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때.. 만주에서의 독립투쟁. 04편 시리즈 총06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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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편 1933년 봄에 김일성은 일제와 직접 전투를 치렀다. 일제는 당시 왕청현 소왕청에 공격을 가했는데 여기서 왕청유격대는 '항일구국유격군'의 이연록의 지휘에 따라서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일성은 같은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 등과 같이 크게 분발해서 장비가 우세한 일본군을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 (참고)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항일만주투쟁』(창작과비평사, 1992), pp. 94~97.} 이 일로 김일성은 군사적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김일성은 또 1933년 9월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구국군의 오의성 부대가 치른 전투인 이른바 동녕현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는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길림 구국군 제3단 및 혼춘유격대와 왕청유격대가 참가했는데 이 때 김일성은 혼춘현과 왕청현의 일부 유격대를 지휘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는 겨우 두 명의 전사자만 내는 등 아주 적은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구국군과 대비되는 성과였다. 이로 인해 김일성은 구국군 및 중국공산당 내에서 군사적 지휘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 (참고)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현실』 12권(1994), 한국사연구회, p. 166. } 그 후 1934년 3월 연길현 삼도? 장지현에서 동만특별위윈회와 유격대 간부들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동만의 유격대들을 통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만들기를 결정하였다. 여기서 조선인 주진을 사장으로 중국인 왕덕태를 정치위원으로 선출하였다. { (참고)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선인, 2005), p. 149. } 그리고 연길, 화룡현 유격대가 각각 제1단, 제2단으로 편성된 되었고 곧 이어 왕청, 훈춘현 유격대가 제3단, 제4단으로 편성되었다. { (참고)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백산서당, 1988), p. 152. } 이 때 제2군 독립사에 속한 인구의 대다수는 조선인이었는데 왕청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은 이후에 제3단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참고) 단장 方振聲, 초대 정치위원은 南昌一이었으나 전사하였고 이후 김일성이 정치위원이 되었다. } 그러나 이 당시 김일성에게 시련이 있었다. 그 시련의 원인은 바로 동만의 ‘민생단 사건’이었다. { (참고) ‘민생단사건’이란 1930년대 전반 동만의 유격근거지 내에서 많은 수를 차지했던 조선인들을 ‘民生團’이라는 단체에 가입한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서 대대적으로 처형, 숙청, 고문 등 박해를 가한 사건이다. } 민생단사건이 진행될 당시에는 조선인 항일무장 투쟁가들이 엄청난 고난을 당했는데 김일성도 민생단 단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한편 김일성이 민생단으로 오해받고 있었을 때인 1935년 2월 말에 중국공산당 합이빈시위원회 서기인 위증민의 주재로 연길현 대황?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를 대황외 회의라고 한다. 여기에는 동북인민혁명군들의 간부들과 대원들이 참가했다. 대황외 회의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을 개편한다는 내용과 민생단을 처단한다는 반 민생단 투쟁에 관한 미약한 수준의 반성과 결의가 통과되었다. { (참고)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2군에 미친 영향?, 『한국사연구』 91권(1995) 한국사연구회, pp. 150~151. } 그런데 대황외 회의에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제3단 정치위원인 김일성이 참가하였는지 하지 못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주장과 중국공산당 기록이 엇갈린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 대황외(김일성 회고록에서는 ‘다홍왜’라고 표기) 회의에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가해서 반 민생단 투쟁의 오류성을 지적하고 심하게 비판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공산당 길동특별위원회 서기인 양송 이 1935년 2월 10일자로 동만주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김일성이 이 회의에 가면 북만원정 중인 부대에 문제가 있다.’라고 적혀있다. { (참고)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현실』 12권(1994), 한국사연구회, pp. 169~170 } 이 내용을 보면 김일성은 대황외 회의에 참가하는 대신에 북만주 지방에 있었을 가능성 이 더 크다. 그래서 김일성이 대황외 회의에 참가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 (참고)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선인, 2005,p.151 } 또한 제2군은 병력 1200여명의 군대로 총 4개의 단과 유격대, 교도대, 경위련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 김일성이 속한 제3단의 병력은 200명가량의 병력이 있었고 제1단은 250여명, 제2단은 300여명, 제4단은 300여 명이었다. { (참고)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2군에 미친 영향?, 『한국사연구』 91권(1995) 한국사연구회, pp. 138.} 이 당시 김일성은 유격대 시절부터 인정받은 군사적 능력과 민생단 혐의 탈피 덕분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높은 지위에 올랐다. Ⅳ. 동북항일연군 활동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채택된 반파쇼인민전선 방침은 항일무장 세력의 결집을 요구하였다.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에서는 동만특별위원회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영도간부회의, 즉 미혼진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김일성(金日成)도 참가하였다. { (참고)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권(1998), 한국사연구회, p. 257. } 이 회의에서는 항일연군을 결성하라는 8.1선언의 { (참고) 1935년 8월 1일 공산 국제 주재 중공 대표단이 중국 소비에트 중앙정부와 중공 중앙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으로 전국의 각 계층, 각 당파, 각 군대 모두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여 항일을 할 것을 호소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지시를 따라 동북인민혁명 제2군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하였다. { (참고)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2군에 미친 영향?, 『한국사연구』 91권(1995) 한국사연구회, pp. 139~142. } 이 때 군장에는 왕덕태, 정치위원에는 위증민, 정치부주임에는 이학충, 참모장에는 유한흥이 되었는데 최고위급 간부들은 역시 중국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제7단, 제8단이 속해 있었다. { (참고)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제1사부터 제3사까지 있었으며 제1사 밑에 제1단과 제2단이, 제2사 밑에는 제4단과 제5단이 속해있었다. 제6단은 사 司令部가 직접 인솔하는 부대였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총사령관은 양정우이고, 왕덕태가 부~~~ 이상... 05편편에서 계속~~ 8 pagㄲ ?ㅈ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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