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편
● 김일성 환영대회
◎소 훈장달고 소서 준 원고 낭독/「전설의 노장」
기대한 군중들 “웅성웅성”/“가짜다” 소동 일자 소련군이 총 쏘기도/증언자 박길용씨 박재창씨
해방 두달이 지난 45년 10월14일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이 마침내 시민들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축지법을 써 두만강을 넘나든다던 김장군의 일화는 이미 평양시민들에게 전설이었다
며칠전부터 김일성장군이 벌써 평양에 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이날 운동장은 군중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빽빽하게 찼다. 40만명이 모였다는 말도 있었고 이 대회의 진행등을 맡은 메크레르 중좌는 『30만명은 족히 됐다』고 말했다.
수만명이 몰려왔고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대인파였던 것이 사실이다. 해방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데다 환영준비위,공청 등에서 조직적인 동원도 있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하기로 했던 환영대회는 11시가 넘어서 시작됐다.
주석단에는 소련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등 소군 장성들과 환영대회 준비위원장인 조만식 선생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도 연단 가운데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 고당이 준비위원장
이날 대회의 사회자는 전날 북부 5도당 책임자 및 연설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 선출된 공산주의자 김용범(47년 위암으로 사망)이었으며 레베데프·조만식·김일성 등 순으로 3명이 연설했다.
해방당시 고당 조만식 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박재창씨(77·고당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45년 10월14일 오전 11시쯤일 겁니다. 이날은 소련군정과 공산진영 청년단체의 대대적인 홍보 등으로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을 보기 위해 모여든 시민·학생·사회단체 회원 등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지요.
아마 6만여명이 운집했을 겁니다. 당시 평남 건준의 후신인 평안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정 지도부의 간청에 못이겨 이 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위원장은 상징적이었고 실질적으로 이 대회의 계획·준비·진행 등 모두를 소 군정이 지휘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장을 기대했던 군중들은 30대(당시 33세)로 밖에 안 보이는 젊은 청년 김일성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박씨의 증언.
『위대한 항일투쟁의 노장군 대신 앳된 얼굴의 김일성이 등단하자 군중속에서 「가짜다」라는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연설장은 뒤숭숭한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대한 붉은 군대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고 스탈린 대원수에게 조선해방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보내는 내용의 연설을 계속했지요.
그의 연설이 끝날 무렵 군중 대부분이 김일성 장군에 대한 존경과 기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회가 끝났는데도 상당수가 운동장을 떠나지 않고 웅성거렸어요.』망명 노동당 고위간부 서용규씨는 그당시 총성도 들렸다고 했다.
『가짜 김일성 소동이 일자 소련군 병사가 총을 쏘아 총소리까지 울려 퍼졌으며 사람이 다치기까지 했습니다. 일부 반공주의자들이 반공산당 구호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빚어진 사태였지요.』
그러나 이같은 약간의 불상사와 소동이 있었으나 대회는 큰 충돌없이 끝났다. 이날 대회의 명칭과 성격도 증언자에 따라 크게 다르다.
국내 북한 전문가들은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레베데프 소장과 메크레르 중좌,일본의 와다하루키 교수,「북조선왕조 성립비사」를 쓴 임은씨(본명 허진·재소 고려인협회 부회장) 등은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아닌 소련군을 환영하는 군중대회였다고 각각 주장하고 있다.
○ 준비·진행 소 지휘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 박사(72)는 『인민들에게 조선을 해방시킨 소련군에 대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목적의 「소군환영 군중대회」였지만 아울러 김일성을 인민들에게 「위대한 항일애국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선보여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소 군정과 조만식, 조만식과 김일성의 원만한 관계등을 과시하기 위한 다목적 집회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이 대회가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였다고 회고한다. 김일성은 북한땅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달여 동안 소련군정의 은밀한 지원아래 치밀하게 「집권구상」을 다져갔다.
그는 수면하에서 「김동환」이라는 가명으로 민족진영과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틈을 비집고 기반구축에 안간힘을 쏟았다. 소련군은 1개월여의 준비끝에 김일성을 군중앞에 내세울 때가 됐다고 본 것이다. 이 대회의 막후지휘자였던 레베데프의 증언은 당시 소련의 속생각을 드러내주고 있다.
『숨김없이 말한다면 김일센의 본명이 김성주 였음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북한 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반전설의 애국 영웅 김일센 장군을 상징하기 위해 김일센과 그의 부하, 그리고 당시 북한내 공산주의자들과 상의해 「김일센 장군」으로 소개했던 것지요.
대회전날인 13일 밤 김일센이 양복차림으로 왼쪽 가슴에 소련훈장을 달고 찾아와 「사령관님, 이 복장으로 내일 대회장에 나가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 연설을 하겠습니다」면서 으쓱거리더군요. 나는 소련훈장을 달고 나가면 군중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으니 떼고 나가라고 지적했지요.
그러나 연설장에서 보니 훈장을 달고 나왔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김일센의 연설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해 준 것입니다. 소련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해 고려인이 한글로 번역(외무성부상 박길용 박사는 시인 전동혁이 번역한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지요.
이날 연설에서 조만식은 조선해방에 대한 감사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해 투쟁해 나가자고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김일센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센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듯 했습니다.』이 대회 준비는 항일빨찌산파 및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실무적인 일을 맡겼지만, 소25군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82·모스크바 거주)와 고려인 출신 통역관 강미하일소좌(사망)가 배후에서 움직였다. 1주일동안 원고도 만들고 복장 마련등 연출을 했다.
메크레르의 증언도 비슷하다.
『조만식은 인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은 민족 지도자답게 이날 연설에서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만이 조선인이 살 길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하더군요. 아마 30여분 동안 연설했을 겁니다. 그는 시종 흥분한 상태였지요. 그래서인지 연설도중 그의 안경이 연단에 떨어지기도 했지요.』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 초창기 소 군정에 일했던 박길용씨의 회고.
○ 넥타이도 남이 매줘
특히 그는 소련군 사령부와 조선정치사회계 지도자들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존재로 해방후의 정국수습과 치안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지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조직과 조선공산당 북조선국 분국을 조직할 때도 산파역을 맡았지요. 소련군 사령부는 주로 강소좌를 통해 여러가지 지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는등 전권대사역을 맡겼습니다.
이같이 소련군정이 강소좌를 신임한 것은 그분이 성격이 온화한데다 정치적 식견이 높아 그 업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환영대회때 김일성이 입고 나간 양복도 강소좌 양복이었으며 당시만 해도 김일성이 넥타이를 매본 적이 없어 메크레르 중좌가 대신 매어 주었답니다.
서용규씨도 항일 빨찌산파 및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김책·안길·최용건·주영하·김용범·박정애 등의 동의를 얻어 대회를 발기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 환영대회 개최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0월5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북부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개최를 위한 예비회의때였지요.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추대되고 부위원장에 주영하·김용범·홍기수 등이 뽑혔습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대회 며칠전에 나와 보급됐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