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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대한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관계..03편 시리즈
Korea, Republic of 돌통 0 254 2021-02-04 22:08:48
  03편.



毛(모)가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두 전문에 나타난 모택동 태도의 차이점은 김일성과 스티코프쪽에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모택동의 지지를 과장하여 전달하였다면  위의 두 전문은 한국전 발발원인 연구의 가장 큰 문제, 누가 전쟁을 시작하였나 하는 문제에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구 소련 문서가 공개된 이후 가장 활발한 저술을 하고 있는 학자로 캐드린 웨드스비는 전쟁의 동력이 김일성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신에 차 이야기하고 있으며, CNN에 출현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참고) 《 각주 1에서 소개한 CWIHP의 Bulletin에 소련점눈의 번역과 실린 논문들에 Kathryn Weasthersby의  주장은 잘 나타나 있으며,CNN출현은http://www.cnn.com/SPECIAL/ cold.war/episod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Goncharov와 Lewis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앞의 책 144쪽. 》



그러나 전쟁의 책임을 김일성에게 돌리기에는 아직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 또한 김일성이 강력히 요청하고 스탈린이 마지못해 남침을 승인했다는 웨드스비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당시  북한-소련의 경제협력문제나 다른 문제들을 생각할 때 아주 받아들이기 힘든 설명이다. 


경협문제나 다른 문제에 나타난 김일성은 스탈린은 차지하고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조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스탈린과 스티코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경우는 한국전쟁 발발이후 까지도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점을 고려하면 전쟁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요구를 마지못해 허락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참고) 《 문제는 짧은 지면에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학위 논문 Chapter 2, Talk of War: Moscow and Pyongyang, March 1949-June 1950"에서 다룬바 있다.  》



김일성이 위의 두 전문의 차이에 책임이 있을 가능성은 그대로 남겨두고 또다른 가능성, 즉 스티코프의 책임일 가능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스티코프는 1945년 8월 이후 북한의 문제를 주도해온 인물이며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코바 방문 때에도 동행하여 북한의 남침계획에 깊이 관여해온 인물이다. 


스티코프의 호전적 태도와 남침의 성공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는 이후에도 나타난다.  그는 1949년 9월 15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북한이 옹진반도를 침략할 경우 성공할 것이라고 보고한 적도 있다.※(참고) 《  1949년 9월 15일자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낸 남북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基本文獻』33-49쪽. 이 문제는 나의 학위논문 Kim, Jin Kyung, "The Evolution of the Korean War and the Dynamics of Chinese Entry" (1996년, University of Hawaii,80~110쪽) 》


이는 소련 평양 대사관의 문관이었던 그리고리 툰킨이 옹진침공 작전에 비관적 전망을 하였던 것과 대조되며 그 계획은 결국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승인하지 않아 실행되지 않았다.   정치국은 옹진침공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스티코프에게 그의 낙관적 전망에 대한 경고를 보냈다.


지금까지의 검토한 것 만으로는 위의 두 전문의 차이가 누구의 과장 때문인지를  밝히기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두 전문으로부터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무력사용을 논의하고 있었고 스탈린도 이에 분명히 연관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조선병사 송환문제는 북한의 남침준비의 일부로 논의되었다는 것을 毛(모)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의 학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중국이 전혀 몰랐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참고) 《    Hao Yufan과 Zhai Zhihai는 중국이 북한의 남침준비과정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중국이 마치 한국전쟁의 피해자인양 주장하였다.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History revisited," The China Quarterly, 121 (March 1990: 94-115. 》



셋째 두 전문 모두에서 毛(모)는 일본의 부활에 대하여 다소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毛(모)의 극동에서의 전략수립에 일본이 그 중심적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나며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충분한 생각을 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위의 두 전문에서는 모택동은 중국이 서방세계에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질까하는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둔 것으로 나타난다. 김일은 毛(모)와의 회담동안 아시아 공산당의 ‘연합정보국’을※(참고) 《  

John Lewis 이 연합정보국을 “Union of Asian Communist Parties”로 번역하고 있다. Sergei Goncharov, John Lewis, and Xueli Tai,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ford Univ. Press, 1993, 72쪽 》



조직할 계획에 대하여도 논의하였다. 이 문제는 스탈린이 毛(모)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북한측에 그 문제를 제기하도록 지시하여 회담의 안건이 되었다. 毛(모)는 연합정보국 설립의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며 반대하였다. 


