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에대한 ‘잘못된 상식’ 산더미…합리성ㆍ추진력 갖춘 용의주도한 인물 ‘황태자’‘조울증 환자’‘방탕아’‘살부 의식을 지닌 인격 파탄자’…. 1994년 7월 북한 체제를 50년 가까이 통치한 김일성 주석이 죽은 직후 국내 언론은 너나없이 대를 이어 북한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김정일을 이렇게 부르며 북한 체제 조기 붕괴를 점치는 기사를 쏟아냈다.
김정일을 매도하는 데는 항간에 나도는 단편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풍설은 물론 이른바 전문가로 불리는 의학자들의 정신 분석이 동원되기도 했다. 실제로 한 정신분석학자는 그를 모성 결핍증?열등 의식?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정신 병자라고 묘사하며 종국에 가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거나, 지도력을 잃고 몰락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침을 도발할지 모른다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오늘날 그릇된 분석에 기초한 이같은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시나리오였음이 드러났다. 오히려 김정일은 북한에서 ‘위대한 영도자’로 떠받들리며 아버지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상대자로서 우리 앞에 다시 등장하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었다. 속내야 어떻든 정상회담 재개를 먼저 제의한 쪽은 우리이다. 그것도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위험천만한 인물’이었던 김정일을 상대자로 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아버지가 죽고 권자에 않은채 그토록 고치지 못할 것으로 보이던 정신병을 말끔히 치료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과거들 정부는 애초부터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 아니면 되어서는 안될 김정일을 상대로 민족의 운명을 건 전대미문의 도박을 감행하고 있는 것인가.
대답은 자명해진다. 우리는 김정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거나, 아니면 그나마 바르게 알고 있던 일부 사실마저 외면해 왔다. 사실을 외면한 이유가 국익과 안보?민주주의 수호를 빙자한 맹목적인 대결 의식의 소산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정일이 몇 년간 ‘3년상’ ‘유훈 통치’를 내세워 명실상부한 북쪽의 영도자로 자리잡기 위해 시간을 버는 동안, 남쪽은 내용도 실속도 없는 ‘김정일 때리기’를 하느라 아까운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은 막상 정상회담이 결정된 뒤 허둥거리는 정부 당국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정상회담 준비 실무자들에게는 자료 수집 비상이 걸렸다. 눈길을 끄는 점은 실무자들이 비디오?사진?녹음 테이프 등 김정일 동정과 관련된 시청각 자료를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보 당국을 비롯한 정부 자료실에 김정일에 관한 한 ‘뜬구름 잡는’ 문건만 있을 뿐, 대화 상대의 면모를 파악하는 데 요긴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료가 그만큼 부족함을 뜻한다.
개인의 성격ㆍ인품ㆍ능력ㆍ사생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김정일은 ‘사실과 다르게’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왔다. 그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술잔치를 벌인다든가, 그 때마다 ‘기쁨조’가 동원되어 농탕질을 친다든가, 그의 인품이 포악무도하고 안하무인이라든가 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매우 오래된 ‘상식’이었다. 1996년 세계적인 오보로 판명 난 ‘성혜림 사건’이 터졌을 때 그릇된 상식에 기초한 남쪽의 김정일 때리기는 절정에 올랐다.
남쪽에서 잘못된 상식이 자리잡는 동안 북쪽에서는 ‘거대한 허구’가 확대 재생산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난’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천재성을 보였다든가, 실제로는 침체와 저발전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의 사업을 ‘위대한 업적’으로 치켜세운 일들이 대표적인 예다. 사실 이는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진 세습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부질없는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대인 기피ㆍ문란한 생활’ 근거 희박
‘성미가 급하고 고집이 세기는 하지만 나름으로 합리성을 갖춘 인물.’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김정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거나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김정일에 대해 일치된 평가를 내놓는다.
조선족으로서 북한에 수시로 드나들며 김정일과 만난 적이 있는 김서명씨는 김일성이 사망할 당시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그의 말투는 매우 빠르고, 높고, 단호하다. 분명히 충동적이고 격정적이다. 하지만 그가 일을 처리한 결과를 보고 (나는) 풍모나 말투와 달리 그가 합리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판단했다.”(〈시사저널〉 제248호 참조). 역시 북한을 수 차례 방문해 김일성 부자를 만났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서대숙 소장(하와이 대학 석좌 교수)도 그 무렵 한 일간지와 가진 기자 회견에서 김정일이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난폭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은 적이 있다.
최근 나온 새 자료들은 김정일의 됨됨이에 대해 김일성 사망 당시로서는 ‘상식에 어긋났던’ 증언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자료로는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토지)이다.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로서 197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김정일 측근으로 활동한 신경완씨(제3국 망명후 사망)의 증언을 기록한 이 책은, 출생 비밀과 성장 과정?사생활?지도력?후계 체제 수립 과정 등 김정일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자료 중에서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증언자가 남쪽에서 떠도는 김정일 관련 통설을 구체적인 반증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남쪽에서 김정일은 대중 연설에 서투르고 대인 기피증이 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는 김정일이 북한의 1인자인 김일성 주석을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를 삼간 데에서 비롯된 오해라는 것이다.
