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당시 미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한국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한국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한국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1949년 11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 ‘노랜드’가 이승만이 차린 초대연에서 이렇게 발언 하였다.
『나는 한국에 와서 반공태세가 정립된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특히 국군이 잘 정비되고 훈련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이 군대를 가지고 북진 통일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증가하여 북진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전쟁인 만큼 만일을 생각해서 새로 50만~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준군사적 조직에 망라하고 더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1950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북진은 하루라도 속히 하는 것이 유리한데 와서 보니 국군의 준비를 좀 더 빨리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더 준비하여 개전하면 국군의 승리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여 미군이 원조 또는 직접 참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949년 10월에 있은 국군사단장회의에서 주한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트는『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금후에도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세를 악화시켜 전쟁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이다,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 여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중앙일보≫1989년6월23일
북한은 무려 천 회 공격에도 남침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발발을 위해서는 남한군이 중화기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 괴뢰를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개시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였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군입니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적이 쳐들어 온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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