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대한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관계..0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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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편. 스티코프의 전문, 즉 김일성이 전달한 모택동과의 회담내용은 아래와 같다.
마오저뚱(모택동)이 대답하기를 조선민족해방군(HOA)에 소속되어 있는 3개의 북한군 사단중 2개 사단은 심양과 장춘에 배치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나머지 하나의 북한군 사단은 공격작전에 참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오저뚱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무장을 완비하고 만주에 주둔해 있는 2개의 북한군 사단은 언제든지 북한정부에 보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북한군 사단은 오직 전투가 끝난 후라야 만이 남쪽에서 돌아올 수 있는데 시기는 한달 후 정도쯤에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마오저뚱과 함께 김일 이 말하기를 앞서 언급한 사단들은 일반적인 사단과는 달리 비정규군이기 때문에 전쟁과 같은 상황하에서는 강하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북한군인들에게 이 사단의 장교들은 전쟁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3개의 사단들은 일본 장비로 무장되어 있기에 김일은 마오저뚱에게 중국측이 이러한 3개의 북한군 사단에 대한 탄약지원이 가능하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마오저뚱이 대답하기를 중국측은 탄약을 제작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북한측에서 원하는 대로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오저뚱과 주덕은 자세하게 북한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마오저뚱은 한국에서 언제든지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도 이점을 고려하여 주도 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전쟁은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오래 끝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오래 끄는 전쟁은 유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오래 시간을 끌면 일본이 끼어 들어 “남한정부”에 지원을 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신들 바로 곁에 소련이 있고 우리들은 만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우리는 당신들에게 중국인 병사들을 보내줄 수도 있습니다“라고 모택동은 말했습니다.※(참고) 《 『基本文獻』, 「1949년 5월 15일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신」, 18-20쪽. 》 코바레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에 따르면, 김일은 1)현 동아시아의 상황 2) 정보국창설에 관한 문제 3) 북한측에 장교요원 및 무기지원에 관한 사항의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毛(모)와 논의하였다. ※(참고) 《 앞의 1949년 5월 18일자 코바레프 전문 》 김일은 모택동과의 면담에서 “불가피한 경우엔, 북한정부에 “조선민족해방군“ ※(참고) 《 이 명칭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이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인 병사로 구성된 사단을 지칭하는 것 같다. 1947-47년 사이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의 열세속에 국민당과의 전쟁에 참전시킬 목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조선인들을 모병하였다. 그러나 1949년 3월 당시 이 사단들이 만주의 조선인으로만 구성되었는지 북한 출신의 병사들도 포함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1948년 1월 중국공산당은 중공군을 동북민주연군에서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바 있다. 새로운 명칭은 이전 동북에 있던 련군이 항일의 다민족연합군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새 명칭은 연합군의 성격이 사라졌기에 조선병사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해방군이라는 명칭으로 분리하여 개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
에 구성되어있는 북한군(이하 조선 인사단으로 표기함)을 북한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참고) 《 앞의 1949년 5월 15일자 스티코프전문. 》 스티코프의 보고내용과는 달리 毛(모)가 북한측에 이야기하였다는 내용,》 즉 코바레프가 전달하는 회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마오저뚱은 북한에서 사병요원과 군장비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함. 만주에는 150만의 한국인이 있고 그 중에는 2개의 북한군 사단에 편성되어 있음(각각의 사단에 10,000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음). 그들 중 한 사단은 전투경력이 있으며 그 사단은 만주에서 국민당 부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음. 이 사단들은 북한의 요구가 있을 시 언제든지 북한으로 파견될 준비가 되어 있음. 아직까지는 북한측의 요청이 없으나 우리는 그들의 요청시 이 사단을 파견할 것이며 모두에게 전술을 가르칠 것임. 이것 외에도 우리는 현재에도 보충교육을 받고 있고 한달 후 북한으로 파견될 200명의 장교들이 준비되어 있음. 만약 남한측과 북한측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는 특히 앞서 언급한 사단을 위하여 그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무기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음. 북한측에서는 낙관적으로 미국군대는 곧 한국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미국 군대 대신 일본군대가 들어오며 일본군대의 도움으로 남한측은 북한측으로 공격을 개시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하여 두려워함. 우리가 북한측에 조언을 해준 것은 이 전쟁에서 남한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역습(기습)을 하자는 내용임. 만일 그러할 경우 남한 군대에의 일본군의 부재에 대하여 주도면밀하게 계획(고려)하여야 하며 조심성 있게 처리해야 할 것임. 만약 상대편의 힘이 우월할 경우 남한측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북한측의 영토를 희생해야 할 것임. 우리는 그들에게 전 당과 군대.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전했는데 이러한 이유는 북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패할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책동으로서 이다. 만약 미국군대가 철수하고 또한 일본군대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황하에서는 우리는 북한측에 남한측으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권하지도 않을뿐더러 더욱 더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도록 (조언할 것이다.) …… 우리는 북한측의 남한 진격개시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만약 1950년 초기의 국제정세가 이러한 가능성에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만약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리고 일본측 군대가 한반도의 이러한 상황에 개입을 한다면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어 일본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 이에 대해 마오저뚱 동지는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한 우리(중국)의 행동은 오직 모스크바의 동의 후에 개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참고) 《 『기본문헌』, 「1949년 5월 18일자 코발로프가 필립포프(스탈린에게 보낸 전신」, 》
