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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처형의 진실..0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0 2020-09-06 05:00:57
 ☆  북한 숙청정치


 


세상에 유일한 현대판 노예상속왕국인 북한의 3대세습은 숙청정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김일성을 잔인한 통치자, 인민독재자로 전 세계가 비난하는 것은 그가 해방 이후 권력유지를 위해 정적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북한의 숙청정치를 오늘부터 써 올리겠다.


 


 ■  소련군 대위 김일성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은 구소련의 극동군 88저격여단 군인으로 입대하여 해방을 맞았다. 당시 김일성의 계급은 소련군 대위에 불과했다.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한 소련군 플로토니카스 대령과 메클레오 중령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일성은 정치인보다 군인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은 북한을 친소국가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길들인 소련군 대위출신 김일성을 저들의 앞잡이로 내세웠던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에 떠밀려 북한의 지도자로 되면서 처음 배운 것이 소련공산당 내에 존재했던 정치철학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일 것이다.” 이것이 소련공산당 지도부에서의 정치철학, 한마디로 공산당식 숙청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스탈린의 숙청정치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지도부 간부들을 외국 간첩딱지를 붙여 학살한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스탈린은 1934년 측근인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을 계기로 이른바 공산당 내 ‘불순분자’에 대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1938년 말까지 숙청된 1,200만명 중 처형된 사람은 100여만 명이며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000여만 명에 달한다.

 


스탈린의 숙청정치를 그대로 답습한 김일성도 고위간부들에 대한 공산당식 숙청을 무자비하게 강행했다. 정치권력의 경쟁자들을 온갖 죄목을 씌워 처형하는 것이 공산독재자들이 해온 상투적인 권력유지 수법이다.


 


  ■  김일성과 박헌영


 


박헌영은 누구?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해방 후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생긴 당이다. 초기 조선로동당의 지도부에는 10명의 정치위원이 있었다. 이 10명의 정치위원 중에 자기의 수명까지 살다가 죽은 사람은 김일성을 제외하면 1951년 67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은 허헌 뿐이다.

 


박헌영, 허가이, 박일우, 박정애, 이승엽 등 8명은 숙청되어 죽거나 전쟁 때 목숨을 잃었다. 숙청된 정치위원들 중에서 박헌영은 당시 김일성의 권력유지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김일성보다 나이도 12살이나 많은데다가 더 오랜 공산주의 운동경력을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뛰어난 조직적 수완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김일성에게는 가장 큰 정치적 적수였다.


 


박헌영은 1900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쌀 장사꾼인 박현주와 소실인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헌영은 김일성이 8살도 안되던 1919년에 서울에서 가장 이름이 나있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899년 4월에 설립되어 1900년 10월에 개교를 시작한 경성고등보통학교는 남북한 통틀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긴 정규 중등교육기관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상해에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나서 그해 4월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국내에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고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만기석방된 이후에 신문기자로 활동하였고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창당 7개월 만인 1925년 11월 30일에 또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우리나라에 공산당이라는 명칭의 정치조직이 처음 창당된 것은 1925년 4월 17일이다. 이날 서울의 유명 음식점이었던 아서원에 모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생겨났던 것이다. 당시 참석자들로는 김재봉, 조동호, 김찬, 조봉암, 김약수 등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서울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발기모임이 열렸고 의장으로는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박헌영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처참했던 시기가 당시 감옥에서 그가 정신병자 행세를 했던 비화다. 그는 감옥 안에서 미친 척하려고 똥을 먹기도 하였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란을 피우자 일본경찰은 그가 정말 정신병자가 된 줄 알고 석방시켰다. 수감된지 2년이 되어오던 1927년 11월에 미치광이로 행세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부인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1928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국인(조선)학교에서 교원(교사)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박헌영은 29살나던 1929년 6월에 모스크바에 소련공산당이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치교육과정으로 개설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교육받은 후 1933년 1월에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티』를 제작하여 국내에 배부하려다가 그해 7월에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어 6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1939년에 대구형무소에서 만기로 석방되었지만 결국 그는 3번에 걸친 9년 반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7개월 옥살이를 한 것에 비해도 길고 긴 감옥살이었다.


