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전쟁의 원인 및 배경. 시리즈 02편 총 11편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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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편.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엄연한 사실을 아래서 밝힌다. ● 한반도 분단의 유형과 과정 분단은 크게 세 가지 유형 또는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1945년 8월 해방과 거의 동시에 38선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잘렸다. 둘째, 1948년 8월 남쪽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9월 북쪽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짐으로써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에 의해 체제가 나뉘어졌다. 셋째,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6·25전쟁으로 같은 민족이 원수처럼 갈리게 되었다.
한반도는 이렇게 1단계 국토 분단 또는 지리적 분단이 이루어지고, 2단계 체제 분단 또는 정치적 분단으로 강화되었으며, 3단계로 민족 분단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분단을 말하면 당연히 국토 분단을 가리킨다. 국토 분단을 통해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서게 되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민족까지 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해방되기 전에 이루어진 국토 분단
우리는 흔히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고 말하는데,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해방되기 전에 먼저 분단되었다. 해방은 일본 천황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찾아왔지만, 분단은 일본군이 미군에 은밀하게 항복 의사를 전한 직후인 1945년 8월 10일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미군에 항복의 뜻을 전한 때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직후였다. 소련이 8월 8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로 진격해오기 시작한 때와 겹치기도 했다. 미국은 막 실험에 성공한 핵무기를 떨어뜨리면 일본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예상했어도, 그렇게 즉시 항복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의사를 받고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8월 10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지도에서 38선을 찾아냈다. 38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될수록 조선 북쪽 멀리까지 올라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싶었지만, 바다 건너 오끼나와 및 필리핀에 있던 미군들이 군함으로 조선에 이르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려야 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 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으로 진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38선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땅덩어리는 조금 작아도 수도 서울 및 인천과 부산 등 큰 항구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훨씬 더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리라 짐작했는데, 소련은 뜻밖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은 터였지만 38선에서 남하를 중지했다.
산이나 강을 따라 이루어진 자연적 경계선도 아니요, 생활이나 풍습이 달라 문화적으로 차별이 되는 경계선도 아니라, 단순히 토지 측량을 위해 지도에 그려놓은 38선으로 남북이 나뉘게 된 이유다. 한 마을에서 큰집은 북쪽에 작은집은 남쪽에, 또는 한 집에서도 안채는 북쪽에 뒤채는 남쪽에 속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소련군은 북쪽으로 8월 9일 들어왔지만 미군은 한 달 뒤인 9월 8일에야 남쪽에 도착함으로써, 해방된 뒤에도 38선 이남에서는 일본군과 친일파들이 활개 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이 국토 분단의 공범이지만, 정확하게 얘기하면 미국은 38선을 ‘먼저 제안한 주범’이고 소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종범’이다.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역사에 대한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조선 점령 및 분단에 빌미를 준 침략자 일본도 분단에 큰 책임이 있고, 힘이 약해 일본에 침략 당한 우리 조상들도 분단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상.. 03편에서 계속~~ 3.침략자 일본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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