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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돕다 (2)
Korea, Republic of 김태산 0 334 2020-12-25 12: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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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체코로 다시 돌아온 나는 며칠을 고심하다가 어느날 술 한 잔 마시며 아내에게 망명할 의사를 슬쩍 내비쳤다.  아내는 대번에 펄쩍 뛴다. 예상했던 일이다. 평양에서는 부모형제는 물론 우리의 맏아들과 큰딸이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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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망명하면 양쪽가문에 닥칠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나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 망명을 모색을 했다. 처음엔 유럽 쪽으로 숨어들가 하다가 여러 가지로 한국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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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2년 6월이었다. 서울에서는 세계월드컵경기가 한창이었다. 몰래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한국의 발전된 체육의 배경에는 강한 경제력이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쁘라하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한국행 조언을 받을 결심으로 한국 대사관에 두 번이나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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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번 모두 여성이 전화를 받기에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에 “ 남조선이 축구를  잘해서 전화를 해봤습니다.”라고 답하고는 끊었다.  훗날  국정원 조사에서 그 말을 했더니  조사를해보고는  전화를 받은 분이 대사관 가족으로 영사부에서 일하는 분이라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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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대사관 가족들은 업무를 안 시키는데 한국은 가족들을 업무에 투입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의 실수였고 두 번째로 여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또 다른 실수다. 그래서 나는 한국 대사관에 직접 가 볼 생각으로 한국대사관 앞에 두 번을 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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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사관은 북한대사관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어서 위험했다. 그래서 감히 한국 대사관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만 바라보았다. 한국은 돈이 있으니까 경찰경비도 있었고  그 당시 흔치않은 감시카메라도 대사관 밖에 설치되어있어서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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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은 흐르는데  보위원은 공적을 세우려고 나를 잡을 작전도 꾸몄고 여러 가지로 망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게 조건이 나를 압박했다.  드디어  나는 2002년 9월9일에 탈출하기를 결심하고 아내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강경하던 아내도 하늘이 도와서인지 마음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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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한두 줄의 글로 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별치 않게 생각했던 문제도 한국에 와서 보니 나를 빨라 보내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다고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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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탈출 날자를 9월 9일로 정한 이유는 북한은 해외노동자들도 국가적 명절에는  “충성의선서”행사를 무조건 한다.  그래서 내 주위를 감도는 보위원과 통역들을 다른 지역에 있는 가방공장 ,속옷공장 ,부직포공장으로 보내서  9월9일 아침에 선서를 해주고 오라고 내보낼 작전을 세웠다.  드디여 9월7일에 모두 내보내고 보위원은 제일 먼 부직포공장까지 열차를 타고 내가 데려다 주고 나는 본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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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음날 아침, 즉 9월 8일  아침 7시경에 일어나니 왠지 무조건 오늘 탈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몰아쳤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노동자들도 모두 쉬는 날이다. 나는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는 "8시부터 내가 노동자들 선서를 해주고 오겠으니까 빨리 서울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라" 고 강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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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시에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선서를 끝냈다. 그리고는  “오늘 내가 쁘라하 대사관에 올라가니까 보위원도 통역원도 없는 조건에서 사고가 나지 않게 명절을 잘 지내라.”고 지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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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와서 “어떻게 됬어?”하고 물으니 아내가 기막힌 답을 한다.
여행사에 전화를 하니까 모두 예약이 되고 마침내 꼭 세자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마치도 우리가족 셋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 같았다.. 그런데 같은 좌석이 아니고 세 명이  갈라져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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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다른 생각을 할 두뇌가 없었다. 오직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아내에게 자고 있는 막내딸 (4살)을 깨워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사진첩만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말하고 나는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도 모든 것을 평상시 그대로 해두고 주차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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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쁘라하 비행장에 도착해서 비행기 표를 구입은 했으나 한국비자가 없이 북한여권을 소지한 우리가 검색대를 빠져나갈 걱정이 아뜩했다. 여권 검색에서 걸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트렁크 하나는 짐으로 부치고 드디어 여권검색대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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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겸손히 웃으며 인사를 하고 하회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불과 10초 사이인데 수십년 같이 느껴진 것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느끼지 못할 시간과 감정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검사원이 아무 말 없이 통과 도장을 쾅-쾅 찍더니 오히려 웃으면서 “굳-바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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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체코에서 독일로 갔다. 당시에는 쁘라하 - 서울 직행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기다림 칸으로 들어가는 순간 확 놀랐다. 웬 일인지 거의 모두가 조선 사람들만 있는 것이다. 꼭 우리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구도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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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분 이상 안타까운 기다림이 지나고 루프트한자에 탑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권과 비행기 표를 또 대조한다. 숨이 컥 막힌다.
애써 편안히 다가서서 여권과 비행기표를 넘겨 주며  한 가족이니 자리를 합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여권을 보는 여인이 우리여권을  옆 사람에게 넘겨주며 좌석을 모아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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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여간 옆에 서서 컴퓨터를 다루는 그 여인을 바라보는데  "왜 저렇게 느린가? " 하는 원망이 막 나온다.  드디어 우리에게 여권을 넘겨주며 좌석을 합쳤으니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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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국행 루푸트한자를 10시간 이상  타고 밤새 온가족이 한잠도 못자고, 말 한마디 없이, 정든 고향과 그리운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또 그렇게  2002년 9월9일 일요일에 드디어 50년 동안을 웬쑤라고 욕만 하던 남조선 땅 인천공항에 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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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온 가족이 비자도 없이 북한여권을 가지고 인천공항에 내려서 어쩌지 못하고 한 시간 이상을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누구도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처음으로  무관심 속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해보니 그 안타까움과 적막함 또한 겪어보지 못한 분들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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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못해  평양에서 왔다고 자진 신고를 하니 미친놈 취급을 하며 믿는 자가 없더라. 후에는  국정원 조사를 받는데 자꾸 다른 여권과 비행기 표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아니 아까 여권과 비행기 표를 다 주지 않았습니까.”하고 계속 같은 답을 하니 비자도 없이 북한여권을 가지고는 절대로 올 수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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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도 안되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는  아주 쉽게, 아주 묘하게. 무서울 정도로 하도록 만들더라.
한국에서 하나님을 접하고야 이 모든 섭리가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을 나는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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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무서운 진실은 다음에 있다.
조사가 거의 끝나고 막바지에 앞면에 검은 유리가 달린 취조실에 우리 가족과  국정원일꾼이라고 짐작되는 분들 3-4명과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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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묻는다며 “김선생님! 정말 모르고 왔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아니 뭣을 자꾸 모르고 왔는가를 묻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분이 그러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더니 “ 선생님이 여기 도착한 다음날에 선생님을 대신할 사장과 재정일꾼 한명, 그리고 선생님을 데리고 나갈 사람 두명 도합 4명이 쁘라하 비행장에 내렸습니다. 물론 북한 대사와 보위원이 비행장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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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정신이 아뜩해서 할 말을 못 찾았다. 강제로 자기를 끌고 왔다고 삐쳤던 아내도 말을 못하고 아연해진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하루만 늦었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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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도 나의  탈출을 심히 의심하며 다 조사한 내용이니 조금도 거짓이 아님을 독자님들에게 사담 삼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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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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