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소련지역으로 넘어간후 동북항일연군이 중국공산당과 소련군 중 어느쪽의 지휘를 받았는지 불분명했다.
본사 현대사연구소가 30~40년대 초반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과 김일성의 행적을 밝혀주는 중국측 자료를 발굴함으로써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들은 동북항일연군과 김일성의 소련땅에서의 행 적과 관련해 그동안 논란이 되던 쟁점을 상당부분 해소해줄 것으로 보인다.
*** 일본군 토벌 강화되자 승인없이 행동
3천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41년 3월12일 저우바오중(주보중)(항일연군 2로군 총지휘)이 웨이정민(魏拯民. 항일연군 1로군 정치위원)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는 김일성이 소만(蘇滿) 국경을 사전 승인없이 넘은 것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 어떤 곤란과 원인이 있든 김일성.이준산(伊俊山) 두 동지 소속 부대원들이 소련 국경을 넘은 것은 오류다. 이 오류가 비록 전반적 혁명 입장이 동요되었거나 총적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제1로군 총부대를 이탈하고 유격대가 투쟁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을 포기한 것이다.
또 전반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곤란을 극복할 방법을 더 많이 생각지 않고 기회주의적 성격인 월경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그 부하들 및 당간부들이 각성하고 그 오류를 비록 승인하기는 했지만 기율상에서 김일성 동지 등에게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적당한 처분을 주기 바란다.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 甲61券(권), 107쪽)』 1940년 봄 김일성이 속해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지도부는 유격대를 中(중).蘇(소) 국경지대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월경(越境)을 결의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40년 8월 김일성이 소집한 회의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부대 활동에서 소부대 활동으로 노선전환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해방직전까지 소부대 활동을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저우바오중(주보중)의 편지에서 알수 있듯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소련군과 항일연군 지도부의 결정없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일성의 월경 시점에 대해서는 그동안 8월, 11월등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번에 입수된 「동북항일연군 제1,2,3로군 월경인원 통계표(東北抗日聯軍 第一,二,三路軍 越境人員 統計表)」를 통해 10월 23일임이 확인됐다. 이 통계표는 42년까지 월경한 3백41명의 도착일과 체류지가 기록돼 있는 귀중한 자료다.
김일성은 사전에 소련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을 넘은 후 한때 소련군에 억류되기도 했다. 1940년 12월19일 저우바오중은 왕신림에게 편지를 보내 김일성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고, 41년 1월2일에는 『검사 수속이 완료된 후 빨리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저우바오중의 노력으로 풀려난 후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 근처 남야영에 머물렀다. 당시 소련 국경을 넘은 동북항일연군은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북야영과 남야영을 설치하고 이곳에 분산, 집결해 있었다.
이번에 입수된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소련땅으로 간후 두차례 만주로 파견된 사실도 처음 밝혀졌다. 41년 4월 김일성등 29명은 특수임무를 띠고 다시 만주방면으로 떠났다. 이에 대해 와다하루키(和田春樹.東京大) 교수는 『김일성이 4월 9일 남야영을 출발해 돈화.화전 방면에서 웨이정민과 제1로군의 생존부대를 찾았으나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28일 야영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에 입수된 1로군 파견 명단에 의하면 김일성은 4월10일 출발했다 그해 11월12일 돌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신주백(辛珠柏. 성대 강사)은 『중국공산당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김일성은 9월에 다시 만주로 파견됐다 11월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김일성이 소련 국경을 넘은 시점부터 42년 8월 소련극동군 제88특별여단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행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국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이 40년 말부터 속속 소련땅으로 넘어가자 이들에 대한 지휘권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됐다.동북항일연군측 저우바오중과 소련군측 왕신림은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소련군과 항일연군과의 관계는 40년 3월 19일 왕신림이 저우바오중(주보중)등 주요 간부에게 보낸 지시강령(指示綱領)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당과 총지휘를 대표해 평화시기와 군사시기에 만주유격대 운동등 여러 문제를 지휘하러 왔다. 우리가 현재 임무와 지도를정확히 수행할 수 있도록 동북항일연군 및 당위원회에서는 계통적으로 우리에게 전체 문제를 통지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저우바오중은 『장기적으로 중공중앙과 중앙대표들과의 연계를 잃어버리고 또 동만(東滿)의 유격운동이 사면(四面)으로 포위돼 극히 간고한 위치에 있는 한 왕신림 동지의 형제적 우의, 협조와 원조를 받는 것은 아주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항일연군을 소련군 계통에 포함시키려는 왕신림과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저우바오중 간의 내부갈등은 계속됐다.저우바오중은 41년 3월16일 왕신림에게 편지를 보내 남야영에 파견돼 있는 소련군 간부가 『야영 책임자의 허가도 없이 유격대원을 이동시켜 다른 곳으로 가 사업하게 한 것』에 대해 항의까지 했다.
***내부갈등 지속
그러면 1939년말부터 항일연군과 소련극동군의 정식회의에 소련측 대표로 참석했고 김일성과도 접촉했던 왕신림은 누구인가. 1944년 소련군 정찰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왕신림이 준 표창을 받았던 여영준(呂英俊)은 왕신림이 저우바오중의 다른 이름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왕신림이 중국인이 아니라 소련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동북항일연군 간부였던 펑스루(彭施魯)는 『왕신림은 소련극동군 내무부장이었던 바실린 소장의 중국식 이름이다. 1941년 1월 바실린이 극동소련군 정보부장 차르겐 소장으로 교체됐지만 그는 비밀유지를 위해 왕신림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고 회상했다. 즉 왕신림이란 이름을 두 사람이 사용했던 것이다.
왕신림의 교체는 저우바오중의 승리를 의미했다. 저우바오중의 집요한 요구와 항의로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권은 중국공산당이 갖는 것으로 결론났던 것이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권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과 소련의 다툼 속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발언권이 끼어들 여지는 봉쇄돼 있었다. 왕신림의 「지시강령(指示綱領)」에는 소수민족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어떠한 조건을 막론하고 우선 계급이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항일연군내 조선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았다. 실제로 42년 1월16일 1년간의 활동을 총괄한 「남야영 간부회의 총결 결의안」은 왕신림의 지시강령과 저우바오중의 지시편지에 입각해 남야영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김일성이 소련 지역으로 넘어간 후에도 아무런 독자적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중앙일보] <한국현대사>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김일성)의 越境(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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