 


김일성의 길림감옥 옥살이는 18살의 어린 김일성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선전물들을 살포하다가 잡혔던 것에 불과하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공산주의 청년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옥살이를 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철없는 장난처럼 남을 따라다니던 시절에 박헌영은 소련에 가서 체계적인 공산주의 교육도 받고 국내 공산주의 조직을 설립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인 것이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일제경찰의 요시찰대상이 된 그는 해방되기 전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의 한 벽돌공장에 피신하여 일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박헌영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4일이 지난 8월 19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서울에 올라오니 이미 일명 장안파공산당이라고 일컫는 공산당조직이 창당되어 있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일본 히로히토천황이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항복을 선언하자 그날 저녁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장안빌딩에서 설립된 해방 후 처음 등장한 첫 공산당조직이다. 그들은 1945년 8월 16일에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이영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그리고 제2비서로 이승엽이 선출되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장안빌딩에서 창당되었다고 하여 ‘장안당’이라고도 불렸고 8월 15일에 창당되었다고 하여 ‘15일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안파공산당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출신인 책임비서 이영 등 대부분의 당원들과 간부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전향을 하였거나 공산당활동을 중단했던 인물들이었다.

 


박헌영은 서울에 상경하여 일제시기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공산당 이념을 고수하였던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박헌영은 당시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을 방문하여 부영사 샤브신을 만나 소련공산당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스스로 해산되었고 남한에서는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되었다.


 


다음 회에는 박헌영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게 된 계기와 김일성이 자기의 가장 큰 정치권력적 적수였던 그를 어떻게 처형하게 되었는지에 소개하도록 한다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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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스피린 ip1 2020-10-11 22:03:46
    아스피린이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혹은 바퀴벌레색퀴라 부르는 것은

    돌통이가 대한민국과 북한에 특대형 재앙을 가져다주고

    어마어마한 특대형 경력위조, 현대사 위조를 자행한 김일성과 그의 자손들을

    칭송하고 빨아대면서 그놈들의 범죄에찬 역사와 경력들을 슬쩍 슬쩍 은근히

    선전선동, 찬양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시각도 나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나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군복무시절에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이

    돌통이 색퀴가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김일성과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기는 고사하고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돌통이의 행위는 그러지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그리고 이 쓰레기 색퀴는 그 목적은 알수 없으나 간첩들도 들여다보는

    공개적인 이 창에다 주민번호를 올리라고 탈북자들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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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통이 쓰레기 색퀴는 이 창에서 지놈 주제가 동국대 대학원생 이라고 지놈 아가리로 지꺼렸다

    근데 대학원생이란 색퀴가 얼마나 무식한지 댓글하나 지어내질 못해서 탈북자 쌜러리맨

    아스피린의 댓글을 카피 위조하여 본인의 댓글인양 버젓이 뻔뻔스럽게 올린다

    대한민국 대학원생 중에 댓글문장도 제대로 못만드는 대학원생도 있는가?

    혹시 돌통이가 다닌다는 그 대학원은 바로 공자대학 대학원인가?........

    대가리가 댓글 하나도 제 대가리로는 지어낼수 없는 아메바 대가리 주제에 ............

    그 수준 그 정도에 누굴 가르친다고 매일 같이 김씨찬양 종북 선전선동의 글들을 퍼다가 싸지른다

    돌통이색퀴는 그런 주제임에도 창피나 부끄러움을 절대 모르는 미개한 하등 생명체이다

    그래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종북 바퀴벌레,혹은 종북 오물 쓰레기라 부른다

    이러한 연고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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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통이색퀴야 이중에 네놈이 한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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