위의 두 전문은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모택동의 반응이 전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첫째는 조선병사의 송환문제이고 둘째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한 모택동의 입장이다. 첫 번째 차이점은 스티코프의 전문에서는 毛(모)가 3개 사단의 조선 병사들을 이야기하였지만 코발레프의 전문에서는 2개 사단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차이점은 스티코프의 전문에서는 毛(모)가 앞으로 있을 한반도의 전쟁을 위하여 보다 강한 지지를 한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코바레프의 전문에서는 毛(모)가 한반도의 전쟁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스티코프 전문에는 毛(모)가 조선병사 사단에 이야기할 때는 중국이 일본식 무기에 사용되는 탄약을 제조하여 북한이 필요한 만큼 공급하겠다는 약속도 하였으며 북한이 전쟁을 어느 때나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난다. 毛(모)는 말하기를 ‘소련이 당신 곁에 있고 만주에 우리가 있다. 어려운 경우 중국군을 보내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남한이 북침을 할 경우를 대비하여 선재공격을 하여야한다고 북한의 남침을 촉구할 정도로 남침을 적극 지지하였다. 다만 일본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쟁이 장기전이 되지 않도록 북한에 주의를 준 정도였다. 반면에 코발레프의 전문에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하여 모택동은 상당히 복잡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남침계획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많은 남침의 전제조건을 이야기함으로 毛(모)가 남침을 반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毛(모)는 일본이 남한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에만 남침을 승인하는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毛(모)는 전문의 어느 곳에서도 한반도의 내부사정과는 전쟁을 연관시키고 있지 않다. 毛(모)는 전쟁의 시작은 국제 정세에 의해 결정될 문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 인가? 회담이 있은 후 그 회담내용이 위의 두 전문으로 작성되기까지는 두 화자 즉 모택동과 김일성, 그리고 두 전달자 스티코프와 코발레프 모두 4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면 이 4명중 누군가가 회담내용을 왜곡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밝히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의 동력이 누구에서 왔는가하는 문제를 밝히는 열쇠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위의 4명중 코발레프는 한반도문제와 직접 상관이 없었던 인물이다. 코발레프는 공식적으로는 스탈린이 중국의 철도문제를 도와주기 위해 중국에 파견한 사람이나 실제는 스탈린과 모택동사이의 연락을 담당하고있었다.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코바 방문시 김일성과 스탈린간에 오고간 한반도의 무력통일 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했던 만큼 코발레프는 ※(참고) 《 Ivan Vladimir Kovalev: 모택동이 1949년 12월 모스코바를 방문할 때 코바레프가 없어도 소련의 대중국공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스탈린에게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중앙문헌출판사), 『건국이래모택동문고, 1949年9月-1950年12月』 1권 136쪽, 「1949年 11月 12日 급사대림적전보」. 그 이후 코바레프는 중국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1991년 소련출신의 학자 곤챠로프(Sergei N. Goncharov와 자신의 중국시절에 관한 대담에서도 한국전쟁에 관하여서는 이야기를 하고있지 않다. Ivan V. Kovalev, with S. N. Goncharov, 「Interview, Stalin's Dialogue with Mao Zedong」, 『Journal of Northeast Asian Studies』, 10:4권 (Winter 91/92: 43-76쪽. 》 한반도문제에 관한한 제 3자의 입장이였다. 그러므로 코바레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신은 毛(모)가 말한 그대로를 전달했을 것으로 믿을 수 있다. 모택동 자신이 회담내용을 왜곡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5월 14일 즉 毛(모)와의 회담 직후 보고하였고 毛(모)는 코발레프에게 회담 3일 이후에 이야기하였다. 毛(모)는 이 3일간 자신의 입장을 다시 정리하고 마치 남침을 지지하지 않는 것처럼 코발레프에게 이야기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毛(모)의 최대 관심사는 모스코바를 방문하여 앞으로 있을 대만침공에 필요한 중국의 해군과 공군건설에 스탈린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 이였다. 毛(모)는 북한의 남침계획을 지지하는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더 많은 대만침공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거짓으로 남침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은 있다. 스티코프의 전문은 “마오저뚱은 북한정부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과정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John Lewis의 연구는 毛(모)로서는 북한의 남침계획보다는 김일성의 모스코바 방문동안 스탈린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나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참고) 《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and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136-149쪽 》 그러한 毛(모)는 코발레프에게 조선병사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그 병사들이 마치 전투 준비가 된 부대인 것처럼 스탈린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히 毛(모)는 스탈린에게 자신이 북한의 남침계획과 남한의 ‘해방’에 확실한 물질적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한 것 같다. 이상... 03편에서 계속~~ 147 8/20끼 ㅈ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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