또 성혜림 사건 이후 회자되었던 소문과 달리 사생활이 문란하지 않다고 이 책은 증언하고 있다. 문란한 사생활 어쩌고 하는 때는 1970년대 초반인데, 당시는 북한의 빨치산 원로들이 후계자 선정을 앞두고 김정일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때여서 결코 바람을 피우거나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에 대한 오해는 비단 그의 신변에 관련된 사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특히 결정적인 것은 그의 지도력, 또는 국가 운영 능력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다. 사실 당시~그때만해도 일반인은 김정일이 김일성 사후 북한 정권을 물려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주로 국내 언론의 잘못된 보도 관행에 따른 착각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한=김일성’이라는 등식에 따라 일반인의 관심을 지나치게 김일성에게만 집중시켜 왔던 것이다. 김일성이 살아 있는 동안 김정일은 늘 ‘후계자 수업’만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미 30년 전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또는 ‘당 중앙’으로서 북한 사회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온 2인자였다. 김일성에서 김정일에게 권력 승계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는 김정일이 조선노동당의 핵심 부서로 진출한 1973년께이다. 북한은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를 통해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게로 권력을 승계하는 대강을 마무리했다.
구체적으로 김정일은 제6차 당대회를 통해 당 중앙위원회 서열 4위, 당 비서국 서열 2위, 당 정치국 서열 4위,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 자리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이 때부터 이미 김정일은 김일성을 빼놓고는 조선노동당 창건 이래 가장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김정일이 이처럼 빠르게 북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절대 권력자였던 아버지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권부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를 극복하고 아버지와 빨치산 원로들의 신뢰를 이끌어내어 순조롭게 ‘차려진 밥상’을 받은 것 또한 김정일의 능력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정일은 문화ㆍ예술 분야에서부터 권력으로 진입했다. 김정일이 <꽃 파는 처녀>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을 제작해 아버지와 빨치산 원로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때는 1970~1972년이었는데, 이 때 그는 이미 아버지를 도와 ‘갑산파 숙청’을 주도한 뒤였다.
북한 내부에서 마지막 권력 투쟁으로 기록되는 갑산파 숙청 작업은 1967년께 벌어졌는데, 이 일에 뛰어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이미 청년기부터 김정일은 중앙 권력 무대에서 권력 투쟁 요령과 생존 기술을 ‘학습’한 역전의 노장이기도 한 셈이다.검열ㆍ총화 방식으로 권력 확대
주어진 조건을 기회로 활용할 줄 아는 김정일의 재능은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발휘되었다. 아버지의 양해 아래, 그가 하나씩 둘씩 권력을 장악해 가는 데 동원한 수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열이나 총화(자아 비판)라는 제도적 형식을 지렛대로 하여 측근 또는 부하들을 실제로 자기 손아귀에 넣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찍이 김일성에 의해 고안된 ‘유일 체계’ 이론을 다듬고 확충해 권력 승계와 확대를 정당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수령,당,대중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스스로 개발해 체제 유지의 논리로 밀어붙였고,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 유격대 식으로’라는 김일성의 구호를 재가공해 대중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권력 장악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김정일을 위기에 빠진 북한 체제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당사자로 볼 때,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용의주도한 면모는 김일성 사후에도 엿볼 수 있다. 그는 김일성 사후 3년을 ‘3년상 기간’으로 선포한 뒤 대외적인 자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제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사이 김정일이 한 일은 3년상을 마친 때인 1997년 9월 인민군 정치부장이던 조명록의 입을 통해 전모가 확인되었다. 김정일은 1995년 1월 이후 33개월간 모두 2천1백50 곳의 군부대에 ‘현장 지도’를 다녔다. 결국 김정일은 겉으로는 3년상을 선포해 시간을 번 뒤, 안으로는 하루가 멀다고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권력 기반 공고화의 최대 관건인 군부 도닥거리기에 온힘을 쏟았던 것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이종석 박사(세종연구소)는 펴낸 〈현대 북한의 이해〉(개정판.역사비평사)에서 북한 권력 구조의 안정성을 들어 김정일의 조직 관리 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강조했다. 예컨대 김정일이 실권을 휘두르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북한 권력 구조에서는 정책 부진에 따른 부분적 경질 외에는 큰 변동이 발견되지 않아 왔다는 것이다.
김정일, 또는 그가 이끄는 북한이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관측자에 따라 의견이 달랐다. 하지만 1998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서 일본의 북한 전문가 와다 하루키 교수(도쿄 대학)가 제시한 ‘극장 국가론’은 김정일의 북한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전망을 내놓았다.
와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북한은 클리포드 기어츠가 제기한 극장 국가, 그 중에서도 북한 인민을 항일 유격대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유격대 국가의 전형이었다. 김정일은 이같은 유격대 국가에서 김일성의 지원 아래 스스로 각본을 짜고 무대 연출을 지휘한 총감독이었다.
김일성이 사망해 물려받게 된 유격대 국가를, 김정일은 과연 어떻게 권력을 유지 했나?. 와다 교수는 또 하나의 연극이 막이 올랐었다고 말한다. 김정일은 이미 ‘군대가 곧 인민이며, 국가이며, 당’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정규군 국가’라는 또 다른 극장 국가의 총연출자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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