인사회주의운동 계열에게는 전통적인 활동기조였던 조선연장주의를 폐기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고, 중공당의 입장에서는 5월투쟁은 한인사회주의자를 대규모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중공당 내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라. 한인의 중공당 입당의 결과 조선족의 중국공산당 가입으로 중국공산당 동북당조직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첫째, 조선민족공산주의자들은 당건립 사업을 주로 조선족 집거지인 농촌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도시에 중점을 둔 중국공산당은 항일무장대오의 농촌유격근거지 마련에 획기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둘째, 동북당조직은 심양, 대련, 장춘, 할빈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현위 및 그 이하의 기층조직은 최초에는 대부분 조선민족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그러므로 각지의 지부, 특별지부, 구위, 현위와 중심현위의 제1서기는 대부분이 조선족이었고 남만, 동만, 북만 특위와 만주성위의 주요 성원들 속에도 조선족이 있었다. 1931년의 3월의 통계를 보면 동 만지구의 농촌당원 636명중 조선족이 618명이고, 남만지구의 농촌당원 200명중 조선족이 193명이었다. 1930년 11월, 마침내 만주성위는 한인들의 중공당가입이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였다. 한인이 중공당에 가입한 결과 나타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참조..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p. 262.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p. 198~199. 51~42 이상.. 0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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