毛(모)는 중국, 인도차이나, 그리고 한반도의 상황이 긴박하고 그런 연합정보국의 설립이 마치 군사동맹같이 보일 지 모른다고 반대를 하였다.※(참고) 《  위의 「1949년 5월 15일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신」,『基本文獻』,  18-20쪽. 》


毛(모)는 북한의 남침조건으로 국제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毛(모)가 국제상황을 조건으로  한반도에서의 개전을 반대한 것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1950년 5월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후 毛(모)에게 통보하며 국제적 상황이 남침에 유리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참고) 《  “1950년 5월 14일자 비신스키가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 『基本文獻』 73쪽 》



국제적 상황이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毛(모)가 핑계로 인용한 국제 상황을 스탈린이 역이용하여 남침을 승인하였을 때 毛(모)는 할말이 없었다.


상술한 김일성의 북경방문의 중요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북한측의 방문목적은 조선병사의 송환과 그 병사들의 무장과 보급에 대한 毛(모)의 지원약속을 받는 것이었다. 이는 성취되었다. 


둘째 한반도 통일에 무력을 사용한다는 계획과 원칙에 毛(모)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毛(모)의 지지는 남한측이 일본에 개입할 경우에만 승인하는 조건부였다. 毛(모)가 국제적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남침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전쟁을 무한정 연기하라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셋째 스티코프의 전문에는 비록 毛(모)가 북한의 남침지원에 많은 전제조건을 달고 있었지만 毛(모)는 북한에 조선병사를 송환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비록 일본개입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중국병사의 지원까지 언급하였다. 이는 중국의 한국전 개입과도 연관이 있는 발언이다.


위의 두 전문에서 모택동이 북한의 남침계획에 어떠한 태도를 보였나하는 의문에  가장 중요한 해답을 주는 것은, 두 전문의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이 두 전문을 비교할 검토할 때에만 나타난다. 


스티코프의 전문은 毛(모)가 이야기를 나눈 북한측 사람은 '김일'인 점을 밝히고 있다. 전문의 시작에 “김일성은. . .중국에 보내어 졌습니다” 라고 스티코프가 언급할 뿐 김일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毛(모)와의 회담은 김일과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코발레프의 전문은 “만주에서 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김일성이 동행했음” 이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문 역시 毛(모)와의 대화 상대는 김일 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편지를 毛(모)에게 전달한 것도 김일 이었다.  즉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하였으나 毛(모)와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김일성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수상이 다른 인물과 동행하여 중국을 방문하였음에도 毛(모)는 그 수상을 상대하지 않고 수상의 수행자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는 1949년 3월 모스코바 방문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수상지위에 걸맞게 김과 비밀회동까지 한 것과 대조되는 태도였다. 


상식 밖의 毛(모)의 행동은 김일성의 방문목적에 대한 毛(모)의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내준다. 비록 김일과의 회동에서는 일견 북한의 무력행사 계획에 지지를 보내는 듯 하다가도, 지지를 위한 많은 전제조건을 달아 북한의 남침계획에 모호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毛(모)의 화술이 반쪽 지지만을 나타낸다고 하면 김일성을 상대하지 않았던 毛(모)는 분명히 북한의 계획에 대한 자신의 강한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의 상황은 毛(모)와 김일성간의 일종의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김일이 “중국이 건국할 때 북한노동당의 중앙위원회는 중국정부를 승인하고 김일성이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 毛(모)는 중국이 홍콩을 접수하고 국가를 안정시킬 때까지 건국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김일성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김일성의 북경방문요청을 간접적으로 거절한 것이다.  사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선언기념식에 북한사절단은 참가하지 않았다.※(참고) 《   George Ginsburg and Roy U. T. Kim, Calendar of Diolomatic Affairs,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1945-1975, (Moorsetown, NJ: Symposia Press, 1977, 22 》



김일 과의 대화에서 毛(모)는 “중국은 북한노동당과 중국공산당간에 긴밀한 관계를 원하며 북한측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신임받고 있는 중국공산당 동북지구의 서기장 '고강'과 교섭”을 할 것을 권하였다.  


毛(모)가 김일성에게 이런 친근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김일성과 고강이 이미 북경의 간섭없이 많은 접촉을 해왔다는 점과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원으로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할 당시 모택동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이 1930년대에 만주에서 행한 항일투쟁 활동은 毛(모)와 김의 관계를 밝히는 몇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곤차로프느 그의 연구에서 북한과 중국공산주의자의 관계가 상당히 친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 《   Goncharov 외, 前揭書 134쪽》


 

김일성은 1930년대에 중국 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1940년 관동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소련의 연해주로 도피하였을 당시 김은 중국공산당원이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김과 毛(모)의 우호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상...      04편에서 계속~~

151pag끼? ㅈ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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