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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독립운동이여.!! 1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1 2020-08-30 16:41:22
***  항일빨치산 트로이카(김일성, 최용건, 김책)의 첫 만남

 

김일성부대가 토벌대에 치욕을 안겨주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제1방면군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1940년 3월 24일 3사 정치부 주임 유만희(조선인)가 13명의 부하와 함께 활동하던 중 배반 기회를 노리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4월 8일에는 제1방면군 총지휘관 차오야판이 10여명의 부하와 함께 숙영하던 중 농민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제1방면군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한편, 첸한쟝의 제3방면군은 고전하면서도 살아 있었다. 총지휘 첸한쟝의 부대는 돈화 방면에서 활동하던 중, 1940년 봄 우심정자에서 일만군의 대부대에 포위되어 70명을 잃고 자신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용운의 제15단도 많은 대원을 잃었으나 참모장 박득범 부대와 13단장 최현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왕청현 라자구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정치위원 안길이 이끄는 제14단이 액목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방면군이 완전히 붕괴되고 제3방면군도 가까스로 지탱하는 동안에도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마에다부대를 섬멸하는 등 여전히 그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2방면군의 위용도 오래가지 못했다. 김일성부대에도 위기가 찾아왔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이었다. 홍기하 전투에서 부상당해 치료중이던 정치부주임 뤼바이치가 밀고로 1940년 6월 29일 안도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제2방면군 내부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던 임수산의 귀순과 류바이치의 체포로 김일성부대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기 힘든 위기 상황이 닥쳐왔다. 


▲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을 ‘토벌’하러 나선 만주국 ‘토벌대’(1939년)(사진=길림신문)

1940년 8월 10일 돈화현과 안도현의 경계를 따라 뻗어내린 할바령의 끝부분 소할바령에서 열린 유격대 간부회의에서 “귀중한 혁명역량을 보존육성하기 위해 대부대활동을 중지하고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은 대부대 활동을 중지하고 소부대로 분산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관동군 헌병대는 제2방면군의 실세에 대해 6월에는 200명, 7월 200명, 8월 160명, 9월 120명으로 보았고, 8월에는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다”라고 했으며, 9월에는 “몇 개 단으로 분산하여 잠복”했다고 파악하였다.

 

김일성은 원래 소부대로 전환하여 겨울을 밀영에서 지낼 계획이었지만 주위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조건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소련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부대의 소련 이동은 1로군 지도부가 괴멸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2방면군장이었던 김일성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다. 김일성부대도 이동이 늦었다면 훨씬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적절한 결단으로 빠른 시기에 소련으로 이동함으로써 많은 병사를 보존할 수 있었다.

 

북한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항일무장투쟁에는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고, 그들 중 다수는 만주 땅에서 피를 뿌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항일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살아서 북한 땅에 돌아온 인물들은 소수였지만 그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해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 중에서 김일성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최용건(崔庸健, 1900?1976)과 김책(金策, 1903?1951)이다. 이 두 사람은 경력이나 활동 면에서 김일성에 뒤지지 않았고, 북한 정권에서도 김일성 다음 지위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은 항일빨치산의 트로이카라 할 수 있다


1900년생인 최용건(일명 崔石泉)은 조선공산당 화요파(마르크스의 태어난 날이 화요일이라 생긴 조직)출신의 고참 중국공산당원으로 광동코뮌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파견되어 소련과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북만주 요하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이학복, 김진우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제7군의 기초를 만들었다. 민생단과 같은 노골적인 민족 박해는 없었지만 한족 출신 간부들의 계속되는 견제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던 최용건은 운남 강무당 동기였던 저우바오중에게 도움을 청했고,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도움으로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7군을 떠나 제2로군 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0년 말경 소련으로 넘어간 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일명 ‘88독립저격여단’)가 결성될 때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책이었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당시 초대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내각부총리를 거쳐 1958년부터 1972년까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으로 국가수반이 국가주석으로 바뀌면서 부주석이 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지켰다.

 

최용건보다 세 살이 적고 김일성보다 아홉 살이 많은 김책(본명 金洪啓)은 조선공산당 화요계 출신으로 1927년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9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출옥 후 북만주 주하(지금의 상지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제3군에서 활동했는데, 자오상즈(趙尙志), 리자오린(李兆麟, 일명 張壽錢), 펑증윈(馮仲雲) 등의 중국인 지도자와 이계동, 이복림, 허형식, 박길송 등의 조선인 간부들이 그의 동지들이었다. 김책은 유격대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 당 서기 등 정치사상 및 조직 지도간부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3로군 내에서 자오상즈가 코민테른 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하면서 리자오린(이조린) 등과 갈등하는 등 내분이 발생했을 때에도 북만성위 서기로서 “공정하고 신중한 사리판단과 처신”을 해 중국공산당 내에서 높은 신망을 얻었다. 구국군과의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고 제4군을 창설하여 길동지역과 북만지역 항일유격대 활동의 기초를 닦았던 고참 공산당원 리옌루(李延錄)는 김책과 연합작전을 자주 치르며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선인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 북만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인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인터넷 자료)


김책에 대해서 이처럼 후한 평가를 했지만 리옌루는 최용건에 대해서는 회고록에서 단 한번만 언급할 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최용건이 조직한 요하반일유격대가 리옌루의 4군에 한 개 단으로 편입되어 활동하다가 후에 독립한 7군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용건, 이학복 등 조선인 간부들과 갈등이 있었다. 1895년생이었던 리옌루는 자신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자오상즈를 3군 군장에 추대하고 3로군 자신은 4군을 창설해 이끌면서 제3로군 총지휘에도 자오상즈를 밀었을 정도로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조선인공산주의자의 한국 독립투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고, 이는 결국 자신의 4군에서 활동하던 최용건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런 리옌루가 김책을 높게 평가한 것은 김책이 사업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이나 처신에서도 매우 훌륭했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북만지역 역사기행 때 상지시(옛 주하로 김책의 초기 활동 무대였던 곳)에서 만난 향토사학자도 김책의 활동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한 바 있었다.

 
김책은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당·정·군의 모든 분야에 두루 관여하면서 김일성을 보좌하였고 최용건과 함께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때문에 김책에 대해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성격이나 역할이 비슷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김책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초대 산업상과 부수상을 지냈으며 6.25 전쟁에서 전선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51년 병사해 역사의 장에서 일찍 퇴장했다. 

 

항일무장투쟁의 트로이카라 할 김일성, 김책, 최용건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이동한 뒤 1941년 1월 2차 하바롭스크회의에서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바롭스크 야영에서 만났을 때 최용건은 “지난날의 생활에서 자기를 제일 괴롭힌 것이 고독감이었다”면서 “고독감이 심할 때면 백두산에서 싸우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에 의하면, 길동 북부에서 싸우던 최용건은 김일성에게 네 차례나 연락원을 보내 만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서 실패했고, 김책도 1930년대부터 김일성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김일성도 이들을 만나기 위해 북만지역까지 갔었지만(2차 북만원정) 못 만났다. 

 

동북지역 각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서로의 활동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함께 만나 조선의 해방과 혁명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으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들이 하바롭스크에서 비로소 만났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이다. 성공회대학교의 김명호 교수는 “김책과 최용건은 동북시절 같은 항일연군이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김일성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소련에서 김일성을 만나자 문중의 종손처럼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 탁견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썼다. 이들의 관계와 만남에 대한 매우 감각적인 표현인 셈이다. 

 

  1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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